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 아가 8:6~7[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10-30 14:44
조회
2832
2022년 10월 3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본문: 아가 8:6~7



우리는 지금 성경 가운데 가장 경이로운 책의 한 대목을 처음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아가(雅歌: Song of Songs)가 성서 정경의 한 가운데 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는 책이 정경 한 가운데 자리하게 되었을까요? 이 노래의 내용이 뜨거운 만큼 이를 둘러싼 논란 역시 뜨겁습니다. 특별히 역사적으로 성애를 두려워하는 성향(erotophobia)을 강하게 드러내온 유대-그리스도교의 시각에서 볼 때 그 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만큼 이례적인 책이기 때문입니다.
첫머리에 ‘솔로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표제가 붙어 있지만, 솔로몬의 저작이라 볼 수 없고 그 연대 또한 추정할 수 없습니다. 이 놀라운 노래가 정경에 포함된 사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른바 영해(靈解: allegory)가 가장 일반적입니다. 성서는 흔히 하나님과 백성, 그리스도와 교회를 혼인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예레 2:2; 에스 16장; 호세 1~3장; 에베 5:31~32 등). 그렇게 보면 뜨거운 사랑의 노래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뜨거운 사랑을 찬양하는 것이 됩니다. 또 다른 견해는 고대 근동에서 신들의 혼인예식을 기리거나 사람들의 혼인예식을 축하하는 노래를 가다듬어 수록함으로써 성서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특이하게 주후 6세기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아가를 유월절에 낭송하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노래가 그리는 아름다운 봄날(2:8이하)과 유월절이 겹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재해석된 의미를 전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재해석들이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이유를 지닐 뿐 노래 전반의 내용과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전제 없이 그냥 읽는다면 암만 봐도 그저 뜨거운 사랑 노래일 뿐입니다. 아가는 그저 완전한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 노래가 고스란히 성서에 포함된 것도 놀랍지만, 이 노래가 그리는 사랑의 관계 또한 놀랍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정상성의 규범 안에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일종의 금지된 사랑이라고 할까요? 연인은 예루살렘의 임금님과 같은 이로 그려져 있고, 노래의 주인공 술람미 아가씨는 까만 얼굴의 이방 여인으로 노동계급에 속합니다. ‘예루살렘의 아가씨들’과는 다른 존재입니다(1:5). 내부인이 아닌 사회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 이웃이 아닌 금지된 타자입니다.
얼굴이 까만 것은 오빠들 성화 때문에 자기 포도밭은 돌보지 못하고 오빠들 포도밭을 돌보느라 햇볕에 그을려 그렇다고 말하고 있지만(1:6), 아예 까만 얼굴이 더 까매진 것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검음과 아름다움의 관계입니다. 과거 모든 성서 번역본은 ‘검지만 아름답다’고 번역했지만, 새번역은 ‘검어서 아름답다’고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내가 검어서 예쁘단다”(1:5). 통상 검음은 외부인이라는 것을 나타내주는 가장 결정적 표지 곧 부정적 시선을 이끄는 표지인데, 오히려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됩니다. 이 또한 사람들의 통념을 뒤집어엎습니다. 여러 면에서 아주 ‘이상한’(queer) 이야기입니다. 남녀간의 사랑 노래이니 이른바 정상성의 규범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온통 퀴어한 요소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아가는 여인이 임을 그저 사모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이 노래는 사랑의 순수한 상호성을 노래합니다. 성별이나 사회적 지위 등에 따른 대칭관계가 없고 오로지 순수한 관계입니다. “임은 나의 것, 나는 임의 것. 임은 나리꽃 밭에서 양을 치네”(2:16). “나는 임의 것, 임은 나의 것. 임은 나리꽃 밭에서 양을 치네”(6:3). 반복되는 이 구절은 순수하게 서로를 원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랑의 동등성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지만, 주인공 술람미 아가씨에게 현실적인 제약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를 둘러싼 인물들은 그 현실적 제약을 나타냅니다. 도시의 야경꾼, 오빠들, 어머니입니다.
연인을 찾아 헤매는 아가씨에게 도시의 야경꾼들은 폭력적인 제재를 가합니다(3:1~3). 퀴어한 존재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폭력을 뜻합니다. 오빠들은 자신들의 포도밭에 여동생을 붙잡아 둡니다. 이 아가씨 또한 자신의 포도밭을 갖고 있지만 자기 농사는 짓지 못하고 오빠들의 포도밭에 매여 있습니다(1:6; 8:8~12).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로,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매인 실상입니다. 여기서 타인의 욕망은 가족주의의 규범입니다. 사랑과 결혼이 가족사의 일로 여겨지는 현실입니다. 어머니 또한 다른 한편으로 가족주의의 규범을 나타냅니다. 술람미 아가씨는 연인을 어머니 집으로 들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8:1~2). 이것은 현실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내 지붕 아래서는 절대로 안 돼!” 하는 통념을 뒷받침하는 현실입니다. 가족주의와 연계된 정숙한 순결주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술람미 아가씨는 끝내 자신이 태어난 어머니의 방에서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난관을 축복의 조건으로 바꾸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로 그 열망의 절정이오, 따라서 아가의 절정에 해당합니다.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바닷물도 그 사랑의 불길 끄지 못하고, 강물도 그 불길 잡지 못합니다. 남자가 자기 집 재산을 다 바친다고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히려 웃음거리만 되고 말겠지요.”
도장 새기듯 나를 새겨달라는 말은, 자신을 대신하는 표지로 도장을 목에 걸고 다니거나 팔찌 또는 반지 삼아 다니는 관습을 유념하고 있습니다. 그 절절한 의미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너 있어!” 그 말입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하다는 말은 사랑의 놀라운 힘과 그 위대함을 극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고대적 관념이 배어 있습니다. 가나안의 주신 바알이 지하 저승의 신에게 붙잡혀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 부인이 구출한다는 신화적 관념입니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로 변형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거꾸로 사랑의 힘이 그만큼 놀랍다는 진실을 신화적으로 그린 것입니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고, 저승에 붙잡힌 상태마저도 뛰어넘는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끄지 못하는 거센 불길로, 강물로도 바닷물로도 끄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을 다 바쳐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가는 순수한 사랑의 숭고함을 그렇게 노래합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가장 완벽한 사랑에 대한 찬가입니다. 아가는 ‘에로스’보다 위대한 ‘아가페’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과 비교하는 것을 떠나 에로스 그 자체의 숭고함을 노래합니다. 그 어떤 것을 구실 삼아 결합하는 인간관계와 달리 오로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 되는 일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노래합니다. 내가 타인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상대가 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숭고함입니다.

꿈같은 이야기 하지 마세요! 그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대번에 튀어나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도 인용했지만 셰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타이몬>에서 이렇게 풍자하기도 했습니다. “돈은 문둥병을 사랑스러워 보이게 하고, 도둑을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힌다네. 늙어빠진 과부에게 청혼자를 데려오고, 과부가 오월의 청춘으로 돌아가 청혼자에게 가게 한다네. 눈에 보이는 신, 오, 마음의 시험자, 너의 노예가, 인간들이 성내고 있음을 알라! 이 짐승이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도록!” 모든 인간관계가 돈에 매여 있는 현실을 풍자한 것입니다.
영화 <헤롤드와 모드>는 인격적인 교감과 진정한 의사소통이 없는 껍데기뿐인 사랑, 곧 사랑 아닌 사랑과 진실한 사랑을 대비합니다(도로테 죌레 『사랑과 노동』가운데서). 젊은 주인공 헤롤드는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주고 또 신뢰할 만한 사람을 열렬히 찾습니다. 백만장자인 어머니와 함께 사는 그가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현실은 그런 갈망과는 전혀 상반됩니다. 기괴한 사치,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끊이지 않는 자기자랑, 서로 아무 할 말도 없고 사실은 증오하는 사람들과의 사교, 이런 것들이 진실한 인간관계를 대신합니다. 어머니와 친구들(장군과 목사)은 그에게 끊임없이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소개해줍니다. 그 때마다 헤롤드는 항상 자기 자신으로 숨어들어 버리고, 어른들의 그런 기대와 그릇된 욕망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며 도망칩니다. 그는 사랑 아닌 것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어머니와 기성세대의 속물주의, 물신주의의 세계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추구합니다. 그가 드디어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와 친구들에게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늙은 할머니와 사랑을 맺은 것입니다.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상품의 거래관계로 전락해버린 인간관계와 거래행위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현실에서 진실한 사랑의 의외성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그 현실에서 사랑은 늙고 주름살 가득한 여인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낯선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에서 사랑은 그렇게 쇠락하고 말았습니다. 넘쳐나는 물질의 풍요로움 가운데서 옹색하게 자리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죽음처럼 강렬한 사랑! 그 실체를 어찌 몇 마디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널려 있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다 들려준다 해도 충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그 위대한 사랑 이야기를 빼놓고서는 인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에 이를 수 없다는 지혜가, 아가를 성서의 한 복판에 자리하게 한 진짜 이유입니다. 나의 전존재를 상대에게 드러내고 동시에 상대를 받아들이며, 그러기에 나의 전존재를 한순간에 허무하게 만들기도 하고 한순간에 충만하게도 하는 사랑의 힘을 빼놓고는 인간의 삶을 말할 수 없습니다.
성서를 몇 가지 교리로 억지로 짜 맞춰 볼 일이 아닙니다. 거기서 사랑의 복음이 혐오와 정죄의 도그마로 전락합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고 있지만, 성서와 전통에 대해 새로운 안목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 정신을 새기는 것도 허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뜻밖에 주어진 말씀의 진실을 통해 인간 삶의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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