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24] 옥중의 바울 - 빌립보서 1:12~18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4-04-23 22:45
조회
1313
천안살림교회 2014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4년 4월 23일 / 최형묵 목사


제24강 옥중의 바울 - 빌립보서 1:12~18


1. 옥중의 바울과 복음 전파 - 1:12~14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감사와 찬사로 일관한 앞의 내용에 이어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가운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기 시작한다. 메시지를 전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물론 그 메시지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또한 발신자의 근황은 관심거리였을 것이다. 특별히 어떤 문제의 상황을 두고 질책하는 상황이 아니라 감사와 찬사로 일관할 만큼 각별한 정을 갖고 있는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의 관계에서는 신상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옥에 갇혀 있는 상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면서도, 그 상황 자체를 장황하게 설명하지는 않고 곧바로 복음에 관해 초점을 맞춘다. ‘사도적 엄정성’으로 평가되는 이러한 태도는 사도 바울이 복음의 대의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보여주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 자신의 정황에 대해서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주지는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현재 서신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만으로 그 정황을 헤아릴 도리밖에 없다.

바울은 우선 자신이 당하는 일, 곧 감옥에 갇힌 상황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감옥에 갇힌 일이 복음 전파에 저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된 사연은 무엇일까? 그 실마리가 다음 구절에 나온다.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친위대와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의해 국가의 안보 내지는 지역의 평화를 해친다는 이유로 고발당했다(참조. 행 17:6; 18:13). 그런데 법정 심리 과정에서 그 혐의들을 벗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사실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고발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것이 당국에 의해 전적으로 무혐의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법정 심리과정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덕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는 계기를 누리게 된 상황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효과를 발휘했다. 틀림없이 바울은 당당한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바울의 그 당당한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을 것이다. 형제들 가운데 자신이 갇혀 있는 것 때문에 오히려 더 확신을 얻어 말씀을 겁 없이 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정황을 말한다.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당당하게 만드는 복음의 위력을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이 있는 지역의 교회 상황일 것이다.      


2. 복음의 대의 - 1:15~18


그런데 그렇게 열성적으로 말씀을 설파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크게 두 부류가 있었다. 어떤 사람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람은 좋은 뜻으로 한다. 이게 어떤 상황일까? 이러한 상황이 매우 특수한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그 다음 구절이 곧바로 말해 주고 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이것은 상반된 태도가 직접적으로 사도 바울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의 전파자라는 사실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태도를 지닌 가운데, 다만 그가 없는 상황에서 그를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반면에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없는 틈을 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동기를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사도 바울을 존경하고 사랑하기보다는 경쟁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갇힌 처지에서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전하고 있기에 이해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다음 구절이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이 구절은 동기야 어떻든 목적을 이루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건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모순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악덕의 목록을 이야기했고, 나중에 로마서 1장에서도 유사한 목록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한 바울이 여기서 그러한 ‘악덕’을 너그럽게 용인하고 있는 사연은 무엇일까? 빌립보 교회가 예뻐서일까?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각별한 정을 생각하면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야기하는 내용은 빌립보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기보다는 바울이 갇힌 감옥이 있는 지역 교회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빌립보 교회에서 일어난 상황을 말한 것이라 해도 그냥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바울은 지금 이 이야기를 매우 제한적인 맥락에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딱 꼬집어 말하면, 바울 자기 자신을 겨냥한 태도에서만 묵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 전파자로서 바울의 관대함을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점에서이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바울이라고 왜 자신이 인정받고 싶지 않았을까?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수없이 자신을 변호했다. 그 점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경쟁자로 여기고 있다면 그것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리 없다. ‘나의 감옥생활을 더 괴롭게 한다’고 실토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대의에 충실하다면, 그것이 분명하다면 나의 괴로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는 것이 본문의 취지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설령 일부의 사람들이 바울 자신에 대해 경쟁의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정령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을 뚜렷이 하고 있다면 자신에 대한 경쟁의식은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일부 사람들의 경쟁심을 묵인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대의가 훼손되지 않은 한계 안에서이며, 그 경쟁심이 바로 자신을 향하고 있는 한계 안에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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