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내 마음의 거울 - 사무엘상 24:1~20[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6-23 12:46
조회
542
2024년 6월 2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내 마음의 거울
본문: 사무엘상 24:1~20 / 24:7b~20



성서에서 사울왕과 다윗왕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 주인공들입니다. 두 주인공 각기 많은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도 사연이 많습니다. 인물의 개성도 개성이려니와 무엇보다 부족공동체에서 왕조로 바뀌는 역사의 전환기에 주인공의 역할을 맡은 탓일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아주 의미심장한 일화입니다. 처음에 사울왕은 다윗을 총애하였으나 두 사람은 심각한 갈등 관계에 빠지고 맙니다. 민심이 사울왕에게서 떠나 점차 다윗에게 쏠리자 사울왕은 다윗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이 구해준 것도 그 일련의 과정에서 벌어진 일입니다(20장).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본문 말씀이 전하는 상황입니다.
블레셋과 전투를 마친 사울왕은 다윗을 찾아 나섰습니다. 서울왕은 그 도중에 일을 보려고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 동굴에는 다윗과 부하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부하들이 사울왕을 처분하도록 부추깁니다. 다윗은 부하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대신에 사울왕의 겉옷자락을 몰래 잘라내는 것으로 그칩니다. 해치고자 하면 얼마든지 손쉽게 해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삼은 것입니다.
사울왕이 일을 마치고 동굴을 나서자 다윗도 뒷따라 동굴을 나서며 외칩니다. “임금님은 어찌하여, 다윗이 왕을 해치려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만 들으십니까?”(24:9) 잘라낸 옷자락을 들어 보이며, 얼마든지 임금을 해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달라 항변합니다. 더불어 자신의 손으로 왕을 헤치는 일이 없을 터이니 자신을 향한 분노를 거둬달라 요청합니다.
사울왕은 목놓아 울면서 다윗에게 말합니다. “나는 너를 괴롭혔는데, 너는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 도대체 누가 자기의 원수를 붙잡고서도 무사히 제 길을 가도록 놓아 보내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주님께서 너에게 선으로 갚아 주시기 바란다.”(24:17 ··· 19) 악을 악으로 갚지 않은 다윗의 행동은 사울왕의 마음을 바꿔놓습니다.

사실 다윗왕은 생애 내내 피를 많이 본 사람입니다. 성서는, 그가 성전을 짓겠다는 꿈을 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으로 성전을 짓지 못한 까닭이 피를 많이 본 탓이라고 해명하고 있을 정도입니다(역상 22:8). 본문 말씀은 피비린내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은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울왕과 다윗은 이후에도 다시 갈등을 겪게 되지만, 적어도 본문 말씀이 전하는 상황은 그 갈등의 사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선과 악의 명확한 이분법, 또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명확한 이분법으로만 사태를 이해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서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오히려 갖는 편견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버림을 받은 사울왕은 악한 사람으로, 그 대신에 선택을 받은 다윗왕은 선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울왕에게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는 면모들이 많고, 거꾸로 다윗왕에게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과오와 허물을 지닌 면모 또한 눈에 띕니다. 성서는 그렇게 허물을 지닌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이뤄가는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의 뜻을 제대로 깨닫고자 한다면 표피적인 언어를 넘어 그 진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진실은 무엇일까요?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선으로 화해를 이룬 진실입니다. “옛날 속담에 ‘악인에게서 악이 나온다’ 하였으니, 나의 손으로는 임금님을 해치지 않겠습니다.”(24:13) 이 말은 다윗 자신에 대한 변론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옛 속담의 편견을 무너뜨리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다윗 자신에 대한 변론일 수 있는 것은, ‘나는 악인이 아니므로 악을 행치 않는다’는 의미로 새기는 경우입니다. 다윗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그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다윗 자신에 대한 변론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볼 때 자신에게 악한 의도를 지니고 있는 사울을 향하여 그 말을 하고 있고, 또한 사울이 다윗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그 이야기는 그 옛 속담의 뜻을 부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 옛 법칙에 매여 있는 한 상생의 길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아니하고 선으로 화해를 이룬 사건, 본문 말씀은 그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다윗 왕의 다양한 면모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 보여 줍니다. 그 면모는, 첫째 시와 음악을 사랑하는 섬세한 면모를 지닌 사람, 둘째 탁월한 군사적 전략가, 셋째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가의 면모입니다. 그 다양한 다윗의 면모를 감안할 때 본문 말씀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역시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자 능수능란한 정치가로서 다윗이 취할 수 있는 태도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개인적 감정으로는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역시 경륜가다운 다윗의 처세를 드러낸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 개인적 동기상 다윗의 선한 의도를 강조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공인으로서 다윗의 책임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든 다윗의 탁월한 태도를 강조하는 해석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적어도 본문 말씀이 증언하는 다윗의 탁월한 태도를 높이 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마땅히 본받아야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만일 본문 말씀의 진실을 그저 다윗의 탁월함에 관한 이야기로만 한정해서 받아들인다면 절반의 진실밖에는 모르는 셈입니다. 명확한 상대와의 관계 안에서 이뤄진 행위요, 더불어 상대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진실을 우리는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너를 괴롭혔는데, 너는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 도대체 누가 자기의 원수를 붙잡고서도 무사히 제 길을 가도록 놓아 보내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주님께서 너에게 선으로 갚아 주시기 바란다.” 다윗이 그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진실을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성서가 이 이야기를 비중있게 전하고 있는 까닭이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단지 다윗왕의 탁월함을 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을 들여다보면, 성서의 기록자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며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핵심적 요체는 갈등과 불화를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지 일깨워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의 진실을 새삼스럽게 새겨야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6.25민족화해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기억하며, 오히려 화해의 길을 찾고자 하는 데 그 뜻이 있습니다. ‘민족화해’ 주일로 지키는 뜻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전쟁이라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의심스러운 팔레스타인에서의 학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불안한 세계 정세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염려되는 상황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를 써도 쉽지 않은 상황에 갈등과 대결, 위기를 조장하는 사태가 계속되고 있어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이쪽에서 풍선을 날리니 저쪽에서 풍선을 날리는 사태가 계속되고, 이쪽에서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동맹을 사실상 확대하니 저쪽에서도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하고 사실상 동맹을 회복하는 사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안보를 위하여 힘을 강화하니 상대의 힘도 강화되는 양상입니다. 안보의 역설입니다. 도무지 대화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내가 상대를 의심하면 상대 또한 나를 향하여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상대를 공격하면 나를 향한 상대의 공격 또한 거세집니다. 개인적 관계에서는 물론 집단적 관계에서 그 양상은 더욱 강화됩니다. 집단적 차원에서는 그 적대적 태도가 숭고한 이념으로 승화되기까지 합니다. 안보를 이유로, 애국주의를 명분으로, 반공주의를 빌미로 하는 적대적 대결의 사태는 더욱 강화됩니다. 나아가 그 집단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까지 그 적대의 논리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얼마 전 <화해·평화사역 그리스도인 길잡이>(기사연, 2024)를 펴내는 작업에 함께 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헌신한 한국 교회 두 원로의 이야기를 접하고 내심 충격과 함께 감동을 받았습니다. 전쟁중 공산군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서광선 목사와 김상근 목사 이야기입니다. 긴 이야기를 다 전하지는 못하지만, 그 힘겨운 과정을 어떻게 이겨내고 어떻게 평화를 위한 일에 나서게 되었는지 전하는 결론만 소개합니다.
남북교회 지도자들이 캐나다에서 함께 만난 자리에서 북쪽 대표의 통역을 도와드리고 난 후 서광선 목사의 고백입니다.
“북에 있는 적을 도왔으니 법에 걸리겠구나 싶었지만,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은혜의 순간, 원수를 사랑하게 하는 기회의 순간 같았습니다. 그 이후, 나는 자유롭게 북에 대해, 평화와 통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004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300명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하며 이 이야기를 나눴고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고, 조선 민족이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나는 평화와 통일에 대해 자유롭게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와 자매로 하나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평생 아버지를 잃은 일로 북에 대한 적대감을 떨칠 수 없었으나 6.15공동선언남측위원장 자격으로 북의 최고권력자를 만난 후 김상근 목사의 고백입니다.
“저 복수심이 나의 내면 깊이에 잔불처럼 잠재해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큰 눈으로 넓게 보면 잔불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길에 발을 내디디고 또 내디디고 또 내디디면 새로운 지평이 보입니다. 저의 경험입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 불가의 유명한 격언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상대를 대할 때 상대를 보는 눈이 내 마음의 거울이라는 진실을 우리는 깊이 유념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다시 새기며,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화해를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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