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바울서신읽기 06] 생동하는 희망으로서의 믿음 - 데살로니가전서 4:13~5:11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3-10-23 22:14
조회
1411
천안살림교회 2013년 수요 성서연구

바울서신 읽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2013년 10월 23일 / 최형묵 목사



제6강 생동하는 희망으로서의 믿음 - 데살로니가전서 4:13~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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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데살로니가전서는 이 부분을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서신의 나머지 부분이 칭찬과 격려 외에 별다른 신학적 논제를 제기하지 않는 반면, 이 부분은 재림과 부활 곧 종말에 관한 신학적 논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체 서신 가운데서 이 부분만을 따로 떼어 이해하는 것은 심각한 곡해를 초래한다. 이 서신은 전체로서 하나의 서신을 형성하고 있고, 따라서 이 부분 역시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갑자기 이 대목에 이르러 어떤 교리적 주제를 논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다소 독특하기는 하지만, 앞선 내용과 무관하지 않게 연결된 내용으로, 그것은 공동체의 내적 상황과 직결되어 있다.


1. 주님의 재림과 죽은 사람의 부활 - 4:13~18

이 부분의 첫 대목은 데살로니가 공동체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죽은 사람들에 관한 문제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죽은 사람들의 문제라기보다는 죽은 사람들 때문에 발생한 공동체 내의 슬픔과 불안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당시의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 초기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임박한 재림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 재림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이 발생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아니 더 실질적으로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도 재림을 맞이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면 역시 믿음은 헛된 것 아니겠느냐 하는 우려와 불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도 바울은 그 불안을 불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울은 먼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믿는다면, 죽은 이들 또한 예수와 함께 살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을 확인한다. 이미 죽은 사람들의 문제로 염려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5~18에서 바울서신에서는 낯선 방식으로 그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주님의 재림과 사람들의 영접에 관한 이야기로, 이 이야기는 매우 환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환상적인 표상을 통해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바울 스스로가 독창적으로 예견한 재림과 부활에 관한 사실적 묘사일까? 사실 이 묘사는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표상이었다. 그리스도인 말고도 당시에는 다음 삶에 대한 여러 표상들을 가지고 있었고, 다음 삶에 대한 기대 그 자체는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와 같은 당대의 일반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막연한 당시의 일반적 기대를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데살로니가 도시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어떤 것을 패러디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바울이 지금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그대로 로마황제의 임재를 나타내는 장면이다. ‘주님’(퀴리오스)은 당시 황제에 대한 극존칭이었다.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 역시 황제의 등극을 환호하는 표현이었다. ‘임재’(파루시아)는 황제가 나타나는 것을 말했다. ‘영접’(아판테시스) 또한 황제를 맞이하는 것을 뜻했다. 바울이 활용하고 있는 장면 묘사 또한 황제가 한 도시에 나타났을 때 모습 그대로이다. 황제의 신민들이 기대했던 모습이다. 더욱이 로마황제에 의해 번영을 누리게 된 데살로니가에서 그 기대는 더욱 컸을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그 기대를 그대로 뒤집어 그리스도의 임재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되살아남과 영접으로 바꿔 말하고 있다.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슨 염려와 걱정으로 슬퍼해야 할 까닭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스스로 임박한 재림을 기대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기서 활용하고 있는 환상적인 묘사를 하나의 사실로서 가정했다기보다는 죽은 이들에 대한 염려로 불안해하는 이들에게 그럴 까닭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과 그에 관한 표상에서 모종의 동요와 긴장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내용은 장차 주님을 만나 온전한 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불안을 떨쳐버릴 것을 권고하는 데 주요 초점이 있다. 바울은, 찢겨진 몸의 고통을 누구보다 깊이 통감하고 있던 이들 앞에서 몸의 부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권고를 한 것이다. 몸의 부활에 관한 바울의 생각은 고린도후서 15장에서 심화된다.  


2. 빛의 자녀로서의 삶 - 15:1~11

죽은 이들 때문에 발생한 불안과 염려는 결국 주님의 재림의 때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바울은 그 때에 대해서 더 이상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주님의 날이 마치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확인한다. 더불어 양적인 시간의 차원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평화와 안전’을 구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닥칠 일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연상시킨다. 제국이 평화와 안보가 확고하다고 여겨지는 순간, 그 질서가 극점에 다다른 순간, 거꾸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그 때 많은 사람은 재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공동체는 도둑 같이 닥칠 그 날을 전혀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사도 바울은 이 대목에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히 함으로써, 앞에서 말한 표상 자체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말뜻을 제대로 새길 수 있도록 한다. 이미 ‘빛의 자녀’, ‘낮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때’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음과 사랑의 가슴막이와  구원의 희망의 투구를 쓰고 어둠의 세력에 대결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다. 죽은 사람들의 문제도 이 맥락에서 사실상 해소된다. 이미 그 삶을 누린 사람들에게 다시 손해 봐야 할 어떤 것은 없다. 이 대목에서 종말에 대한 기대는 미래의 어떤 일이 아니라 현재 경험하고 있는 차원에 해당한다. 사도 바울은 “여러분은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믿음의 동요 없이 정진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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