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의 여정 - 누가복음 8:4~8[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2-07 16:10
조회
187
2021년 2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의 여정
본문: 누가복음 8:4~8



본문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 모두 전해지고 있는 말씀으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은 마가복음의 말씀에 비해 약간 간소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요체를 환기해볼까요?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져 사람들에게 밟히기도 하고 새들이 쪼아 먹어버렸고, 어떤 것은 돌짝밭에 떨어져 싹이 나기는 했지만 해가 뜨자 말라버렸고,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 제대로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100배가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성서는 친절하게도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그 비유에 대한 해설까지 덧붙여주고 있습니다(누가 8:11~15; 마가 4:13~20; 마태 13:18~23).
이 해설을 보면, 길가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악마에게 곧바로 그 말씀을 빼앗겨버린 사람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돌짝밭에 뿌려진 것들은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뿌리가 없어 시련이 오면 곧바로 무너지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심지가 굳지 못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의 경우입니다. 세 번째로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는 것들이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한 사람들을 말한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내적으로 동요하는 사람,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정작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침내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마가복음은 30배, 60배, 100배를 말하고 있는데, 누가복음은 간결하게 100배라고만 말합니다. 성서는 이렇게 예수님의 그 비유를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매우 간결하고 명쾌한 해석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이와 같이 반복 해석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다 익숙한 내용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말씀으로 대개 곧바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와 이 해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해설에는 ‘말씀’과 그 말씀을 듣는 ‘사람’ 곧 ‘청중’이 중심이 되는 내용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해설을 듣고 있는 우리들도 의심의 여지없이 그렇게만 상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해석, 곧 초대교회의 선교적 상황을 반영하는 하나의 해석입니다. 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말씀 곧 복음을 선교하던 사도들의 입장에서 그 복음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만은 않는 현실에 대한 비유로 해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말씀 곧 복음을 전해 듣는 청중들입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그러나 너희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비유 해설의 초점입니다.
성서 자체의 해석 때문에 오늘날에도 이 해설은 불변하는 해석으로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그야말로 교화의 차원에서 수용되고 있습니다. 이 해설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곧바로 말씀과 관련하여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여러 사람의 유형을 떠올리고, 스스로는 맨 마지막 사람이라고 자처하면서 안위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되어야겠다고 결의를 다지면서 역시 위로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때 이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더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인 예수님의 비유는 애초에 다른 초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성서 자체에 등장하는 초대교회의 해석,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 해석이 곧 왜곡이라 할 수는 없지만, 본래 비유의 초점을 좁혀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는 환기해야 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어떤 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청중의 관계라는 제한된 의미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 번역본에 그 소제목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되어 있어서, 이미 그 제목 자체가 하나의 해석을 함축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원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 ‘비유’인 것이 틀림없다면 그 비유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각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예컨대 ‘씨 뿌리는 사람’이 주인공인지, ‘씨’가 핵심인지, 아니면 그 씨가 떨어지는 ‘땅’ 또는 ‘토양’이 중심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원래 비유란 이야기 전체를 통해 한 가지 진실을 일깨우는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이야기를 함으로써 한 가지 초점을 강조하는 이야기 방식입니다. 반면에 이른바 ‘영해’(알레고리, 우화)로 알려진 이야기 방식은, 그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소재들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다양한 요소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니 더 풍요롭게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특정한 교리적 전제를 갖고 그에 꿰맞추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 의미를 좁혀버리는 해석 방식입니다. 12~15절의 해설이 그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말씀이 애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해설을 덧붙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해설을 덧붙여야 한다면 비유로서 적절성이 없는 경우입니다. 예컨대 ‘개그’를 해놓고 그에 대해 설명한다면 개그로서 성격을 지니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해설에 등장하는 용어들 자체가 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가 도마복음서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어떤 해설도 덧붙여져 있지 않습니다. 요컨대 비유는 청중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맥락 가운데서 쉽사리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어떤 진실을 일깨우는 이야기 방식이며, 그 원형에 가까운 것이 바로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오늘 본문말씀의 비유가 선포된 사회문화적 맥락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예수님의 비유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농사를 짓는 방법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씨 뿌리는 사람이 길가에도 뿌리고 가시덤불에도 뿌리는 식으로 허술하게 파종하지는 않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오늘날처럼 밭을 갈아놓고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밭을 갈기 전에 씨를 먼저 뿌리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씨를 먼저 뿌릴 때는, 밭으로 경작을 할 만한 경계 안에 여기저기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밭을 갈아놓고 나면 결과적으로 경계 지점에 놓인 씨앗도 있을 것이고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도 있을 것이고 덤불 속에 묻힌 씨앗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상황입니다. 대부분의 씨앗들은 흙에 제대로 뒤섞여 있다가 자라서 큰 결실을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그 진실을 다 압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이런 의미를 지닙니다. 더러 부적절하게 떨어진 씨앗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농사 자체가 다 망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제대로 심겨진 씨앗들이 마침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그러니 농사를 짓는 것 아니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은 씨앗이 알곡을 맺기 위해서는 때로 위험과 난관에 처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열매를 거두는 것처럼, 좌절과 혼돈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끝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말씀 예수님의 비유의 초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 그것이 오늘 말씀의 초점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확신 선언이며 동시에 그 비유를 듣는 청중들에게 그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비유와 이 비유 해설 사이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언급은, 예수님의 청중에게 해당하는 소리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청중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암만 목이 터져라 외쳐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사도들은 안타까워했습니다. 거기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태도 문제로 이 비유를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본래 뜻은 결코 좌절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에 있습니다. 그 확신은 말하는 사람 곧 예수님의 확신이며, 동시에 청중을 고무시키는 확신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능동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과 수동적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청중의 이분법이 전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 말 들어라!’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농사 한두 번 지어봅니까? 바로 그겁니다!’ 하고 확신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같이 지키자는 것입니다.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확인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장애물들과 난관이 있지만, 그래도 씨앗이 열매를 맺는다는 진실을 확인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떨까요? 해설(11~15절)에 따르면,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이런 사람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본래 비유의 취지에 따르면,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을 겪지만 우리가 뜻하는 바 목적을 위해 정진하면 끝내 그 일은 이루어진다는 진실을 깨닫고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게 될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위로의 선언이요 확신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성취감을 맛보며 때로는 좌절감을 맛봅니다. 우리 가운데는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 인생의 성취감을 맛본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픔과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 또한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는 가운데 길가에 떨어져 짓밟히거나 쪼임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잘 해보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따가운 햇볕에 사그라드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뭔가를 이루려고 애써보지만 가시덤불처럼 엉키고 꼬인 세태 때문에 좌절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난관과 장애물이 있더라도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진다는 예수님의 확신 선언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100배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씨앗과 같은 삶의 소망을 다시 확신시켜줍니다. 개인적 삶의 소망만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소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로부터 얻는 교훈을 통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소망의 확신을 함께 나누고 함께 키워나가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그 소망을 나누고 용기를 얻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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