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공멸의 사태를 막아내는 삶의 진실 - 마가복음 12:1~12[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3-05 17:06
조회
1409
2023년 3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공멸의 사태를 막아내는 삶의 진실
본문: 마가복음 12:1~12



포도원 주인과 소작인의 비유는 우리에게 무척 익숙하지만, 동시에 많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이 비유는 그 내용에서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공관복음서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마태 21:33~46, 누가 20:9~19). 이 비유를 접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대체로 공관복음서에 해석까지 덧붙여져 있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집약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이 나라를 지도자들에게 맡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거듭거듭 보냈으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언자들을 배척하고 박해했으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이 하나님의 아들마저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일으키시어 새 이스라엘의 머리로 삼으실 것이며, 이러한 악행을 저지른 지도자들을 진멸하고 이스라엘의 지도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실 것이다.’
공관복음서의 기록을 따르면,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해석이어야 할까요?

본래 비유란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초점을 간결하게 전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그런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성서본문은 상당부분 비유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기보다는 이미 영적인 해석이 가해진 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알레고리화’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상황에서 초기교회의 상황으로 바뀌는 가운데, 초기교회의 믿음에 따른 해석이 가해진 것입니다. 초기교회의 상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사건 이후 교회의 선교적 상황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리스도론이 정립되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비유의 뜻은 바로 그런 상황에 부합합니다. 본문말씀은 그렇게 알레고리화되어 그리스도론을 정당화해주는 것으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전제가 분명하기에 이해하는 데 전혀 무리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그리스도론적 전제 없이 볼 때 이 비유가 그렇게 술술 이해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성서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전 지식이 풍부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비유를 읽어보라고 하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지 않을까요? 이 점에서 오늘 본문말씀은 해석하기 참 어려운 본문입니다.
현재 복음서에 전해진 상태로는 사실상 알레고리화되어 있기에 그 암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는 쉽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알레고리화된 비유는 각각의 암호가 배열된 순을 따라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상상력과 해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포도원은 이스라엘로(이사 5:1~2), 주인은 하나님으로, 소작인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종들은 예언자로,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코드를 일일이 짜 맞춰야 해석이 됩니다.
이 해석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해석은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더욱 생생한 의미를 발견할 수는 없을까요? 알레고리화된 것을 벗겨내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비유를 보다 생생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래 예수님의 자리로 돌아가 상상해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선포된 자리는 적대자들을 두고 일종의 경고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암호를 해독할 리 없습니다. 성서 기자는 그 적대자들이 비유의 뜻을 알아차렸다고 전하지만(마가 12:12), 그것은 기록자의 상황을 원래 비유의 상황으로 대치해 말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을 쉽게 일깨우려는 데 있었습니다. 이 점을 유념할 것 같으며, 당신의 적대자들도 알아들을 만한 비유로 선포하였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야 경고로서 효과를 지닙니다. 그 점에서 원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의 요체가 무엇이었을까요?

다행스럽게도 이 이야기는 도마복음서(도마 65)에도 나옵니다. 이는 본래 비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이 있어 이를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었습니다. 농부들은 거기서 일하고 그 사람은 그들로부터 소작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농부들에게 하인을 보내 포도원에서 나온 이득을 받아오도록 했습니다. 농부들은 그 하인을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인은 돌아가 주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아마도 하인이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리라.’ 주인은 다른 하인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그 하인도 때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의 아들을 보내며 말했습니다. ‘그들이 내 아들에게는 잘 대해 줄 것이다.’ 농부들이 그가 포도원을 상속받을 상속자임을 알고 그를 잡아 죽였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시기 바랍니다.”
군더더기 없이 훨씬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비유에 다른 복잡한 장치들이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훨씬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됩니다. 여기에는 죽은 아들의 운명을 겨냥한 어떤 부연설명도 없습니다. 그냥 포도원이라도 좋고 다른 밭이라도 좋은 일터에서 주인과 소작인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을 전하고,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경고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맞은 종들과 죽은 아들은 소작인들의 악행을 강조하는 점층법 수사로 활용될 뿐 초점은 어디까지나 주인의 행위와 이에 대한 소작인의 대응에 있습니다.
이른바 영적 해석이 가해지기 전 비유의 본래 의미를 파악하기에 매우 적절한 사례입니다. 공관복음서의 병행구들은 이 이야기를 하나님이 보낸 아들, 곧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 이야기로 해석한 바람에 폭력적인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성되고 정당화되었습니다.

일체의 알레고리화 흔적이 없이 보존된 도마복음의 이야기는 실제 예수가 살았던 삶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갈릴리 현장에서 활동하였고, 갈릴리는 부재지주들의 천국이었습니다. 농민들의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소작쟁의에 해당하는 이런 사태는 갈릴리에서 자주 있었던 일입니다. 비유라는 이야기 형식이 꼭 실제 사실 자체를 설명하는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실제 상황과 관련된 비유를 말할 때 화자가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하였을지는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며, 상실과 공멸의 사태가 발생하는 상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포도원에서의 소출을 극대화하여 착취하려는 지주의 탐욕과 자기이익에 몰입한 농민들의 무모한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불행한 공멸의 상황에 빗대어 부에 대한 집착과 탐욕이 모두에게 쓰라린 상실을 가져 온다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을 질타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마복음의 이 대목 원문이 훼손되어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포도원의 소유한 주인이 ‘크레스테스’(chre[ste]s) 곧 ‘고리대금업자’ 또는 ‘채권자’라면 부재지주의 무모한 탐욕을 더욱 유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소작인들의 무모함도 문제이지만, 지주의 탐욕이 작인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더 문제라는 것입니다.
도마복음서의 문맥을 보면, 바로 앞에는 열심히 일해 소출을 많이 거두고 흡족해 했던 농부가 밤중에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나오며(63절), 이어서 한 사람이 사업가와 상인들을 잔치자리에 초대했지만 자기 일로 바빠 잔치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거렁뱅이들이 참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64절). 도마복음서의 간결한 기록을 보면 그들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파멸에 이르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삶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주어진 질서 안에 있는 일상에 매몰되어 있는 것 자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일깨우는 데 근본목적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다른 복음서에 공통되는 격언이 도마복음서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이게 된 돌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도마 66)
이 말씀은 우리가 아는 대로, 세상에서 버림받았지만 오히려 진리의 길에서 선택받은 도반들을 격려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로써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세상의 상식에 비춰볼 때 버린 돌과 같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 또한 흥미롭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도마 67)
이 말씀은 깨우침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깨달음을 일깨우는 모든 가르침에서 공통되는 핵심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고, 노자는 “자기를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自知者明)”고 했으며, 공자는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배웠고,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하여 배운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고 했습니다. 자기를 자기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진정한 지혜를 갖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주제를 모르고 날뛰며 세상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도마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빛을 깨달을 수 있도록 언제나 촉구합니다. 결국 그와 같은 문맥을 염두에 둘 때 세상의 여러 번잡한 일 때문에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비유의 원형은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이 전하는 바와 같이, 초기교회의 해석은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는 사람들이 바로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로서 장로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비유는 꼭 그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런 상태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더욱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그저 교리적 명제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무리 또는 불의한 무리에 속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으로 위로를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의 자세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는 가운데 주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단지 어떤 의례를 반복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이 예배 중 우리가 함께 깨달은 말씀을 통하여,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나를 나 되게 하는 것,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삶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결단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길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그 길에서 정진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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