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막힌 담을 허무시는 평화의 그리스도 - 에베소서 2:14~22[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6-09 16:25
조회
1918
2024년 6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막힌 담을 허무시는 평화의 그리스도
본문: 에베소서 2:14~22



교회의 이상이자 동시에 궁극적인 평화의 이상을 선포하고 있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원수 된 사람들 사이에서 막힌 담을 허물고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신 평화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장엄한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 시대에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관계는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지평에서 벗어나 이방인들의 세계에 펼쳐졌을 때 부딪히게 된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다른 집단 사이에서 서로 질시하고 갈등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기는 하였지만, 초기 교회 시대에 그것이 더더욱 문제가 된 것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마저 그 현상이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처는 소아시아의 큰 상업도시 에베소서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였습니다. 큰 상업도시였던 만큼 출신지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거주하였고, 교회 역시 그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공동체에 보내진 이 편지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진실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2:14~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막힌 담으로 갈라져 있는 사람들을, 자기 몸으로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막힌 담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말하는 동시에 사람과 사이에 가로 놓인 장벽을 말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그 장벽은 율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갈라놓는 법이자 동시에 체제를 뜻합니다. 또한 동시에 그 체제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욕망과 편견의 장벽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써 그 장벽을 허무셨다고 본문 말씀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주술적 효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은 사람을 가르는 체제와 질서, 그리고 그 체제와 질서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편견의 추악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사건이며, 그 추악한 욕망으로 무고한 사람이 희생된 사건을 뜻합니다. 그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그와 같이 불행한 사건이 더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불행한 사건을 일으키는 인간의 욕망과 편견, 인간의 질서, 인간관계가 단절되기를 염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심으로 결국 자기 몸으로 갈등하고 불화하는 세상의 질서를 폭로하셨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만이 진정한 구원의 길임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리셨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알고 기억한다면, 더는 나와 남을 가르고, 자기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일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서로를 가르는 일은 더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진실을 믿는다면, 그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을 배제하는 일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의 결과는 세상의 진정한 평화입니다. 진정한 평화란 단지 전쟁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폭력이 사라지고 차별이 사라져 누구나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누리는 현실을 뜻합니다. 평화가 아닌 폭력과 차별, 그리고 불화와 갈등이 오히려 일상화되어 있고 정상인 것처럼 여겨지는 현실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현실을 넘어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진실을 믿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새로운 사람, 새로운 주체로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2:19)
이 말씀은 선포된 당시의 맥락을 잘 드러내 줄 뿐 아니라 역시 그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오늘의 상황을 환기해 줍니다. 본문 말씀의 앞 구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말했을 때 그 차이는 단지 종교적인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2:14). 그런데 이 대목에 이르러 사람들 사이의 장벽과 차별이 단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국 사람은, 말 그대로 외국인이며 비시민입니다. 이들은 시민권을 부여한 그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나그네는 한 나라 또는 도시에 귀속되어 있으되, 완전한 시민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대개 도시 사람들이 소유한 농지에서 일을 하는 시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해방노예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서, 완전한 시민권자와는 달리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상적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자유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이 온전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선포합니다.
그것이 곧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본문은 외국인이 당당한 시민권을 누리고 나그네가 당당한 시민권을 누리는 것이 곧 평화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차별 없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별받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시민권을 얻는다는 것은 특정한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을 뜻하지만, 본문 말씀은 더 나아가 그 의미를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정한 나라의 시민으로 귀화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구별이 의미 없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어떤 특정한 조건에 따라 자격을 부여받아 시민권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출신 아무개’라는 딱지를 확인할 필요 없이 동등한 존재로서 새로운 관계로 이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와 같은 구별과 차별을 무의미하게 만든 마당에 그런 절차를 따라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사람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을 뜻합니다. 새로운 인간의 탄생, 새로운 인간관계의 형성입니다.

교회의 이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2:20~22)
본문 말씀은 이미 사도와 예언자들에 의해 기초가 형성되고 그리스도께서 서로 연결해 주어 완성된 하나의 건축물로서 성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을 갈라놓는 율법의 표징이 된 성전과는 다른, 세상 그 자체 안에서 온전하게 구현된 새로운 성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좁게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뜻하지만,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선취해야 할 세상의 궁극적 모형을 뜻합니다. 더는 차별받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그 세상을 구현해야 할 교회의 이상이입니다.

불행하게도 교회의 그 이상은 배반당해 왔습니다. 서구 역사에서 그리스도교 왕국이 형성되었을 때 구원의 선민이 된 그리스도인은 자기 구원의 확증을 위하여 구원에서 배제된 이방인을 확실한 지표로 남겨두었습니다. 그 세계에서 ‘이방인’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아이러니는 오늘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배제되었던 이들이 그 배제와 억압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국가 공동체는 더 지독한 차별과 억압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의 역사입니다. 굳이 말하면 유대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오히려 혈통상 고대 유대인과 더 가까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몰아내고 있습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격입니다. 철저한 정치·경제·사회적 장벽으로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세워진 흉칙한 물리적 장벽은 그 배제와 억압의 압권입니다. 자기중심의 세계가 빚어내는 비극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세계에서 벗어나 있을까요? 오늘날 보편적 인권이 보장되고 있는 세계 가운데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잘 드러내 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인종주의에 대한 생각을 물으면 대개는 “우리는 그저 다같은 사람이다.”라는 답변이 나옵니다. 잠시 후 다시 물음을 구체화하여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백인 남성, 백인 여성, 흑인 남성, 흑인 여성 가운데 어떤 정체성을 선택하고 싶으냐고 물으면 절대다수는 백인 남성을 택하고 흑인 여성을 택하는 경우가 가장 적습니다. 그 이유를 묻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차별의 현실을 의식합니다(벨 훅스의 관찰. 아리안 사비시,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 129).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이에 맞서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맞받아치는 것은 보편적 가치를 역설하고자 하는 뜻이 아니라 특정한 정체성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현실을 덮어버리고 그것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논점을 흘려버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누군가 아픔을 호소하는데 ‘너만 아픈 게 아냐.’라고 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특정한 주장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맥락을 무시함으로써 엉뚱하게 논점을 흐려버리는 방식입니다. 맥락이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지 논리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차별금지법이 ‘역차별’을 불러일으킨다는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별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덮어버리고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관행이 저지당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마음의 발로일 뿐입니다. 다수자에게 요청되는 절제는 ‘역차별’이 아니라 소수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미덕입니다.
그 어떤 자격과 출신, 정체성으로 사람을 갈라놓고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오늘 우리 세계에 넘쳐납니다. 실로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생활세계와 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현실의 한복판에서 본문 말씀의 진실을 다시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궁극적 이상을 늘 마음에 새길 때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 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뜻을 이뤄가는 몫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막힌 담을 허무시고 진정한 삶의 평화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의 교회가 그 몫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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