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편견과 차별을 무너뜨리는 성령의 역사 - 사도행전 8:26~39[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4-07-07 16:23
조회
1704
2024년 7월 7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편견과 차별을 무너뜨리는 성령의 역사
본문: 사도행전 8:26~39



본문 말씀은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알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유대인의 세계를 넘어 이방인의 세계로 전파되었는지, 그렇게 경계를 넘어 전파될 수 있었던 동인이 무엇이었는지 알려 주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은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6:2~6)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루살렘 남쪽 가사로 향합니다. 지금 참극의 현장이 되어버린 팔레스타인 자치구 가자 지역입니다. 지금은 지상 최대의 천장 없는 감옥이 되고 말았으나 대륙을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번성하고 아름다운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빌립은 예루살렘에 예배를 드리러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재무대신을 만납니다. 여왕의 이름처럼 소개된 간다게는 사실 고유명사가 아니고 파라오와 마찬가지로 왕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여왕의 내시가 귀국하는 길에 마차에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그 마차에 바짝 다가가도록 명합니다. 그 사람이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것을 듣고 빌립은 말을 겁니다.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8:30) 그 내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합니다. “나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8:31) 이렇게 말하며 빌립더러 자기 마차에 타라고 권합니다. 모든 것이 준비된 듯 척척 맞아 돌아갑니다. 빌립은 마차에 올라타 그가 마침 읽고 있던 이사야서의 본문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그 본문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이었습니다(이사 53:7~8). 고난의 종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묻습니다. 그 내용이 예언자 자신을 두고 한 말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를 두고 한 말인지 묻습니다. 빌립은 무릎을 쳤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설파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한 바로 그런 분이 우리와 함께 사셨다는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8:35)고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빌립은 신이 나서 말씀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말씀에 부합하는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을 것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상고하는 진지한 사람이었던 에티오피아의 내시는 곧바로 회심하고, 물이 발견되는 곳에 이르자마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에게 세례를 베풀자 성령께서 빌립을 또 다른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초기 교회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전하는 이야기의 맥락에서 한 일화로 등장합니다. 그 전반적인 문맥을 보면 이 이야기가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 나름의 고유한 역사관을 갖고 있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스데반과 함께 빌립이 집사로 뽑힌 이후 사도행전의 이야기(6장 이하)를 보면, 본문 말씀의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스데반의 순교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은 유대의 전통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설파하는 말씀을 전했지만, 예루살렘 주민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예루살렘 주민에 의해 순교 당합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말합니다. 자신들만이 정통성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대인들의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이 감동받아 곧바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전합니다. 정통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못할 원수로 여겼던 사마리아인들이 오히려 구원의 현실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빌립이 활약하니 사도 베드로와 요한도 잇달아 나타나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이 성령의 인도로 놀라운 일들을 펼치는 것을 보고 마술사 시몬이 제자들의 능력을 돈으로 사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8:20)라고 저주합니다. 이 이야기는 현실을 지탱해 주는 엄연한 법칙을 넘어서는 성령의 능력, 곧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일관되게 성령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사도행전이 성령행전으로 불리는 까닭입니다.

그다음에 곧바로 본문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사울의 회심(9장), 그리고 베드로의 이방 선교(10장)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본문 말씀은, 베드로에 의한 이방선교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그것이 사도들에 의해 교회에서 공인되기(사도 11:18) 이전에, 그 모든 일에 앞서 성령에 의해 이뤄진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 주인공의 회심, 아니 주인공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합류하게 된 사건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이 주인공은 에티오피아 궁정의 고관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정통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히 구별될 뿐 아니라 결함을 지닌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요인을 갖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국적이라는 것은 당대 성서의 세계관에 비추어볼 때 남쪽 땅끝의 변방 사람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피부색도 달랐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내시였습니다. 특히 여왕을 모시는 내시였던 만큼 틀림없이 거세된 환관을 뜻하고, 이는 전형적인 성별 정체성과는 다른 제3의 성별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퀴어(queer)한 존재, 성적 소수자였습니다. 흑인이자 이방인으로서 인종적 차별, 제3의 성별 정체성을 지닌 성소수자로서 사회적·문화적 차별을 겪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할례 여부가 중대한 쟁점이 된 초기 교회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 주인공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난관은 실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8:36) 주인공의 이 물음은 스스로 그 장벽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명기(23:1)에 따르면 내시와 같은 존재는 이스라엘의 예배 공동체에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성서를 깊이 알고 있었던 만큼 그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부 사본에 그다음 대화 내용(37절)이 빠져 있지만 다른 사본에는 이런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말하였다. ‘그대가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내시가 대답하였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8:37) 세례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실로 의미심장한 대화입니다. 그 어떤 조건도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배제될 만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는 대화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믿음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필요치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할례 논쟁보다도 더 급진적인 성격을 띠는 이야기입니다.

사건이 이사야서를 매개로 하여 펼쳐지고 있다는 것은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굴욕을 당하면서, 공평한 재판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랴?”(8:33; 이사 53:8) 내시가 이 말씀의 뜻을 물었을 때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자신이 겪는 차별과 고난을 동시에 떠올렸을 것입니다. 빌립이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것이라고 일깨워줬을 때 다시 어떤 심경이 되었을까요? 내시는 그 차별과 고난을 이겨낸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복음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게다가 고난의 종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지는 이사야서의 선포는 내시의 처지에서 더욱 통감할 수밖에 없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방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온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과는 차별하신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고자라도 ‘나는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아들딸을 두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낫게 하여 주겠다. 그들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도록, 영원한 명성을 그들에게 주겠다.’”(이사 56:3~5)
이사야서의 말씀(58장)과 더불어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께서도 고자를 언급하며 제3의 성에 대해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마태 19:11~12). 결혼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때도 있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해 응답하는 장면에서입니다. 그럴 만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응답하시는 대목입니다. ‘모태로부터’, ‘다른 사람 때문에’, ‘하늘 나라 때문에’ 고자가 된 세 부류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공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이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편견을 성서에 대입하기 전에 먼저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헤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본문의 주인공이 처한 난관과 그 난관을 걷어내는 복음의 전파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더욱 실감 나게 헤아려 보기 위해서입니다.

사도행전이 성령의 역사로서 이 사건을 전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땅끝까지 선포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그 땅끝은 단지 지리적 한계로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지리적 한계로서 땅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엄연한 물리학적 진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전파된 지역적 범위를 보더라도 이제 세계 곳곳에 도달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장벽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지닌 편견의 장벽으로 숱한 사람들이 차별받는 현실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이 전하는 사건의 진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편견의 장벽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장벽을 무력하게 만들어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방인이 구원의 시혜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전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기성 종교집단의 한계와 아집을 뛰어넘어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해 있는 집단의 정체성을 자기 삶의 모든 조건으로 알고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통념을 뛰어넘어서는 구원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 믿는 사람들이 확고부동하게 쳐 놓은 경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특정한 경계 안에 자신들을 가두고 그 안에서 자기 의를 내세우며 모든 것을 판단할 때, 하나님의 영은 언제나 그 경계를 훌쩍 넘어 앞서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이야기에서도 똑같은 동기가 반복됩니다. 베드로가 여전히 유대인의 전통에 매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할 때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사도 10:15)

본문 말씀을 포함한 사도행전의 전후 문맥은 복음이 이방인의 세계에 전파된 진실을 단순하게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사마리아인, 변방 외국의 내시, 적국의 군대 장교,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 곧 전통적 관념으로는 구원의 공동체에 속할 수 없는 국외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진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를 성령의 역사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깨닫는다면 겸허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의 한계와 우리의 기준을 넘어서는 성령의 역사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편견에 따른 혐오와 배제의 논리로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 자기 의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내 아집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때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몫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 절반의 결실을 돌아보며 또 다가오는 시간을 어떻게 맞이할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시간을 성령의 역사에 맡김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 성령의 역사를 따름으로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궁극적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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