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읽기 05] 어떻게 살 것인가? - 데살로니가전서 4:1~12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3-10-16 21:37
조회
1440
천안살림교회 2013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3년 10월 16일 / 최형묵 목사
제5강 어떻게 살 것인가? - 데살로니가전서 4:1~12
0.
4장에 이르러 서신은 분위기가 바뀐다. 앞부분에서는 사도 바울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모범적인 믿음의 생활을 지속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안도와 함께 감사하는 것을 기조로 하였다. 그런데 4장 이하(4:1~5:11)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인 권면의 성격을 띠고 있다. 크게 생활과 관련한 권면(4:1~12)과 재림과 부활에 관한 해명(4:13~5:11) 두 가지로 나뉘는 이 내용은 뭔가 구체적인 상황과 동기를 암시하고 있다. 크게 보아 두 가지 내용은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재림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5:11까지 이어지면서 한 토막을 이루고 있는 까닭에, 오늘은 4:1~12의 생활상의 권면에 관한 내용에 한정해 그 뜻을 새겨보고자 한다.
1.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대한 격려 - 1:1~2
구체적인 생활의 권면을 말하고 있는 이 대목은 구체적인 상황과 동기를 암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공동체에 뭔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그에 대해 질책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배운 대로 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이런 맥락에서 ‘권면’은 ‘격려’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어지는 내용 또한 바로 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거룩한 삶 - 4:1~8
이 대목은 매우 구체적인 권면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특정한 개념의 번역 여하에 따라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상당히 난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서번역본이나 주석들은 특정한 의미로 ‘자신있게’ 해석해 놓았지만 한정된 의미를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뭔가 구체적인 문제를 놓고 질책하는 상황이 아니라 매우 신중하고 근본적인 윤리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할 때 그 대략적인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을 뿐이다.
우선 논란의 여지없이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은 ‘성결하게 되는 것’이며 ‘음행을 멀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앞의 문맥과 연결해 볼 때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대목은 그 삶을 더욱 독려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여기서 ‘아내’라고 번역된 특정 개념이 논란꺼리이다. “각 사람은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그릇’을 뜻하는 이 말은 ‘아내’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몸’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난외주는 이 구절에 대한 다른 번역을 소개해놓고 있다. “자기 몸을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해가 과연 적절할까?
‘아내’로 해석하게 되면 이 구절은 매우 구체적인 윤리적 지침을 말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부부관계, 그리고 나아가 성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적으로 문란한 면이 없지 않았던 로마의 대도시 상황을 생각할 때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개연성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미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데살로니카 공동체 성원들에게 하필 그렇게 특정한 문제만을 꼬집어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의 대원칙, 다시 말해 윤리적 태도의 근본을 재삼 확인하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그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그 개념을 ‘아내’가 아니라 ‘몸’으로 해석하게 되면 훨씬 더 그럴 듯해진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릇’이라는 말을 ‘몸’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후 4:7; 롬 9:22,23). 그것은 남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자신의 몸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단지 개별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이며, 나아가서 관계의 차원을 함축한다. 그것은 바른 삶의 태도, 진정한 의미의 주체적 삶의 진지성을 말한다. 또한 이 말은 ‘몸의 비참함’ 내지는 ‘비참한 몸’의 실상을 누구보다 절감하였던 공동체 성원들에게 매우 호소력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6절 이하에서 “이런 일에 탈선하거나 자기 형제자매를 해하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라는 말은 그것이 갖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도 바울이 왜 그 이야기를 굳이 꺼내야 했을까 하는 점은 또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그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던 상황을 추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문제가 데살로니가 공동체 성원에 뭔가 유혹거리가 될 수도 있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믿음으로 이미 구원의 대열에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윤리적 태도에 관한 문제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 ‘몸’에 관한 문제는 나아가 ‘일상의 삶’의 문제로 연결되었고, 선교자들에 따라서 몸에 관한 문제를 부차화하는 교설을 펼친 경우들도 있었던 상황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소중한 일상의 삶 - 4:9~12
앞의 내용과 연결되는 맥락에서 이해할 때 이 대목의 내용은 그 거룩한 삶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재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대전제가 되는 사랑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었다. 형제자매간의 사랑, 나아가 자신의 공동체 밖의 범위로 그 사랑을 확대하는 일은 이미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실행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부연의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일상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을 덧붙인다. “조용하게 살기를 힘쓰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은 바깥사람들을 대하여, 품위가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권면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현재 일상의 삶에 충실할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외부의 사람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칭찬과 격려에 곧바로 이어지는 이 권면의 의미가 무엇일까?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데살로니가 공동체 성원들이 일상의 삶의 소중함을 저버렸기 때문에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내용은 앞에서 권면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지금 잘 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믿음의 신실함에 대한 자긍심이 무분별한 열광주의에 빠트릴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하는 권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지금 이 지상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관심은, 전혀 엉뚱한 주제처럼 여겨지는, 뒷부분의 재림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지속된다.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3년 10월 16일 / 최형묵 목사
제5강 어떻게 살 것인가? - 데살로니가전서 4:1~12
0.
4장에 이르러 서신은 분위기가 바뀐다. 앞부분에서는 사도 바울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모범적인 믿음의 생활을 지속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안도와 함께 감사하는 것을 기조로 하였다. 그런데 4장 이하(4:1~5:11)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인 권면의 성격을 띠고 있다. 크게 생활과 관련한 권면(4:1~12)과 재림과 부활에 관한 해명(4:13~5:11) 두 가지로 나뉘는 이 내용은 뭔가 구체적인 상황과 동기를 암시하고 있다. 크게 보아 두 가지 내용은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재림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5:11까지 이어지면서 한 토막을 이루고 있는 까닭에, 오늘은 4:1~12의 생활상의 권면에 관한 내용에 한정해 그 뜻을 새겨보고자 한다.
1.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대한 격려 - 1:1~2
구체적인 생활의 권면을 말하고 있는 이 대목은 구체적인 상황과 동기를 암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공동체에 뭔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그에 대해 질책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배운 대로 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이런 맥락에서 ‘권면’은 ‘격려’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어지는 내용 또한 바로 그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거룩한 삶 - 4:1~8
이 대목은 매우 구체적인 권면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특정한 개념의 번역 여하에 따라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상당히 난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서번역본이나 주석들은 특정한 의미로 ‘자신있게’ 해석해 놓았지만 한정된 의미를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뭔가 구체적인 문제를 놓고 질책하는 상황이 아니라 매우 신중하고 근본적인 윤리적 태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할 때 그 대략적인 의미를 헤아려 볼 수 있을 뿐이다.
우선 논란의 여지없이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은 ‘성결하게 되는 것’이며 ‘음행을 멀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앞의 문맥과 연결해 볼 때 데살로니가 공동체의 성원들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대목은 그 삶을 더욱 독려하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여기서 ‘아내’라고 번역된 특정 개념이 논란꺼리이다. “각 사람은 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그릇’을 뜻하는 이 말은 ‘아내’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몸’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난외주는 이 구절에 대한 다른 번역을 소개해놓고 있다. “자기 몸을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해가 과연 적절할까?
‘아내’로 해석하게 되면 이 구절은 매우 구체적인 윤리적 지침을 말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부부관계, 그리고 나아가 성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성적으로 문란한 면이 없지 않았던 로마의 대도시 상황을 생각할 때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개연성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미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데살로니카 공동체 성원들에게 하필 그렇게 특정한 문제만을 꼬집어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의 대원칙, 다시 말해 윤리적 태도의 근본을 재삼 확인하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그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그 개념을 ‘아내’가 아니라 ‘몸’으로 해석하게 되면 훨씬 더 그럴 듯해진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릇’이라는 말을 ‘몸’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후 4:7; 롬 9:22,23). 그것은 남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자신의 몸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단지 개별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이며, 나아가서 관계의 차원을 함축한다. 그것은 바른 삶의 태도, 진정한 의미의 주체적 삶의 진지성을 말한다. 또한 이 말은 ‘몸의 비참함’ 내지는 ‘비참한 몸’의 실상을 누구보다 절감하였던 공동체 성원들에게 매우 호소력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6절 이하에서 “이런 일에 탈선하거나 자기 형제자매를 해하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라는 말은 그것이 갖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도 바울이 왜 그 이야기를 굳이 꺼내야 했을까 하는 점은 또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그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던 상황을 추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문제가 데살로니가 공동체 성원에 뭔가 유혹거리가 될 수도 있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믿음으로 이미 구원의 대열에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될 수 있었던 윤리적 태도에 관한 문제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 ‘몸’에 관한 문제는 나아가 ‘일상의 삶’의 문제로 연결되었고, 선교자들에 따라서 몸에 관한 문제를 부차화하는 교설을 펼친 경우들도 있었던 상황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소중한 일상의 삶 - 4:9~12
앞의 내용과 연결되는 맥락에서 이해할 때 이 대목의 내용은 그 거룩한 삶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재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대전제가 되는 사랑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었다. 형제자매간의 사랑, 나아가 자신의 공동체 밖의 범위로 그 사랑을 확대하는 일은 이미 데살로니가 공동체가 ‘실행하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부연의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일상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을 덧붙인다. “조용하게 살기를 힘쓰고, 자기 일에 전념하고, 자기 손으로 일을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은 바깥사람들을 대하여, 품위가 있게 살아가야 하고, 또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권면이 무엇을 의미할지는 더 따져봐야 하겠지만,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현재 일상의 삶에 충실할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외부의 사람들과도 온전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칭찬과 격려에 곧바로 이어지는 이 권면의 의미가 무엇일까?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데살로니가 공동체 성원들이 일상의 삶의 소중함을 저버렸기 때문에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내용은 앞에서 권면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지금 잘 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믿음의 신실함에 대한 자긍심이 무분별한 열광주의에 빠트릴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하는 권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지금 이 지상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의 이와 같은 관심은, 전혀 엉뚱한 주제처럼 여겨지는, 뒷부분의 재림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지속된다.
전체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