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폭력 - 요한복음 18:33~38[이정희 목사]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7-05-13 16:03
조회
5037

2017년 4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폭력
본문: 요한복음 18:33~38
이정희 목사



참으로 질긴, 비열한 지배 권력의 야망과, 그 야망에 부역하고 있는 어이없고 누추한/비루한 추종자들의 행태를 보면서, 무너진 쓰레기더미, 넝마 같은 오늘의 하루살이 삶 속에서, 이어지는 심문과 재판의 편린들을 보면서, 그래도 장미꽃이 피는 내일에는 어쩌면 어제보다는 조금은 인간다운 삶의 기운이 오늘 피어오르는 벚꽃처럼 피어오르기를 조각구름 같은 희망에 걸면서, 그 희망을 2천년 전에 벌어진, 고대 지중해 세계의 정치-종교적, 문화적 지층을 뒤엎었다고 할 수 있는 세기적 사건으로서의 <세기적 재판>과 맞세워본다. 이 세기적 재판과 더불어 역사적 화재경보의 종을 난타한, 나치 파시즘에 저항하다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사람의 역사적 통찰을 훑어본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어떤 위험의 순간에 번득이는 어떤 기억을 제 것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는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도 오는 것이다.”(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테제6)
“진리가 무엇이오?”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없다. 예수가 침묵했는지, 작가 요한의 문학적 수사법인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침묵이다. 빌라도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침묵은 다시 한 번 이어진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요한 19:9) 오늘 빌라도가, 세기적 재판의 기억을 제 것으로 삼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소?” “진리가 무엇이오?”
요한복음의 재판 본문은 다른 복음서들에는 서술되고 있지 않은 심문 내용이다. 작가 요한은 예수의 삶 전체를(가르침과 행위를, 죽음과 부활을, 메시아 사건을) 성찰하면서 예수에 대한 전기이기보다는 역사신학적 평전을 쓰고 있는 작가다. 그러므로 이 심문은 역사적 사실[팩트]가 아니라 신학적 픽션이다. 작가 요한이 요한복음이라는 역사신학적 예수평전을 썼듯이, 마틴 스콜세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을 각색하여 영화를 만든다. 이 영화에서는 전혀 다른 심문이 전개된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람들의 삶의 방법을 바꾸기를 원하는 것이 한 가지인데, 당신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바꾸기를 원했다”고 질타하자 예수는 “내가 말한 모든 것은 그 변화가 사랑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라고 응답하고, 빌라도는 살인이든 사랑이든 그것은 세상의 방식에 대립하는 것이라고,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리고 예수를 처형한다.
오늘은 작가 요한과 스콜세지에 의해 빌라도가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두 가지 물음, “진리가 무엇이오?”라는 물음과 “사랑은 위험한가, 왜?”라는 물음에 대해 파고들어 보려고 한다. 요한의 예수-진리에 대한 생각을 본문 그대로 간추리면 그 요체를 어느정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말하고 있는 진리를 종합한다면, 결국 내가, 예수가 진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삶 전체가 구체화된 진리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 예수를 믿는다기보다는 예수의 메시아됨을, 예수의 삶이 구성하고 있는 구원사건으로서의 메시아-사건을 믿는다, 그 메시아-사건이 다름 아니라 진리-사건임을 믿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 구원-사건은 자유롭게 되는 것, 그리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거룩해지는 것은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지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사건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라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적 분석과 탐구 그리고 성찰을 통해 그 본질이 어떤 것으로든 파악되었다고 한다면, 나아가 그 진리가 기존의 지식의 문제를 드러내고 지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진리의 새로운 모습과 마주하여 사람들이 보이게 되는 행태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진리의 본질[그 구조와 조건]을 인식할 수 있지만, 그 진리가 드러날 때 그 진리와 마주하여 보여주는, 관계 맺는 사람들의 행태에 의해서 그 진리의 힘을--진리의 진리됨을--이해할 수 있기도 하는 것 아닐까? 회피, 무시하거나 비웃거나 왜곡하거나 으르렁대기 아니면 폭력을 가하기. 그런데 진리를 말했다는 예수에게 가해지는 이 폭력에 비추어본다면 도대체 그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빌라도가 예수에게 던진 진리-물음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관심이었을까, 아니면 비웃음이었을까? 적어도 이 재판과 처형이 <왕>이나 <왕국>이 쟁점이 되고 있으며 그러기에 정치-종교적 지배 권력이 문제다.
폭력이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랑이 위험할까? 어쩌면 빌라도야 말로 예수가 말하고 실천한 사랑이야말로 로마제국에 가장 위험한, 위협적인 힘이라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 아닐까?
사랑은 왜, 위험한가? 아니, 예수의 사랑은 왜 위험한가? 아니, 빌라도의 관점에서 예수의 사랑은 왜 위험했던 것일까?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사랑은 위험할까? 예수의 사랑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거나 이해하고는 있을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는(요1 4:16) 말이 누구에게는, 아니 이 세상에게는, 얼마나 파격적이고 위험하며,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적 폭력’이 휘몰아치는 말인지 우리는 깨달고 있기는 할까? 빌라도는 깨달았는데,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에둘러 가자. 예수가 공적 삶을 시작하기 직전에 광야에서 악마와 대결한다. 그 대결은 인간 실존에 대한 세 차원의 근본 문제를 놓고 벌어진다.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어떻게[어떤] 힘[특히 지배 권력]을 가질 것인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할 수 있는가? 이 실존적 곤궁을 우리는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이 실존적-역사적 삶의 밀림을 온 몸으로 뚫고 나간 것이 예수의 삶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은, 이 재판은 그러한 삶에 대한 역사적, 정치-종교적 심판이 아니었을까? 그 심판의 귀결로서의 처절한 죽음.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삶과 죽음, 낯설기도 하고 스캔들 같은 처형, 이 사건이 그 후, 어느 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는 명제로 결정화된다. 다시 말해, 예수의 삶과 죽음은--그리고 부활은[여기서 부활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명제 속으로의 부활이기도 하다]--다름 아니라 사랑인 하나님의 체현이라는 파악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말,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는다.”는 말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말은 예수 당대의 헬레니즘 세계의 모든 신화적, 종교-정치적 신론은 물론 유대교의 신-이념을, 그것에 기초한 삶의 패러다임을 무너트린다. ‘신화적 폭력’으로 지배되고 있는 세계를 ‘사랑으로서의 신적 폭력’으로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구성하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재판은 <사랑이 초래한/초래할 비상사태>에 대한 심판이었다.
광야에서의 악마와의 대결,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어떻게[어떤] 힘[특히 지배 권력]을 가질 것인가?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초월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 물음을 예수는 <오직 사랑으로>라는 수술 칼로 악령 들린, 불의한, 병든, 삶을, 사회를, 세계를 치유하기 위해 절개한 것이다.

350억년전 우주의 빅뱅 이후, 오늘 우리가 인간이라는 생명으로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것, 이 우주에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이후 우주의 역사에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오직 하나 뿐인 생명의 꽃으로 피어오른 <나> 이것이 인간 실존이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나는 생명의 신비다. 이 생명의 신비, 신비로운 생명을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선물로 파악한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에서 신비로운 생명은 인간 생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블레이크에게 생명은 그 어느 것이든 그것으로 신비다. 조롱에 갇힌 울새도, 날개에 상처입은 종달새도, 굶주린 개도 신비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영원의 관점에서 직관하는 것”이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세계를 영원의 관점에서 직관하는 것은 세계를 전체--한계지 어진 전체--로서 직관하는 것이다.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다.”
“영원의 관점에서 직관하는 것”은 대상을 전체 세계를 배경으로, 우주사적 과정을 배경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보는 방식은 어떠한가? 우리의 통속적인 관점을 성서적인 다르게 보기,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영원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이질적인 보기방식이 아니라 제대로 보는 것 아닐까? 중요한 것은 이 이질적인 보기를 추동하는 그리스도교의 뒤나미스(본질 역량)이 무엇인가다. 그것은 도래하고 있는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 참으로 낡아빠진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랑이, 사랑한다고 처참하게 처형당한 사람, 사건이 있다면, 그 사랑은 무엇일까? 왜 위험할까? 마르실리오 피치노, <<사랑에 관하여>>에서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나는 당신 속에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당신이 나를 생각하기에. 그리고 당신 속에서 나를 버린 뒤에 나는 나를 되찾는다. 당신이 나를 살아 있게 하므로. (...) 지배자는 자기 자신을 통해 타자를 장악하지만, 사랑하는 자는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각기 자기 자신에게서 걸어나와 상대방에게로 건너간다. 그들은 각자 자기 안에서 사멸하지만 타자 속에서 다시 소생한다.
사랑은 너의 삶의 시간으로 짠 무늬와 나의 시간의 삶으로 짠 무늬를 엮어 새로운 시간의 무늬를 짜는 것이다. 조각그림 맞추기에서 나의 부족한 조각으로 너의 조각을 채우는 것도, 그 반대도 아니고 나와 너의 무늬를 허물어 새로운 그림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고통스럽고 위기다. 어긋난 사랑의 분노는 자기 조각 속에 상대를 나름대로 조각내어 맞추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통속적 사랑의 행태다. 그리스도교의 명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자신을 나투어 인간을 새로운 그림으로 완성해간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사랑을 너와 함께 새로운 그림으로 구성하고 완성하는 사람들의 이름이다.
예수의 메시아-사건으로서 계시되는 진리, 그 진리의 체현인 사랑은, 그러므로 인간의 실존적 곤궁을 뚫고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구성하게 하는 하나님의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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