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01] 바울서신 읽기를 시작하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3-09-04 22:32
조회
1248
천안살림교회 2013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3년 9월 4일 / 최형묵 목사


제1강 바울서신 읽기를 시작하며


1. 사도 바울의 서신

<친서> 데살로니가 전서 / 갈라디아서 / 빌립보서 / 빌레몬서 / 고린도전서 / 고린도후서 / 로마서   *급진적

<위서: 후기바울서신> 에베소서 / 골로새서 / 데살로니가후서 *보수적

<위서: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 디모데후서 / 디도서 *반동적


2. 바울의 생애

다마스커스 사건(36년 경?) - 아라비아 - 다마스커스 - 예루살렘 - 시리아ㆍ길리기아 - 예루살렘 - 이방인선교사로 본격활동 - 예루살렘 - 로마(62년경 순교?)


3. 바울 서신, 어떻게 읽을까?

1) 친서를 통해 본 바울

2) 누가의 사도행전에 기록된 내용과의 관계

3) 바울 사상의 성격 1: 구체성과 보편성의 문제

4) 바울 사상의 성격 2: 인의론(認義論)과 종말론



* 참고자료: <공동선> 원고(2008년 봄)

십자가 신학의 정치학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1.

바울의 신학은 그 전반에 걸쳐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천년을 이어 온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사실상 바울의 신학에 기초해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그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그 논란의 초점은, 예수운동의 계승 여부에 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예수운동은 당시 로마제국의 지배질서와는 전혀 다른 대안적 질서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가는 운동을 말한다. 그 운동은 현실의 질서와 그 질서를 만들어내고 지켜나가는 권력 자체를 원천적으로 거부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과연 바울의 신학은 권력에 대한 비타협으로 혁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던 예수운동을 계승한 것일까? 아니면 예수운동의 혁명성을 무장해제시켜 권력과의 타협의 길을 열어놓은 것일까? 바울의 신학이 예수운동을 계승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제국의 질서와는 상반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반면에 예수운동을 왜곡시켰다면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적 기독교 곧 제국과 동일시되는 기독교의 길을 열어놓은 셈이 된다. 과연 어느 편일까?  


2.

바울의 신학, 특히 현세적 권력과의 관계에 관한 바울 신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로마서 13장의 내용이다. 여기서 바울은 현실의 권력에 복종할 것을 역설한다. 역사적으로 그 본문은 국가권력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시금석처럼 간주되어 왔다. 그래서 국가와 교회의 타협의 근거로, 그리고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의 복종 근거로 인용되어 왔다. 그것이 정당한 해석이라면 바울은 적어도 그 주장에서 당시 로마제국의 권력을 용인하고 그에 대한 복종을 역설한 셈이 된다.

그러나 그 본문은 세계 자체를 죄의 노예가 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바울 신학 전반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종말론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로마서 13장 그 자체의 문맥에 한정해 보더라도 생뚱맞다(로마 13:11 참조). 바울은 어째서 그 생뚱맞은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매우 개연성 있는 이해방식 가운데 하나는, 이 본문이 국가권력 일반론을 전개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권고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개념들은 국가권력, 곧 당시로서는 로마제국 자체를 유념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권세’ ‘치안관’ ‘통치자’ 등은 제국의 권력기관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의 당국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지방 당국을 지칭한 것은 거대 구조로서 제국의 권력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공권력을 유념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의 권력과 무관할 수 없는 지방 권력이기에, 결국 권세에 복종하라는 뜻 자체에는 큰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 특수한 상황이 무엇이었는지 더 깊이 헤아려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유대인 공동체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 로마에서 유대인은 종종 당국과 시민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거센 반로마항쟁은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직접 반로마 항쟁에 개입되어 있지 않더라도 ‘불령선인’으로서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로마 시내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당한 적도 있다. 한편 유대인들은 종종 로마제국 내의 다른 시민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로마당국이 유대인의 특수한 종교적 관습을 용인하여 ‘성전세’ 등을 인정하는 조치는, 다른 주민들에게는 일종의 특혜로 보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일반 로마시민들에게도 곱게 비치지 않았고 종종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방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은 쉽사리 공격을 당하는 처지에 있었다. 바울이 유대인을 공격하면서도 동시에 이방인에게 교만하지 말라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로마 11장), 이 골치 아픈 주장의 진의는 공공의 질서를 준수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인 유대인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었던 셈이다. 로마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다수가 유대인이지만, 또 상당수는 이방인이었던 만큼 그 이방인들은 일반적인 이방인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의 이 주장은 그들이 공공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경우를 염려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골치 아픈 본문은 결코 제국의 질서에 맹목적으로 봉사하라는 주장이 아니라 제국의 질서 안에서 가장 약한 세력을 보호하고자 하는 판단에서 나온 특별한 권고인 것이다. 여기에 일반적으로 권고될 수 있는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면, 그것은 일상의 공공성을 지킴으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모든 권세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현실의 모든 권세를 정당화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현실의 권세가 정당성을 갖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셈이다.

이 난제를 해결하고 나면, 바울의 신학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비교적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3.

바울이 ‘율법’을 비판하고 ‘믿음’을 그 대안으로 제시했을 때, 그 비판의 초점은 자기 의(自己 義)였다. 율법이 자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오용되고 만 현실이다. 율법에 대한 맹신은 곧 자기 의에 대한 맹신이다. 바울은 율법을 문제시하면서 유대인의 선민의식만이 아니라 모든 배타적 선민의식을 문제시한다. 바울은 율법의 준수를 선민의 표징이자 동시에 구원의 방도로 아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까지도 함께 비판한다(고전 1:18이하; 로마 1:16-17; 3:9이하 등 참조).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에게 공통되는 것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독점했다는 배타적 의식이다. 그와 같은 자기 의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배타적 의식은 유대인과 그리스인에게만 한정된 것만도 아니었다. 그 배타적 의식을 문제시한 바울은 세계 자체를 죄의 노예가 된 것으로 인식한다(로마 6장, 그리고 루이제 쇼트로프, “죄와 해방: 로마서를 중심으로”, 김재성 엮음, 『바울 새로 보기』, 한국신학연구소 참조). 바울이 인식한 세계, 그것은 곧 로마제국이었다. 바울이 노린 것은 로마제국 자체가 자기 의에 가득 찬 세계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선민’, 지혜를 추구하는 ‘문명인’, 제국의 질서를 떠받치는 ‘시민’은 바울에게서 한 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알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경험 세계를 절대시하고 신성시하는 오만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것은 모두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완결된 세계로 봄으로써 더 이상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닫힌 세계이다. 그 닫힌 세계를 바울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 닫힌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제시한다.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가능성, 곧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성의 표상이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답이면서 동시에 답이 아니기도 하다. 닫힌 세계를 표상하는 율법을 대신해 열린 세계를 표상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답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취해야 할 그 무엇을 명확하게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 그 점에서 답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을 따른다면서 사실은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역시 그와 같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에 쥐어지는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율법조문처럼 명문화할 수 어떤 모범을 제시하지 않는다.

바울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놀랍게도 예수의 삶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다(로마 5:6-11 등 참조). 그것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다.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강조함으로써 바울의 신학은 예수운동을 결정적으로 왜곡시키고 말았다고 비판이 흔히 제기된다. 하지만 로마제국 안에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강조한 것은 오히려 급진적인 성격을 띤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신관의 혁명, 종교의 혁명, 신앙의 혁명을 의미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신은 모든 것을 가진 존재였다. 또한 그 신의 대리인 또는 신의 아들 역시 모든 것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제왕들은 저마다 신의 대리인으로 또는 신의 아들로 자처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든 재력과 권력을 한꺼번에 거머쥔, 그 위엄 있는 제왕들을 실제 신으로 섬겼다. 더욱이 제국 로마는 그러한 상식적 세계관의 총 본산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그렇게 알고 있는데, 바울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가 신이라는 인식에서 모든 것을 비워버린 존재가 신이라는 인식의 혁명이다. 신의 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져서는 안 된다. 어떤 구체적인 형상으로 채워져서도 안 되고, 재물이나 권력으로 채워져서도 안 된다. 인간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도 안 된다.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버리고, 살아 있는 동안 자기를 지탱시켜준 몸마저도 버린 그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은 바로 이와 같은 혁명적 전환을 의미한다.

그 비워버림의 극치, 절정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비워버린 그 예수에게서 모든 것을 비워버린 하느님을 본다. 바울의 그와 같은 인식은 매우 급진적이며 동시에 매우 정치적이다. 로마제국 안에서 십자가는 제국의 질서에 반하는 대극점이다. 십자가는 로마제국 안에서 ‘악의 축’이다. 수치스러운 것일 뿐 아니라, 로마제국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도발적인 것이다. 흔히 로마제국 안에서 십자가형은 제국의 질서에 도전하는 정치범에게 적용된 사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같은 정치범이라도 로마의 시민에게는 십자가형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형은 로마의 시민이 아닌 노예와 같은 범주의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사형제도다. 제국의 시민 경계 밖에 있는 이들에게나 적용되는 사형제도인 것이다(닐 엘리엇, “십자가의 반제국적 메시지”, 김재성 엮음, 앞의 책 참조). 놀랍지 않은가? 원자폭탄은 베를린이 아닌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그들만의 세계에서는 ‘악의 축’에 해당하는 국가에 행해지는 어떠한 보복도 정당화된다. 탈레반 포로에게는 제네바 협정마저도 적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제국의 논리, 자기 의의 논리를 확인한다.

그러므로 제국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십’자도 언급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한 젊은이가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제국의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진정한 확신을 본다. 사실상 자신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을 정당화해 줄 뿐인 욕망을 붙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믿음과 상식을 죄의 종노릇하는 것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바울의 확신이다. 바울이 진정으로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을 비워버린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그가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를 역설한 진정한 속뜻이다. 십자가의 신학은 근본적으로 제국의 권력을 거부하는 정치학이었다.  


4.

비어 있다는 것은 무력하거나 아무 쓸모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릇은 비어 있기에 그릇으로 용도를 다한다. 집은 빈 공간이 있고 비어 있는 창문이 있기에 집으로 소용된다. 바퀴가 바퀴로 소용되는 것은 바퀴의 중심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노자,『도덕경』11장 참조).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한 요한의 해석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바울 역시 그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의 신학자 칼 바르트마저도 기어코 노자의 빈 수레바퀴만큼 적절한 비유가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칼 바르트, 『로마서강해』7장 참조). 인간의 역사가 그저 순진하게 발전만 하리라고 보았던 유럽인들의 낙관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히틀러를 그리스도의 화신으로 떠받든 독일교회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대항한 칼 바르트가 아니었던가!

그 비어있는 자리에 드러나시는 하느님, 곧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 믿음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뛰어넘으며, 동시에 역시 자신들의 힘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로마제국의 허위의식을 뛰어넘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 전인미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텅 빈 근원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어 있기에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다면, 하느님을 추구하고 그 하느님의 역사적 현존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당연히 그 어떤 것에도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무한히 새로운 가능성을 좇는 것을 뜻한다. 그 어느 것도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면, 우리가 마치 진리를 독점한 듯이 행세할 수는 할 수는 없다. 그저 무한히 열린 가능성으로서의 진리를 우리는 추구할 따름이다. 무한히 열린 가능성으로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는 언제나 새로운 주체로의 거듭남을 추구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빌립 3:8)라는 바울의 고백은 새로운 주체로의 갈망을 함축한다.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 또는 제국의 ‘시민’으로서 정체성을 부여했던 조건들을 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한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바울의 십자가 신학은 로마제국 안에서 예수운동을 급진화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전체 2
  • 2013-06-28 12:23
    불청객을 기꺼이 한 자리에 앉게 해주신 목사님과 교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열린 성경공부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모쪼록 2개월 방학동안 주제와 참고서적 등을 예고해주셔서 능동적인 토론의 시간을 준비할 수 있도록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rn다시한번 감사드리고 무더운 여름이 모든 분들께 좋은 휴식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2013-06-28 13:45
    '불청객'(?)이 매번 들고 오신 음료수가 매 시간 기다려질 것 같습니다.
    rn언제나 환영합니다.
    rn다음 번에도 계속 만날 수 있기를 바라고, 준비되는 대로 공지해드리겠습니다.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