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구원의 선행조건? - '구원의 수단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17:35
조회
4118
구원의 선행조건?

- '구원의 수단들'


최형묵


1.

그리스도인라면 의당 행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기도, 예배, 예배 가운데 행해지는 말씀선포와 성례전에의 참여,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생활 등입니다. 이른바 '구원의 수단들'로 여겨져 온 행위들입니다. 이 행위들은 사실, 하나하나 그 의미를 살펴볼 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행위들이 일련의 연속성을 갖는 '제의적 행위들'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주제로 그 의의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 행위들의 연속성을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우선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이 관게를 맺는 구체적 행위들이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행위 형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형태라 할 것입니다. 예배란 이 기도의 행위가 공동체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것이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적 행위라는 점에서 일종의 규율을 갖추게 되고 나아가 공동체적 행위에 걸맞는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한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말씀선포와 성례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을 매개로 하여 교회라는 항존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 내의 생활이 형성됩니다. 물론 이것들은 또 다른 맥락에서는 각기 또 다른 관련성을 맺을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수단들'이라는 하나의 범주에서 볼 것 같으면 이와 같은 관련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

바울 이래로, 특히 개신교의 전통에서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교의가 확고하게 자리잡아 왔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써만 하느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에 의한 구원의 보장, 제도로서의 교회의 질서에 의한 구원의 보장이 강조되었을 때 그에 대한 반명제로서 부각되어 자리잡게 된 교의입니다. 율법의 준수, 교회의 성례전적 질서의 준수, 그것은 인간들에 의한 가시적인 행위로서 그것에 의해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결단',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은총'이 강조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행위'란 구원의 효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교의는, 그 의도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심각한 윤리부재의 현상을 낳기도 했습니다. 구원의 효력과 관련하여 행위란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모든 행위란 부차적인 의의를 갖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하나의 흐름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을 가만히 살펴 보면 묘한 현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결코 '행위'가 소홀히 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해위의 실체란 바로 우리가 '구원의 수단들'로 묶어 말했던 그 행위들입니다. 이른바 '믿음의 행위'라 하여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묘한 점입니다. '믿음'과 '행위'의 대립구도에서 문제시되었던 그 행위들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수단들'이라 한 그 행위들이 전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행위들이 마치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일종의 주술적 위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여겨졌을 때 그 행위들을 상대화시키는 기제로 '믿음'이 강조되고 그에 걸맞는 '하느님의 은총'이 강조되었습니다. '믿음'과 '행위'라는 이 고전적인 신앙의주제들은 서로 배제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관계이지만, 인간의 행위가 마치 주술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그래서 결국 값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겸허한 태도를 배제시키게 될 때 상호간의 보완적인 관계는 파기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믿음'이 '행위'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때 역시 그 상호관계는 파기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행위'를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독특한 해위를 강조하는 것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믿음의 해위'를 강조하는 경향에서 '믿음'과 '행위'의 건전한 상호관계가 형성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의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믿음'이 아니며, '행위'는 '하느님의 은총'을 겸허히 받아들임으로써 결과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구원의 수단들'이라 불리우는 '제의적 / 종교적 행위들' 그 자체가 되고 맙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예배에 잘 참여하고, 교회생활을 착실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모든 내용이 됩니다. 결국 윤리의 부재라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쉽게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면서 이자놀이, 부동산투기 등에 심각한 윤리적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통해서도 윤리 부재의 현상이 어떠하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3.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의 '행위'의 문제를 분별해서 보아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즉 '수단 혹은 도구로서의 행위'와 '목적 혹은 결과로서의 행위'를 구분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구원의 수단들'로 일컬어져 온 행위들은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에서 당연히 도구적 해위들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신앙에서라면 그것들이 구원의 선행조건이요, 유일한 통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경험하는 생활의 범위, 즉 아직 저 천당에 이르기 이전의 이 세상 삶의 영역에서는 목적 자체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이 저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들은 결코 목적 자체가 되는 행위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야말로 이 땅에 하느님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특별한 방법입니다. 그러한 해위들을 통하여 하느님게서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신 뜻을 되새기고 그 부르심에 응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 뜻을 되새기고 결의를 다진다는점에서 우리는 그러한 행위들에 참여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상적인 행위들로 재현될 때 비로소 의의를 지닙니다. 기도와 예배,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생활에서 확인된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모든 인간들의 한 형제됨의 관계는 우리가 생활하는 현장에서 재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현실, 곧 하느님나라를 이루어 가는 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간의 관계는 인간들간의 윤리적 행위로 구체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걸핏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인간들 사이에서의 관계와 다르기 때문에 '신앙'은 '윤리'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지기 일쑤입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바로 종교적 행위들에 대한 강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인간들의 행위라는 점을 망각하곤 합니다. 이를 착각한 데서 사람들은 종교적 해위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교통행위요, 윤리적 해위는 그저 인간들만의 행위라고 여기게 된 듯합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하느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영역, 즉 제의으이 영역에 헌신할 때 구원에 이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무소부재하신 하느님', '역사의 주 하느님'이라는 고백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과 함께 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인간들의 신앙의 표현은 당연히 인간들의 구체적 해위들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종교적 행위'도 '윤리적 행위'도, 모두 인간들의 행위임과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의 윤리적 행위라 해서 하느님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어떠한 행위든 인간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계 내에서의 표현방식들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만 신앙적 인식의 특이성은, '하느님의 전지전능함', '하느님나라의 온전성'을 믿기에 어떠한 행위든 인간의 해위는 상대적 의의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점입니다. 이것이 '종교적 해위들'은 구원의 선행조건이 되는 반면에 '윤리적 행위들'은 부차적이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으로 혼동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언자 아모스의 선포와 야고보서의 말씀은 다시 한 번 되새겨 봄 직합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를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한국신학연구소 간 『살림』50(1993.1)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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