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서 11] 깨친 이의 몫(30~33절)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2-09-12 21:58
조회
1565
천안살림교회 2012년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서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2년 9월 12일 / 최형묵 목사


제11강 깨친 이의 몫(30~33절)



3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 명의 신이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신입니다. 둘이나 한 명이 있는 곳에는 나도 거기 있습니다.”  

31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의사가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은 고치지 못합니다.”

32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산 위에 세워지고 요새처럼 된 도성은 쓰러지거나 숨겨지지 않습니다.”

33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귀로, 또한 다른 귀로 듣게 될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십시오[너의 귀로 네가 듣는 것을, 너희 집 지붕 위에서 타인의 귀로 전파하라]. 누구도 등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나 숨겨진 구석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등경 위에 두어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빛을 보게 할 것입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에 실린 본문[김용옥, <도마복음 역주 3> 참조]  



30. (* 유사병행구: 마태 18:20)

* 셋, 둘 또는 하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 이 구절을 삼위일체론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입장도 있으나, 훨씬 후대에 성립한 ‘론’을 대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 이것이 과연 완전한 문장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유사병행구인 마태의 구절과 비교하여 보면 ‘셋’이든 ‘둘’이든 ‘하나’이든 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음. 그러니까 ‘셋이나 둘뿐이랴, 하나라도 함께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음. 그러나 그리스어 대본에 나오는 구절과 비교하여 보면 ‘셋’과 ‘하나’ 사이에는 질적인 단절이 있는 것으로 보임. 그리스어 대본의 해당본문: 예수께서 가라사대, “세 명이 있는 곳에선, 그들은 신과 함께 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 있는 곳에선, 나는 말하노라, 내가 그 한 사람과 같이 하리라.”[김용옥, <도마복음 역주 3> 참조]. 김용옥은 이를 집단과 개인의 차이로 보고, 깨달음은 전적으로 개인의 차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 물론 예수운동이 집단을 거부했다는 뜻은 아니고, 일차적으로 깨달음이란 ‘나’라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역설하는 본문으로 보는 것임. 집단최면적인 임재가 아니라 개개인의 각성을 강조하는 의미라는 것. 깨달은 이의 고독한 실존을 강조하는 도마복음서의 맥락에서 볼 때, 김용옥의 해석은 매우 일리가 있으나,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본문의 원형에 대한 탐구가 더 이뤄져야 가능할 것으로 보임.  


31. (* 유사병행구: 마태 13:57; 마가 6:4; 누가 4:23~24; 요한 4:43~45)

*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 네 복음서에 모두 유사 병행구가 등장하고 있어 매우 익숙한 구절로,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지 않음. 물론 네 복음서 가운데서도 그 강조점의 차이는 있음. 공관복음서가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사태를 강조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고향에서도 존경을 받은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름. 도마복음서의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와 그 뜻을 같이하고 있음. 뛰어난 사람이 고향에서 존경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사태는 경험적으로 볼 때 모두 가능한 상황. 그런데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경우 그 맥락은 기존의 인습에 비춰볼 때 철저히 다른 면모를 지니게 되는 경우라 할 수 있음. 깨달음은 기존의 인습적 사고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음. 요새 영화 감독 김기덕은 어떤 경우일까? 좀 착잡한 느낌이 드는 경우. 인습을 벗어났기에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밖에서 주목을 하니까 환영을 받는 경우. 무조건 일등만 선망하고 기억하는 사회의 풍토를 재확인할 수 있는 사태라 착잡할 수밖에.


32. (* 유사병행구: 마태 5:14~15)

* 산 위에서 세워진 도성: 도마복음의 전체적인 맥락을 감안할 때 그 의미가 매우 선명한 구절. 이것은 깨달음 또는 깨달은 이의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음. 산 위에 우뚝 서 있는 요새와 같아서 무너질 수 없고 숨겨질 수 없다는 것은 그 깨달음의 중요한 성격을 말함.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은 어떠한 공격에도 견뎌낼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숨겨질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의 당당함 내지는 만천하에 드러나는 보편성을 말하는 것. 여기서 도마복음에서 계속되는 비밀스러운 말씀의 의미를 다시 헤아려보아야 할 필요가 있음. 그 비밀스러움은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사람들이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 예수는 그 사태를 보고 마음아파함. 명명백백하고 확고부동한 진실을 어째서 사람들은 알지 못할까?


33.

* 깨친 이의 몫: 앞의 구절과 그 의미상 곧바로 이어지며 보충하는 구절. 그런데 여기서 본문은 오강남의 번역보다 김용옥의 번역을 주목할 필요가 있음. ‘네 귀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타인의 귀로 전파하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움. 지붕 위에서 전파한다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가옥구조를 감안하여 이해해야 할 표현. 어쨌든 이 구절은 깨달음의 내밀한 차원과 개방적인 차원을 동시에 말하고 있음. 깨달음은 내밀하게 이뤄지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 깨달음의 빛은 저절로 사방으로 펼쳐지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 존재 그 자체로 빛을 발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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