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02]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0-04 21:58
조회
93
2023년 하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02
2023년 9월 20일~12월 20일 12주간(중간 3차례 휴강) 매주 수요일 저녁 7:00~8:30
최형묵 목사

2강 (10/4)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3a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들은 여러분에게 ‘보라, 그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새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 나라가 바다에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물고기들이 여러분들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여러분 안에 있고 또 여러분 밖에 있습니다.”
3b “여러분 자신을 아십시오. 그러면 남도 여러분을 알 것이고, 여러분도 자신이 살아 계신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스스로를 알지 못하면 여러분은 가난에 처하게 되고, 여러분이 가난 그 자체가 됩니다.”
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날을 보낸 늙은이도 칠 일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게 생명이 어디에 있는가 물어보기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면 그 사람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 될 것이고, 모두가 결국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5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감추어졌던 것이 여러분에게 드러날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묻혀진 것으로서 올라오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6 예수[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할까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구제해야 합니까? 음식을 가려먹어야 합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하늘 앞에서는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드러나지 않은 비밀도 없고, 나타나지 않을 숨김도 없습니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자는 행복합니다. 그 사자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 사자도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8 예수[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란 자기 그물을 바다에 던져 바다에서 작은 물고기들을 잔뜩 잡아 올린 지혜로운 어부와 같습니다. 그 지혜로운 어부는 잡은 물고기들 중에서 좋고 큰 고기 한 마리를 찾아내고, 다시 나머지 작은 물고기들을 모두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런 식으로 큰 물고기들을 쉽게 골라낼 수 있었습니다. 여기 들을 귀 있는 이들은 잘 들어야 합니다.”
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씨 뿌리는 사람이 밖에 나가 씨를 한 줌 쥐고 뿌렸습니다.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가 와서 쪼아 먹고, 또 어떤 것은 돌짝밭에 떨어져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결실을 내지 못하고,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져 숨통이 막히고 벌레들에게 먹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어 육십 배, 백이십 배가 되었습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 Thomas O. Lambdin 외 번역본; <도올도마복음한글역주> 참조

3a. (* 유사병행구: 누가 17:20~21; 욥기 28:9~14; 신명 30:11~14; 로마 10:6~7)
* 하늘에도 바다에도 있지 않고 우리 안에, 그리고 밖에 있는 나라: 어떤 별도의 공간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나라를 뜻한다. 도마는 ‘하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 대신 ‘아버지의 나라’라는 표현을 즐겨 쓰고 있다. 안에 있다는 것은 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동시에 밖에 있다는 것은 관계의 차원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곧 내가 깨달은 바를 사람들 사이에서 실천하는 데 그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내면의 개벽인 동시에 인간관계의 개벽을 뜻한다.

3b. (* 유사병행구: 요한 14:20; 갈라 4:7~9; 고전 8:3)
* 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신탁이자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좌우명으로 알려진 경구이다. 예수의 세계는 그리스 세계와도 상통하고 있다. 이것은 그 나라에 이르는 출발점이자 동시에 일관되어야 하는 철칙이다. 자신을 스스로 알 때 타인도 자신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역시 내면적·주체적 각성과 관계의 변화를 함축한다.
* 아버지의 아들(자녀): 여기서 자신을 안다는 것의 요체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만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자녀)이 된다는 것이다. ‘人乃天’, ‘참나’, ‘얼나’와 상통한다. 그것은 당당한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외부의 시선에 의존하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삶 곧 아버지의 아들(자녀)로서 삶을 살 때 삶이 풍요롭게 되리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 진실을 깨우쳐 주는 분이다.

4. (* 유사병행구: 마태 11:25; 누가 10:21)
* 갓난아이에게 생명의 길을 묻는 늙은이: 인생의 연륜이 깨달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경험적 진실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갓난아이가 무슨 사리분별력을 가졌다는 이야기일까? 일단 이 이야기는 연륜에 상관없는 깨달음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 등장하는 갓난아이는 그 자체로 구원의 상징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칠일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8일째 할례를 받는 관습을 유념한 것으로 그 이전의 갓난아이 상태를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 구원자상과 함께 전해져 오는 ‘어린이’ 구원자상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유태보존’의 인간이 문명의 한 원동력이었다는 점도 생각해 봄 직하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나타낸다. 나이가 들어도 그 가능성 안에 있으면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날이 새로워지는 속사람’(고후 4:16~18)이라고 하지 않은가!
* 먼저 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나중 될 것이고, 결국 하나가 된다는 것: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된다는 것은 다른 복음서들에 나오는 내용을 연상함으로써 비교적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처음과 나중이라는 분별이 의미없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을 뜻할 수도, 진정한 의미의 구원의 경지로서 하나님과 합일에 이른다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5. (* 유사병행구: 마가 4:22; 누가 8:17; 12:2; 마태: 10:26)
* 바로 앞에 있는 것을 깨달을 때 드러나는 진실: 마치 감추어져 있다가 드러난 도마복음의 운명을 말하는 듯한 구절이다. 구체적인 대상 가운데 숨어 있는 사물의 이치를 말한다. 보편적 개별성이라고 할까? 멀리 있지 않은 진리를 뜻한다. 원효의 ‘해골바가지’를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일상의 삶 안, 또는 자기 안에 숨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비밀의 말씀’이 된 것은 사람들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이 같은 깨달음의 차원은 수없이 역설되어 왔지만 그걸 깨닫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뭔가 특별한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

6. (* 유사병행구: 마태 6:5~8)
* 모든 종교적 행위에 앞서는 것: 금식, 기도, 구제, 음식을 가리는 것은 흔히 종교적 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체들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제자들의 물음에 답하는 예수의 말씀은 충격적이다.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지금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직격탄을 날리면서 소위 종교적 행위들에 앞서는 근본적인 마음의 바탕, 삶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황금율, 그것이 근본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외식(外飾)을 질타하고 내면의 진실을 역설한 말씀이다. 모든 행위들에는 그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인간 정신세계의 비약적 발전은 바로 그 내면세계를 인식한 것에서 비롯된다. 소위 ‘믿음 좋아 보이는 사람’과 ‘인간됨이 제대로 된 사람’ 가운데 누가 바람직할까?

7.
* 사람이 사자를 먹으면?: 상징성을 제대로 헤아리고 해석해야 할 대목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도 나오듯이 사자는 우리 자신 가운데 있는 야수성(野獸性)을 상징한다. 따라서 참 인간에 의해 야수성이 극복된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반면에 사람이 사자에게 먹힘을 당하면 사자가 사람 행세를 하게 됨으로 불행한 일이다. ‘먹는다’는 것은 단지 제거하는 차원과는 달리 그 형질을 완전히 전화시키는 것을 뜻한다.

8. (* 유사병행구: 마태 13:47~48; 누가 5:1~7)
* 지혜로운 어부: 이 본문은 말뜻 그 자체로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없다. 큰 것을 얻으면 작은 것을 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큰 것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근본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뜻한다. 그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것을 얻으면 그 밖의 잡다한 것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뜻 자체로는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으나, 이 가르침은 몇 가지 맥락을 고려할 때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마태복음의 유사병행구는 취하고 버리는 것을 최후심판으로 연결한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와 같은 심판과 연결시키지(이 경우 비유의 주요 소재는 물고기) 않고 지혜로운 어부의 깨달음을 강조한다. 누가복음의 유사병행구는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고 말할 뿐 버린다는 이야기는 없다. 오늘날 교회의 신앙이 ‘많은 복’, ‘충만’, ‘거두어들임’을 강조하지만 이 본문은 ‘버림’, ‘비움’으로써 얻는 경지를 말하고 있다. 특별히 오늘의 맥락에서는 돈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잡아먹는 자본의 포식성과 닮은 사람들의 삶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다. 자본의 포식성(Carnival Capitalism)을 극복할 수 있어야 사람들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9. (* 유사병행구: 마태 13:3~8; 마가 4:3~8; 누가 8:5~8)
* 씨앗의 결실: 우선 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의 파종법을 알아야 한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방식이 아니라 씨를 뿌리고 밭을 가는 방식이다. 그러기에 씨앗들은 다양한 조건에 처해질 수 있다. 복음서들에 공통적으로 전해진 비유를 통해 이 역시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들이 이를 특수집단의 자기이해와 결부시키고 있는 반면 이 본문은 농사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말함으로써 깨달음을 주고 있다. 결실에 이르는 과정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끝내는 자연적 이치를 따라 소기의 목적에 이른다는 것을 말한다.


* 3강(10/11) 불 질러 버려야 할 세상 – 11절 이하, 다음 주간 계속합니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