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부조리한 세계를 넘어서는 믿음 - 이사야 63:15~64:3[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12-05 13:03
조회
7870
2021년 12월 5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부조리한 세계를 넘어서는 믿음
본문: 이사야 63:15~64:3



참 난감한 말씀입니다. 도대체 이 무거운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요? 본문말씀은 시편에서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탄식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격정적인 민족적 탄원시라 할 것입니다. 민족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두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6장 15절 첫머리는 제발 그 절망스러운 상황을 굽어 살펴봐달라는 탄원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내용은 하나님이 부재하는 상황에 대한 탄식입니다. “주님의 열성과 권능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나에게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쳤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계시기는 한 겁니까? 이런 항변입니다. 17절의 말씀은, 그러므로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탄식자의 상태를 말해 줍니다. “주님, 어찌하여 우리를 주님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굳어지게 하셔서, 주님을 경외하지 않게 하십니까?” 도저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탄식입니다. 그 상황은 19절에서 다시 강조됩니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주님의 다스림을 전혀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하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기에 이렇게 신성모독적인 탄식과 원망을 하고 있을까요? 본문말씀 가운데서는 18절에 그 상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주의 성소를 잠시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우리의 원수들이 주님의 성소를 짓밟습니다.” 이것은 성전이 무너진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자리에 함께 하시는 것으로 믿어진 장소가 침략자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 상황입니다. 설령 모든 곳이 유린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성소만은 유린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었는데, 그 믿음의 근거가 사라진 현실입니다.
이 탄식의 상황은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바빌론에 포로 잡혀갔다가 고국 땅으로 되돌아왔지만 나라 재건의 희망은 보이지 않고 폐허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생활을 할 때는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린 탓에 겪어야 하는 고통이려니 생각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장차 하나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로로부터 해방되어 그 기쁨을 잠시 누렸지만 공동체의 재건 희망은 보이지 않고 폐허만이 펼쳐져 있는 상황 가운데서 사람들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짜 나락을 경험합니다. 이즈음 이스라엘의 신앙은 급격히 그 색조를 달리합니다. 예언이 묵시로 바뀌고, 미래에 대한 점진적 희망이 파국의 종말에 대한 기대로 바뀝니다. 성서의 원형이 그런 절망적 상황 가운데 형성됩니다.

사실상 절망의 탄식으로 일관하고 있는 본문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은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거의 신성모독에 가깝게 원망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향해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자체를 저버리지는 않습니다. 모든 탄원시가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말 독특한 점은 16절의 탄원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도, 오직 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옛적부터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속량자’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야곱, 조상들은 믿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만은 진정한 구원자라는 고백입니다.
조상들이 굽어보고 있다면 그 조상들이 현재 고통을 겪고 있는 후손들의 상황을 어찌 외면하겠습니까? 지금 비록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상황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 백성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삶을 지속하게 된 데에 조상들의 은혜가 어찌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탄식은, 조상의 은덕에 대한 일말의 가능성마저도 부정해버립니다. 그것은 인간의 현실적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수없이 많은 조건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다 무너진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계신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여기서 진짜 특이한 고백이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고백이 낯설지 않지만, 구약에서는 친숙한 표현이 아닙니다. 더러 등장하기는 하지만(신 32:6; 렘 31:9; 말 2:10), 이렇게 면전에서 호칭하는 경우는 본문이 유일합니다. 이게 어떤 점에서 특별할까요? 신이 아주 멀리 느껴지고 심지어는 부재한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 그 신을 가장 가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에 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중요한 요체가 있습니다.
그 역설의 진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입니다. 전혀 신적인 위엄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예수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고 절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도 끝내 자신의 존재를 저버리지 않는 믿음의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재의 상황이 오히려 존재의 의미를 새겨주는 경우입니다. 여기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거꾸로 그 누군가의 존재를 더 분명히 확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말씀이 전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절망의 나락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의 희망, 오히려 더 분명해지는 삶의 희망이라고 말하면 조금 이해가 될까요? 모든 것이 평온하고 모든 삶의 조건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는 것은 쉽고, 또한 그 복을 누리게 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또한 훼손되지 않습니다. 사실 평범한 종교적 믿음은 대개 그런 범위에서 머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뤄졌다고 믿지만, 좋은 일이 없으면 아직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믿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그 믿음은 좋은 게 옳은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는 순간에 가장 가까이 부를 수 있는 믿음은 나에게 좋고 나쁨을 떠나 진정으로 옳은 것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내게 좋은 것이 옳은 것이면 더없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옳고 그름은 좋고 나쁨을 앞섭니다. 옳음을 따르는 것은 나에게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진실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본문말씀의 의미를 음미하는 가운데 곧바로 연상되는 저작들이 있습니다. 독일의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작품입니다. 엘리 위젤의 <흑야>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입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현장의 비인간적 상황을 우리는 대개 알고 있습니다. <흑야>는 그야말로 신 부재의 상황에서 신에 대한 믿음의 의미를 제기합니다. 사람들이 갖가지 방식으로 죽음에 이르는 현장, 그 가운데서 교수형으로 목숨을 잃는 장면을 보고 누군가 외칩니다. “도대체 신이 어디 있느냐?” “신은 바로 그 교수형 현장에 계신다.” 이 짧은 말로는 그 상황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흑야>가 일종의 신학적 버전이라면, <이것이 인간인가>는 인간학적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인간을 인간 취급하지 않은 비인간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이 삶아 남은 것은 운이 좋은 덕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비인간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의 존재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수용소에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된 데에는 끊임없이 도움을 줬던 로렌초라고 하는 소중한 한 동료가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인간일 수 없었던 상황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인간의 어떤 가능성을 상기시켜줬습니다. 레비는 그 기억을 이렇게 전합니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비인간적 상황에서 오히려 도드라지는 인간을 발견한 데서 그는 삶의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지옥’을 넘어선 세계와 인간에 대한 믿음입니다.
사실 이 두 작품 말고도 본문말씀을 마주하면서 곧바로 떠올린 것은 노래 <민중의 아버지>(살림의노래 84)였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되어가는 친구 김흥겸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단지 그 친구의 노래만이 아니라 1980년대 초반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세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짤린 하나님 /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나님 /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 /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늙으신[민중의] 아버지 // 하나님 당신은 죽어버렸나 /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계실까 / 쓰레기더미에 묻혀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얼마 전 참담한 역사를 초래한 장본인 전두환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진정한 희망의 끈을 붙잡고자 했던 이들의 노래입니다. 원망의 탄식인 것으로 보이지만 끝내 희망을 붙잡고 있는 이들의 진실한 절규입니다.

극적인 사례를 통해 말씀의 의미를 새겨보았습니다.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는 어떨까요?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는지 알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요? 어떤 사람이 자기 일생의 족적을 돌아보는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예수님과 동행한 족적이 선명히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는 한 사람의 발자욱만 보이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 여쭸습니다. “주님, 그 때 어디 가셨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그 때는 네가 너무 힘들어해서 내가 등에 업고 갔다.”
우리가 예수님의 동행,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체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부조리를 탄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부조리를 넘어선 진실과 정의가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울부짖을 수 있는 절실한 마음이 있다면 오히려 우리는 희망의 손길에서 멀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64장 1절로 이어지는 말씀은,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기”를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절규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만큼 삶의 의지 또한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무력함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이 절망스럽고 부조리한 세계를 넘어선 삶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그 절절한 믿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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