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고통에의 공감 - 욥기 2:1~13[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2-26 17:31
조회
1290
2023년 2월 26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고통에의 공감
본문: 욥기 2:1~13



욥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통을 겪습니다. 그 동안 길러왔던 자녀들과 쌓아온 재산을 한순간에 다 잃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종기가 나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됩니다. 잿더미에 앉은 욥은 옹기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지경이었습니다.
그 곁에 두 부류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욥의 아내와 친구들입니다. 욥의 아내는 이 장면에서만 등장하여 한마디 말을 남기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반면, 친구들은 이 장면에서 무거운 침묵을 지키지만 이어 욥과 격렬한 논쟁을 이어가며 주역을 맡습니다. 대조되는 역할은 고통에 공감하는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할지 생각하게 해 줍니다. 흥미로운 것은 처음 장면에서의 역할과 이후에 이어지는 역할이 완전히 뒤집어진다는 것입니다. 욥기는 그 반전의 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입니다.

소유를 잃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삶의 근거를 잃고,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인격마저 완전히 부정당하는 지경에 이르는 고통을 겪는 욥에게 아내와 친구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일까요, 불행일까요?

그러한 욥을 두고 욥의 아내가 말합니다.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욥의 아내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욥의 아내에 대한 평가는 가혹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마의 보조자’로 말했는가 하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욥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킨 요인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서 그 아내를 데려가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사탄의 도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평가함으로써,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까지 버림받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결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욥의 신실함을 강조합니다.
이슬람에서는 그리스도교와 비슷하게 부정적 평가를 공유하면서도 모호하게 완화되었습니다. 꾸란(38:44)에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아내를 매 100대로 벌주도록 했으나 욥이 병에서 나았을 때 이파리가 100개 달린 종려나무 가지로 한 대만 때리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반면 유대교의 전통(미드라쉬)에서는 전혀 다르게 평가됩니다. 욥 아내의 희생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끝까지 남편에 대해 사랑을 아끼지 않은 여인으로 평가됩니다.

어떤 평가가 정당할까요? 욥의 이야기를 더 자세하게 전하고 있는 칠십인역 성서가 그 해석의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욥의 병이 오래 계속되었다. 한번은 욥의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언제까지 참고만 계실 것입니까? 당신은 구원해 주실 것을 좀 더 기다려 보자 하지만, 여보, 이제 이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당신을 기억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해산의 고통도, 애써서 기른 수고도 다 헛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보, 당신은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속에서 몰락해가고 있습니다.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기 하 세월입니까? 그동안 나는 그 지긋지긋한 일거리를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떠돌아 다녔습니다. 애써 일거리를 얻어 놓고도, 너무나 괴롭고 억울해서, 잠시라도 쉬기 위해, 빨리 해지기만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여보, 하나님을 향해 무어라고 항의나 하고서, 죽어버리십시오.’”
이 이야기는 욥의 아내가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듣는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절절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라는 말은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바락’은 보통은 ‘축복’의 의미를 지니지만 특정한 문맥에서 ‘저주’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뭐라고 항의나 하고서 죽어버리십시오.” 칠십인역은 그 이중적 의미를 유념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당신이 겪는 고통을 차마 볼 수가 없으니, 차라리 죽음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것이 욥의 아내가 하고자 하는 말의 본뜻이었을 것입니다. 표면의 언어에만 집착하는 남성주의적 시선이 포착하지 못한 이면의 진실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욥의 아내의 역할은 이후 욥의 태도와 잘 부합니다. 한마디의 말로 욥의 아내는 남편을 일으켜 세웁니다. ‘부조리한 현실을 두고 찍소리 못하고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욥은 그렇게 말하는 아내를 두고 어리석은 여자처럼 말한다고 응수하지만, 친구들의 도발이 이어질 때 오히려 항변하는 자로서 외칩니다. 전통적인 인과응보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욥기의 정수는 그 욥의 아내의 말로부터 촉발된 것입니다.

친구들은 어땠을까요? 이른바 세상의 현자들로 알려진 친구들은 전통적 규범에 익숙합니다. 그들은 탄식하는 욥 앞에서 일주일 동안 침묵하며 지켜봅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 앞에서 백 마디의 말보다는 그저 함께 해주는 것이 좋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친구들의 태도는 아주 지혜로운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의 태도는 상례(喪禮)를 충실히 따른 것일 뿐입니다. 조문객은 상주가 입을 열어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예를 지킨 것 자체를 비난할 이유는 없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친구들의 태도를 보면 그것이 진정으로 고통에의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습니다. 친구들은 온갖 전통적 지혜들을 들이대며 어떻게든 욥을 주저앉히려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독한 말을 퍼부은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욥을 일으켜 세운 아내의 태도와 고통에의 공감을 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 자신들의 의를 내세울 궁리를 하고 있었을 친구들의 태도가 대조됩니다.

<욥의 아내>, 레바논계 이집트 출신 프랑스 여성작가 앙드레 쉐디드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독설처럼 보이는 욥의 아내의 한마디가 주는 영감에서 시작하여 욥과 그 아내의 진실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냅니다. 소설은, 욥과 친구들의 격론의 장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욥의 아내를 등장시켜 아름다운 노년 부부의 진실한 사랑을 그립니다.
욥의 아내는 욥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처녀 시절 욥의 사랑 고백을 받을 때나, 그의 노쇠한 모습을 바라볼 때나 그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욥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주고 따르지는 않습니다. 욥의 아내는 욥이 자식들을 데리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행위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제물들의 피 냄새와 살타는 냄새가 역겨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형식이 꼭 그래야만 하느냐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아이들에게 옳은 길을 제시하고 따르도록 인도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했지만, 욥의 아내는 아이들에게 갈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의 고정관념을 주입하기보다는 아이들의 속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은 엄격한 삶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욥의 아내는 하나님의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자유분방하게 즐길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도 자유분방했습니다. 그러기에 욥의 아내는 고통으로 무너져 가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의 눈물로 그 아내는 마음이 찢어지고, 그래서 욥이 항상 생각하는 엄격하고 가혹한 하나님에게 격분해 항변합니다. 그 아내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세요”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으세요”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욥은 예상했던 반응을 보입니다. “어리석은 여자처럼 말하다니!” 아내는 격분하는 남편의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놓입니다. 낙담하고 무너져 가는 남편을 그렇게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친구들이 고통을 겪는 욥을 찾아와 위로와 충고를 한답시고 장광설을 늘어놓을 때도 욥의 아내는 그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말에 분노합니다. ‘이 건강한 사람들이 욥이 견뎌냈던 육신의 고통에 대해 무얼 안단 말인가? ... 전달될 수 없는 육신의 고통에 대해 이 건강한 사람들이 무엇을 안단 말인가? ... 그를 동정하기는커녕 못살게 괴롭혀야 한단 말인가?’ 친구들의 강변에 궁지에 몰려 웅크리고 있는 남편에게 아내는 다가섭니다. “내가 있어요. 내가 살아 있어요.”를 외치며. 모든 사람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고 푸념하는 욥에게 외칩니다. “모든 사람이 아녜요. 나는 아녜요.”
욥의 아내는 사실 욥이 하나님을 달리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내는 사냥감을 두고 매복해 있는 냉혹하고 집요한 사냥꾼과 같은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욥과 친구들이 격론을 벌이지만, 아내가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친구들과 욥은 공모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인간들의 언어 안에 갇힌 하나님을 거부하였고 오히려 불가사의한 하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논리적으로 해명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난 속에서도 다정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느낍니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언설로 강변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욥의 편에 확고하게 섭니다.
욥의 아내는 남편을 궁지로 몰아넣는 친구들이 밉기도 했지만 그들이 떠나고 난 다음의 쓸쓸함을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떠난 그 자리에도 욥의 아내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변함없이 욥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떠난 그 자리에서 남편과 아내의 대화는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그 가운데서 욥은 내면의 소리를 듣습니다. 가슴 한복판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소리와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오직 사랑만이...” 그 소리를 듣고 욥은 불가사의한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떠난 친구들을 용서합니다. 그와 동시에 죽음에서 서서히 벗어납니다.
그러나 욥의 아내는 병이 들고 죽음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이 다해간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욥의 아내는 결코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며 순간순간 누리는 것들의 소중함을 오히려 더욱 깊이 실감합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과 저물어가는 저녁노을을 만끽합니다. 가장 작은 몸짓, 아주 작은 나뭇가지, 최소한의 말, 극히 적은 빛이 자기 몫의 행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의 존재감을 깊이 느끼며, 동시에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를 통해 욥은 비로소 고통에서 헤어 나옵니다. 이제 욥은 생을 마감하는 아내를 위해 춤을 추며 사랑의 기쁨을 누립니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노래에서 느껴지는 애잔함이 배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욥이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착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내리비치는 다사로운 햇빛, 손을 내밀면 따먹을 수 있는 포도 한 송이, 그리고 작은 나뭇가지 하나, 그 모든 것들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 그리고 정말 바로 그 존재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준 변함없는 아내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은 그렇게 욥의 아내를 복권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욥기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다시 읽게 해 줍니다. 표면의 언어에 집착하고 그것을 전부로 아는 남성주의적 시선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욥기 어디를 보아도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욥을 저버렸다는 이야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마디의 말로 평가를 내려버린 것은 남성주의적 시선으로 무장한 역사적 그리스도교의 과오였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시선으로 복권된 욥의 아내는 고통 가운데서도 퇴색할 수 없는, 아니 더욱 빛나는 사랑의 화신으로 등장합니다. 욥의 아내는 명징하고 정연한 논리의 세계로 포착되지 않는 세계를 대변합니다. 욥과 친구들의 명징한 논쟁은 사태해결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욥을 고통에서 헤어 나오게 하지도 못했고, 또 명쾌하게 해명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더욱 숨 막힌 상황을 만들 뿐이었습니다. 항변하던 욥이 하나님을 승인하게 되는 비약도 명쾌하게 해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비약의 여백을 전혀 다른 언어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그 언어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젊은이들의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기대하는 것, 진정으로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삶의 진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체득하고 그것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공동체 안에서 그 놀라운 삶의 진실을 체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