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을 아는 것 - 예레미야 22:13~17; 마태복음 25:31~46[김상기 목사 / 유튜브]

작성자
살림교회
작성일
2022-08-28 16:16
조회
1126
2022년 8월 28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하나님을 아는 것
본문: 예레미야 22:13~17; 마태복음 25:31~46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오늘 예레미야 본문은 여호야김에 대해 말하지만 그의 이름은 뒤에 가서야 언급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요시야 왕의 아들입니다. 그의 형제 여호아하스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요시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요시야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집트 왕 느고에 의해 폐위되고, 여호야김이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20여년 앞둔 시점입니다. 여호야김은 느고가 여호아하스에게 벌금으로 부과한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갚아야 했고, 이를 위해 백성들은 형편에 따라 정해진 금액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을 둘러싼 국제질서가 재편성되던 시기였습니다. 앗시리아가 몰락하고 이집트가 쇠퇴하고 바빌론이 신흥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국내외 정세 속에서 이스라엘은 바빌론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이때 왕으로서 여호야김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그에 대한 예레미야의 고발은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케 합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건축공사를 감행했고, 그의 계획은 큰 집을 짓되 넓은 누각이 있고 송백나무 창을 만들고 붉은 단청을 입히는 것입니다. 왕들은 많은 경우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 왕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런 일을 꾀합니다. 여호야김은 이집트의 느고가 백성들이 세운 왕을 폐위시키고 대신 세운 왕이었으니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건축사업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그는 동원된 인부들에게 삯도 제대로 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불의로 집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는다고 일갈합니다. 백성들의 반발도 당연히 뒤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면 왕은 무력으로 억누르고 피를 흘리고 강압적으로 공사를 진행시킵니다. 그렇게 완성된 건축물이 왕의 권위를 높여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왕이 되는 게 아니라는 예레미야의 외침에는 짓밟힌 백성들의 한이 담겨 있습니다. 궁전이 높아지고 화려해지는 만큼 백성들의 지지는 낮아지고 민심은 그에게서 완전히 돌아섰을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을 기억하시지요? 그때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일을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라고 하시면서도 그 일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 건축 사업을 하나님이 부정하셨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이 훗날 다시 시도된다 해도 그것은 정당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권력자들이 이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여호야김의 때아닌 건축사업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드러내보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의 잘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려고 요시야를 끌어들입니다. 그에 따르면 요시야는 먹으나 마시나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시행했고 그때 그는 잘 되었습니다. 왕의 성공은 자기가 잘 되기 위해 애쓰고 자기의 부를 늘리기 위해 힘쓰고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백성을 통제.감시.억압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펼치는 것이 왕으로서 성공하는 지름길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둘러싸고 많은 논의들이 가능하겟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억울함이 없고 따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힘없는 자와 가난한 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앎은 통상적으로 지식과 동일시됩니다. 예레미야 역시 이러한 의미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렘 9,23-24에서입니다. 사람이 자랑할 것은 지혜나 용맹이나 소유가 아니라 “..,야훼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시는 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야훼는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단순한 지식으로 그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 깨달음을 기뻐하신다면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깨달음은 실천하는 앎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지식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알아 가는 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실천적인 앎,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있기를 빕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천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유를 탐욕에서 찾습니다. 탐욕이란 누구에게나 있고 하나님이 아닌 우리 욕망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게 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기자는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단언하고(3,5), 야고보서 기자는 탐심이 죄의 모태임을 밝힙니다(약 1,15). 탐심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여호야김의 선택은 탐심이었고, 탐심은 억압과 폭력과 사치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대신 외세에 의존하게 된 것도 그 연장일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야김은 이집트와 바빌론 사이에서 바빌론을 등지는 외교적 실책을 범하고 결국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이같은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이 지나친 말이 아님을 마태복음 25장의 본문이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에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크게 양과 염소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모두 예수를 ‘알고’ 혹은 ‘믿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한 쪽은 예수의 말씀에 우리가 언제 주님이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했읍니까? ... 우리가 언제 옥에 갇힌 것을 보고 가서 뵈었습니까? 라고 반문하는데, 다른 쪽은 우리가 언제 주님이 주리신 것이나 ...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돌아보지 않았습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예수를 모른다면 이런 대답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자나 ... 나그네나... 옥에 갇힌 자 등을 ‘돕는’ 일들이 예레미야가 말하는 정의와 공의와 다른 작은 일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과 예수가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과 정의와 공의가 꼭 거창한 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불의와 재난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돕는 것 자체가 불의에 맞서는 사랑의 일이고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작은 사람들의 신음소리에 응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일을 하는 줄 몰랐고 하지 않는 줄도 몰랐습니다. 누구도 주님이 그 약자들 속에 계시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이 자신을 약자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래된 성서의 핵심 사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것이고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것은 하나님에게 꾸어주는 것입니다(잠 14,31; 17,5; 19,17). 이처럼 약자에 대한 태도를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태도로 여기십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환대했는데, 나중에 그들은 하나님과 천사들임이 밝혀졌습니다.
양과 염소를 가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실천적인 앎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요구하는 믿음이고 바울의 말로 바꿔 말하면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러한 믿음일 때 하나님은 그것들 위에 그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약자들을 돌아보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리트머스이고
약자들에 대한 태도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삶과 믿음을 측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되 실천적으로 알기를 빕니다.
하나님을 알되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행하시는 분으로 알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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