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무고한 희생의 종식 - 창세기 22:1~13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13 16:00
조회
5266
2017년 4월 2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무고한 희생의 종식
본문: 창세기 22:1~13



오늘 우리는 창세기 가운데 아주 잘 알려진 본문말씀을 읽었습니다. 아마도 한국교회 안에서 널리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교회에서도, 성서일과를 따랐을 뿐인데도 몇 차례 함께 나눈 말씀이기도 합니다. 널리 알려진 말씀이니 만큼 말씀을 대하는 순간 그 의미를 곧바로 연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순종과 그 아들 이삭의 희생에 관한 이야기로 기억하지 않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반문을 제기합니다. 과연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본문말씀의 뜻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비단 오늘 본문말씀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성서 본문말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부지불식간에 과거의 전이해에 지배당하는 경우를 봐 와서, 오늘 재삼 본문말씀의 의미를 음미하고자 합니다. 본문말씀을 따라가며 다시 환기해보겠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거기서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아이가 없어 그렇게 애를 태우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까스로 얻은 아들인데, 이제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니 정말 얼토당토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런 군소리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착착 준비를 합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킵니다. 번제에 쓸 장작도 쪼개어 싣고 길을 떠납니다.
길 떠난 지 사흘만에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 이릅니다. 성서 역대기하(3:1) 딱 한 구절이 그 산 위에 성전을 세웠다고 증언하고 있어서 전통적으로 모리아산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 산 위에는 이슬람의 알 아크사 사원이 있고,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것으로 여겨진 바로 그 자리에는 장엄한 황금 돔이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무슬림, 곧 이슬람교도들은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바치려 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또한 훗날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산에서 승천했다 내려왔다는 전승이 있는데 바로 그곳이라 여겨지고 있는 까닭에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중요한 성지가 되어 있습니다. ‘알 아크사’라는 말 자체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뜻입니다.
어쨌든 브엘세바에서 그곳에 이르기까지는 나귀 타고 한 사흘 걸리는 거리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산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종들에게 기다리라 말하고 아들과 함께 산에 오릅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아무 말이 없던 이삭이 말문을 엽니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담담하게 말합니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나 달리 준비되어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습니다. 정말 묘하게도 이삭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은 채 제물로 올려집니다. 그렇게 제물로 올려진 아들을 향해 아브라함이 칼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외쳤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예, 여기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알았다.” 아들을 내리치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수풀에 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다가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그곳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으로 ‘여호와이레’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이미 물음을 던졌습니다만,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습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 이야기는 완전한 믿음의 소유자 아브라함이 그 믿음을 입증 받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식마저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완전한 믿음, 철저한 순종의 표본으로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더불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반항하지 않고 순종한 이삭의 믿음을 전하는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다시 말해 너무나 당연한 순종과 헌신에 관한 이야기로만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기억할 때마다 바로 그 태도가 따라야 할 믿음의 실체요 정도인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중대한 두 가지 진실을 간과합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두 가지의 중대한 진실입니다. 하나는 이 이야기 주인공들이 처한 딱한 처지요, 또 다른 하나는 그 처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이야기에 관한 기존의 통념을 벗어버리고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입니까?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자식을 바치라니요! 영문도 모르는데 자신의 목숨을 바치라니요! 성서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의 심경을 전혀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는 묘사되지 않은 그들의 심경을 충분히 예측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바쳐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요?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아들은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정말 그렇게 잔인한 하나님을 믿어야 할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그 앞에서 전율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이야기는 우리의 두려운 의문을 해소해줍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그 무모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중단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종교사적 전환이요, 문명사적 전환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성서의 종교가 다른 모든 고대의 종교들과 구별되는 분기점을 보여주는 중대 사건입니다. 인신제사, 곧 인간을 희생제물로 삼는 제의가 여기에서 중단되고 있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바를 따르면, 이 인신제사의 전통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후대 왕조시대(므나쎄 왕)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열왕기하 23:10). 힌놈의 골짜기에서 몰록에게 사람을 바쳤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사람을 제물로 받는 ‘몰록’과 왕을 뜻하는 ‘멜렉’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까 성서의 관념에서는 인간 희생제물을 필요로 하는 몰록과 역시 인간 희생자들을 필요로 하는 권력이 같은 속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성서는 이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그 희생제물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외치는 하나님은 무고한 희생제물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대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진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순전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로만 기억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째서 멀쩡한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아브라함의 양심적 거리낌이나, 까닭 없이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기에 처한 이삭의 처지를 안중에 두지 않는 해석만이 통용되고 있을까요? 어째서 그 무모한 일을 중단시킨 하나님은 강조하지 않고 시험하는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해석이 마치 정설인 듯이 통용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의식과 생활양식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할 때 누군가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어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갈등을 무마하는 방법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인간사회의 고질병입니다. 그것은 아주 노골적인 방식에서 아주 은폐되고 세련된 방식에 이르기까지 겉으로 드러난 양식은 다르지만,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변함없습니다. 노골적인 방식은 누군가 무고한 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어 처벌을 하거나 추방을 하는 방식입니다. 은폐되고 세련된 방식은 어느 한편에게 유리한 반면 어느 한편에게는 명백히 불리한 사회적 관계를 당연하게 여기며 그 관계를 고수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흔히 경험하는 사회적 현실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그와 같이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 그리고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은 흔히 신의 뜻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신의 뜻으로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의 폭력성이 은폐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세계 안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대목, 곧 그가 도대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태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신의 뜻이라 하여 순종하는 태도는 사실 그러한 고대적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일대전환이 일어납니다. 그야말로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 대신에 양으로 대체되어 여전히 고대적 믿음의 흔적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건은 폭군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희생자의 처지를 헤아리는 자애로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되는 일대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더 큰 하나님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예상했던 경로로만 다가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다가옵니다. 마땅히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그 희생을 저지시키는 방법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말씀을 대할 때 새삼스럽게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그 점을 눈 여겨 보지 않습니다. 아들을 바쳐야 하는 끔찍한 일은 면했지만 여전히 희생양이 허용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지 모릅니다. 실제로 희생양 제의는 고대사회에 도처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제물로 바치는 형식으로, 또는 유대인들처럼 죄를 뒤집어씌어 먼 곳으로 내보내는 방식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 안의 죄가 정화된다고 믿었습니다. 일종의 주술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무고한 희생제물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볼 때, 하나의 제의로서 지속된 ‘희생양’ 제의의 의미는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털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죄의식 또는 허물을 환기시키는 것 정도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면 무방합니다. 그러니까 떨치지 못한 인간의 허물을 환기하고 진정으로 새로워지고자 하는 결단의 의식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일 뿐입니다. 그 제의 자체로 인간 사회가 의롭게 된다고 믿는 것을 거부한 견해는 이미 구약성서에 등장합니다. 끊임없는 예언자들의 외침이 ‘제사보다는 정의’였다는 것은 그 사실을 말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주술적 믿음은 오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대속론’에 대한 믿음이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죄가 없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인간에게는 더 이상의 어떤 노력도 불필요하고 그저 천진난만하게 그 믿음만 지키면 된다는 것을 뜻할까요?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누군가에게 죄를 전가시킴으로써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허위의식을 일깨웁니다.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두고 사람들이 흥분하여 돌을 내치려고 할 때 예수께서는 외칩니다. “너희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희생양을 찾고자 하는 욕구가 솟구치는 순간 예수께서는 그 폭력의 충동을 저지합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께서는 끝내 그 충동에 희생제물이 되고 맙니다. 무고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합니다. 이 때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굳이 ‘대속론’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그 희생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대속론’의 의미는, 누군가 무고한 사람을 희생함으로써 스스로 깨끗해질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의 세계가 그 십자가 사건으로써 끝이 났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것이,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압니다.”(로마서 6:6)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당신을 십자가에 달아놓고 우리는 이제 안락하게 삽니다.’ 하고 안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놓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 끝나야 한다는 염원을 확인하는 것이며 그런 삶의 방식을 끝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의미를 받아들일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주술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삶으로서의 믿음이 됩니다.

어째서 일각의 사람들이 ‘세월호’가 정치적 사건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까요? 그 희생에도 아랑곳없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소위 ‘정상적인’ 정치가 이뤄지고 일상적인 삶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 사건은 그 사람들이 믿는 정상적인 정치와 일상적 삶이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환기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참혹 사건을 환기하는 것은 그 참혹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은, 그 무모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세계 가운데 살고자 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 희생을 저지하고 나선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오늘 본문말씀의 의미를 새기며, 더불어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의미를 다시 깨닫고, 새로운 삶의 태도를 가다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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