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가라지 뽑다가 밀까지 뽑아서야 - 마태복음 13:24~3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2-11-20 19:44
조회
3343
2022년 11월 20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가라지 뽑다가 밀까지 뽑아서야
본문: 마태복음 13:24~30



몇 주째 연이어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를 본문말씀으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본문말씀은 하늘나라를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흔한 비유에 해당합니다. 13:1에 보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나오고, 그 비유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전해집니다.
그런데 본문의 비유는 그 다음부터 좀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이제 밭에는 밀만 자라는 게 아니라 가라지가 같이 자라는 상황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도 심상치 않습니다. 밭주인의 종들이 와서 묻습니다. “주인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뿌리지도 않은 가라지가 어떻게 생겨났을까 묻는 말에 주인이 답합니다.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밭주인이 그 원인을 제공하지도 않았고 원치도 않았는데 그런 곤란한 일이 생겨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종들은 다그쳐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곡식밭에 가라지가 자라고 있으니 당연한 처사였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상식으로 보면 곡식과 가라지를 구별하지 못하지도 않았을 터이니 그렇게 묻는 것이 당연했을 겁니다. 이렇게 안달하며 묻는 종들에게 밭주인은 진짜 이상한 대답을 합니다. 상례를 벗어난 대답입니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그것과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마치 풍랑을 만나 허둥대는 제자들과 평정심을 지키는 예수가 대비되고 있는 것(마태 8: 23~27)과 같습니다.

13:36이하는 이 비유의 의미를 친절하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설명해주는 방식으로 이 비유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그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고, 추수 때는 세상 끝 날이고,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결국 이 비유를 최후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초기교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초기교회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그 상황과 예수 당대의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차이일까요? 초기교회의 상황이 교회 자체의 존립의 문제를 염려하는 상황이었다면 예수 당시의 상황은 교회가 생기기 이전으로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펼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비유 형식의 이야기와 그 비유를 해석하는 이야기의 형식도 판이하게 다릅니다. 당연히 그에 따라 내용도 달라집니다. 원래 비유는 알기 쉽게 하나의 초점을 해명하는 이야기 형식인 반면 초기교회에서 행해진 비유의 해석은 교리적 전제를 따라 비유 이야기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마치 암호문 해독하듯이 일일이 설명하는 이야기 형식입니다(알레고리). 원래 비유가 일상의 삶의 경험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던 반면 그 해석은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의 초점을 가지고 있었던 이야기가 여러 가지 초점을 가진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본문말씀과 그에 대한 성서 자체의 해석은 그렇게 초기교회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된 것입니다. 초기교회의 상황에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교회공동체 내의 각종 이질적인 분파들이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분파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초기교회는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최후 심판 때 모든 것이 판가름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비유의 원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예수의 어록을 집대성한 도마복음은 매우 간결한 형태로 이 비유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씨를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밤에 그의 원수가 와서 좋은 씨 사이에 가라지 씨를 뿌리고 갔습니다. 농부는 일꾼들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까 걱정입니다. 추수 때가 되어 가라지가 드러나게 될 때 뽑아 불태울 것입니다.’”(57)
말씀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추수 때가 되어 갈라내어도 늦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초점이 어디에 있을까요? 마지막 결론을 보자면 지금 당장 악을 척결하지 않아도 다 때가 되면 척결되게 되어 있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결론에만 주목할 수 없는 것은, 밭주인이 지금 당장 가라지를 뽑아버리지 말라고 한 이유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아버리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한 명백한 이유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비유의 초점이 있습니다. 자라나는 밀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데 이 비유의 초점이 있습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선을 지키기에 힘쓰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는 악한 현실 가운데 이미 싹터 자라고 있으므로, 그 악한 현실 가운데서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목욕물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밀과 가라지로 비유되는 선과 악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분별조차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밀과 가라지를 구별할 수 있듯이 선과 악의 문제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성급한 악의 척결은 선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선과 악이 칼로 무 자르듯이 갈라지지 않은 현실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먼저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은 선을 심화하고 확장해나가는 일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그것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에 저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삶의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급박한 삶의 현실과 거리를 둔 사변이 아닙니다. 실은 매우 절박한 현실에 대한 응답이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는 모여 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선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들은 매우 다급한 물음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하늘나라를 이루고자 하는데 어째서 우리 주변에는 늘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들의 정황에 더 가까운 말로 바꿔볼까요? ‘좋은 일 좀 하려고 하는데 어째 일이 이렇게 어렵습니까?’ ‘좋은 일 하자는데 왜 서로가 마음이 안 맞지요?’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하는데 어째서 얼치기 사이비들이 판을 칠까요?’ ‘정말 좋은 교회 만들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등등. 아마도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통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비유는 그와 같은 물음을 던지고 싶은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답변과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조급해하는 사람들을 격려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걱정 마시오. 다 때가 되면 거두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은 거두어야 할 알곡입니다.’ 오늘 비유의 초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해결을 유보하거나 얼버무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선악을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가 문제가 되는 진정한 까닭이 무엇인지 안다면 더더욱 곡식에 마음 쏟으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상황에 부딪힐 때 그 방해하는 상황에 빠져 허우적대기보다는 방해받음으로써 위험에 처한 우리의 일, 우리의 삶을 더욱 소중히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내가 불편한 상황에 처하면 불편한 상황 그 자체에 골몰하기보다는 그 누구에게든 그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내서는 안 되는 나의 삶의 방식을 더욱 소중히 하는 태도입니다. 척결해야 할 부정적 가치에 골몰하기에 앞서 지켜야 할 긍정적 가치를 더욱 소중히 하는 태도입니다. 하늘나라의 삶을 먼저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소중히 해야 할 일입니다.

위험하고도 미묘한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그의 사상이 미묘하다는 것은 다른 급진적 사상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만큼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본 측면이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위험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쉽사리 입증되었습니다. 나치의 ‘계관법학자’로 불릴 만큼 나치 통치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독재자들이 그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내편은 껴안고 상대는 적으로 내몰아 척결하는 방식입니다. 현 정부 6개월 통치 기간 뚜렷이 경험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것보다도 자기세력을 굳건히 하는 데 골몰하는 방식입니다.
사실은 권력집단이 된 교회가 오랫동안 지켜온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단척결을 앞세워 자신들만의 순수한 왕국을 지켜내기 위한 방식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가 그 길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자기세력을 결집할 수 있다고 믿는 허황된 믿음입니다. 반공주의와 성소수자 혐오를 내세우는 교회가 그 꼴입니다. 그 기성교회를 타파하겠다고 나선 ‘신천지’와 같은 부류는 오히려 그 모습을 극단적으로 빼닮았습니다.

스스로 선한 동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악한 세력과 대결할 때 그 상대를 닮아가는 일이 발생하며, 더 큰 악을 빚어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본문말씀의 비유는 악을 척결한다면서 오히려 자신을 손상시키는 우려할 만한 사태를 경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의 실체가 분명하게 인식될수록 스스로 지켜야 할 삶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하늘나라를 스스로 사는 삶에 충실하라는 요구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 서로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삶의 방식을 더욱 분명히 하는 일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그 삶에 충실할 때 척결해야 삶의 모습 또한 역으로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추수할 때에 불에 태워야 할 것과 곳간에 들여야 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말씀은 그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그 길을 신실하게 따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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