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05] 네 형제를 네 영혼과 같이 사랑하라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0-25 21:08
조회
58
2023년 하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05
2023년 9월 20일~12월 20일 12주간(휴강주간 제외) 매주 수요일 저녁 7:00~8:30
최형묵 목사

5강 (10/25) 네 형제를 네 영혼과 같이 사랑하라

25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를 자신의 영혼처럼 사랑하고 자신의 눈동자처럼 지키십시오.”
26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그대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합니까? 먼저 그대의 눈 속에서 들보를 빼면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들의 눈 속에서 티를 꺼낼 수 있을 것입니다.”
27 “이 세상 것들에 대해 금식하지 않으면 나라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안식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으면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28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설 곳을 세상으로 정하고,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들이 취해 있음을 보았지만, 그 누구도 목말라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내 영혼은 이런 사람의 아들들로 인해 아파합니다. 이는 이들의 마음의 눈이 멀어 스스로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스스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은 취해 있습니다. 그들이 술을 뒤흔들게 될 때 그들은 생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2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육이 영을 위해 생겨나게 되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영이 몸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은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큰 부요함이 어떻게 이와 같은 궁핍 속에 나타났는지 놀라워할 따름입니다.”
3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 명의 신이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신입니다. 둘이나 한 명이 있는 곳에는 나도 거기 있습니다.”
31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의사가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은 고치지 못합니다.”
32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산 위에 세워지고 요새처럼 된 도성은 쓰러지거나 숨겨지지 않습니다.”
33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귀로 듣게 될 것을 지붕 위에서 [타인의 귀로] 전파하십시오. 누구도 등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나 숨겨진 구석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등경 위에 두어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빛을 보게 할 것입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 Thomas O. Lambdin 외 번역본; <도올도마복음한글역주> 참조

25. (* 유사병행구: 마태 22:39; 마가 12:31; 누가 10:27 // 마태 6:22~23)
*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하고: 매우 익숙한 말씀이다. 이 말씀이 없다면 신앙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것은 깨달음의 결과가 어찌 되어야 하는지를 일러준다. 깨달음은 자기만의 일로 그치지 않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깨달음이 갖는 관계의 차원을 함축한다. 이 진실은 도마복음서를 일종의 ‘자기 수양의 지침서’ 정도로 한정하는 과오를 방지해준다.
* 눈동자처럼 지키라: 도마복음에만 등장하는 표현이다. 눈동자는 모든 것을 보는 관문이기에 우리의 몸은 부지불식간에 눈동자를 보호한다. 어떤 위험에 처하거나 어떤 티끌이 들어갈 수 있을 때 부지불식간에 깜박인다. 그것은 의식적인 의무감으로 행하는 차원(율법주의적 행함)과는 다른 무의식적인 본능의 차원(내면적 일체에서 비롯되는 행위)을 뜻한다. 깨달음이 바로 그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깨우침의 최고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6. (* 유사병행구: 마 7:3~5; 눅 6:41~42)
* 내 눈의 들보와 남의 눈의 티: 앞 구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맨 앞의 내 안의 빛을 강조했던 구절과 연결된다. 남의 허물을 먼저 보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적 성찰이 앞선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눈동자에 장애물이 걸려 있는데, 어찌 다른 사람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흔히 종교 전통에서는 이와 같은 내면적 성찰에 대한 강조가 외부의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오용되고 있지만, ‘세상을 밝히는 내 안의 빛’이라는 도마복음서의 관점에서는 그 논리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혁명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27.
* 세상에 대한 금식, 안식일다운 안식일: 형식적인 종교의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도마복음에서 느닷없이 금식과 안식일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세상 것들’이란 경험하는 세계와 그 세계를 떠받치는 가치체계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금식은 그것으로부터의 절연을 말한다. 여기에 대비되는 ‘나라’의 의미를 생각하면 그 의미는 더욱 분명하다. 곧 현재의 세계와 절연함으로써 전혀 다른 세계를 맛본다는 것을 말한다. 안식일에 관한 말씀은 앞 구절과 같은 의미를 지닌 병행구이다. 안식일을 안식일로 지킨다는 것은 안식의 참뜻을 구현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상의 삶을 중단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새기고 구현하는 계기로서 안식일의 의미이다. 그 뜻을 온전히 구현함으로써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세상 것들을 금식함으로써 나라를 찾게 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된 나라로서 하나님 나라를 맛본다는 것이다.

28.
* 육신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난 예수: 예수께서 사람들과 똑같이 육신을 지닌 존재로 삶을 산 뜻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누구의 보냄을 받은 존재로 말하지 않고 스스로 이 세상을 설 곳으로 선택했다고 한다. 이는 예수께서 스스로 진정한 주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역사적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했을까 의문시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점에서는 그와 같은 의식을 가졌다 할 수 있지만, 스스로 배타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의식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 세상의 사람들로 인해 마음 아픈 예수: 세상 한 가운데 사람들과 더불어 있는 예수는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의 실상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사람들이 깨우치기를 바라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 세상에 온 목적은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려는 데 있지 않고 깨우치려 한 데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의 실상은 마치 술에 취해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이다. 다른 문맥에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취함의 상태(13절)는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취한 상태의 사람들은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있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 이는 세상 것들에 대한 금식과 상통한다.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을 떨치지 못하는 인간 삶의 현실을 말한다. ‘목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진실을 깨우쳐야 할 절실함을 모르는 것을 말한다.
* 의식의 근본적 변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깨어나면 사람들이 의식을 바꾸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메타노이아’는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의식의 변화’ 내지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술을 흔들면’이라는 표현은 탁주를 연상하면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탁주는 흔들어 줘야 제맛이 난다. 영과 육이 혼융될 때 생동하는 삶이 된다는 것을 비유한다.

29.
* 영육의 관계: 영과 육을 나누어 영을 고귀한 것, 풍요로운 것, 그리고 육을 비천한 것, 궁핍한 것으로 보는 통념은 고대 세계에서 일반적이다. 이 말씀은 그 통념에 의존하고 있으나, 영육의 분리 내지는 영에 의한 극복 대상으로서 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육의 혼융을 말하고 있으며, 그 경이로움을 점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육이 영을 위해 있다는 것은 영이 육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영이 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그 몸으로 드러나는 주체성 내지는 각성을 말한다. 영육 혼융의 경이로움은 큰 부요함이 궁핍 속에 나타나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말하는 대목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27절의 속뜻과 상통한다. 곧 세상 것들에 대한 금식은 세상을 떠나 초연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빈곤한 육신에 깃든 영혼의 경이로움이 뜻하는 바다.

30. (* 유사병행구: 마태 18:20)
* 셋, 둘 또는 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이를 삼위일체론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입장도 있으나, 훨씬 후대에 성립한 ‘론’을 대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과연 완전한 문장인지 의심스럽다. 마태의 유사병행구를 보면 ‘셋’이든 ‘둘’이든 ‘하나’이든 모두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셋이나 둘뿐이랴, 하나라도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리스어 대본의 구절과 비교하여 보면 ‘셋’과 ‘하나’ 사이에는 질적인 단절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세 명이 있는 곳에선, 그들은 신과 함께 하지 못한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 있는 곳에선, 나는 말하노라, 내가 그 한 사람과 같이 하리라.’”(도올) 도올은 이를 집단과 개인의 차이로 보고, 깨달음은 전적으로 개인의 차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물론 예수운동이 집단을 거부했다는 뜻은 아니고, 일차적으로 깨달음이란 ‘나’라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곧 집단최면적인 임재가 아니라 개개인의 각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본다. 깨달은 이의 고독한 실존을 강조하는 도마복음서의 맥락에서 볼 때 일리 있으나, 이에 대한 해석은 본문의 원형에 대한 탐구가 더 이뤄져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31. (* 유사병행구: 마태 13:57; 마가 6:4; 누가 4:23~24; 요한 4:43~45)
*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 네 복음서에 모두 유사 병행구가 등장하고 있어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지 않다. 강조점의 차이는 있다. 공관복음서가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사태를 강조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서는 고향에서도 존경받는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도마복음서의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와 그 뜻을 같이하고 있다. 뛰어난 사람이 고향에서 존경받을 수도 있고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기존의 인습에 비춰볼 때 철저히 다른 면모를 지니게 될 때이다. 깨달음은 기존의 인습적 사고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의사의 비유는 예언자의 이야기에 상응한다. 예수는 예언자인 동시에 의사와 같은 분이다.

32. (* 유사병행구: 마태 5:14~15)
* 산 위에서 세워진 도성: 그 의미가 매우 선명하다. 깨달음은 마치 산 위에 우뚝 서 있는 요새와 같아서 무너질 수 없고 숨겨질 수 없다.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은 어떠한 공격에도 견뎌낼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숨겨질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의 당당함 내지는 만천하에 드러나는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도마복음에서 계속되는 비밀스러운 말씀의 의미를 다시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 비밀스러움은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사람들이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예수는 그 사태를 보고 마음 아파한다. 명명백백하고 확고부동한 진실을 어째서 사람들은 알지 못할까?

33.
* 깨친 이의 몫: 바로 앞의 말씀을 보충하는 의미를 지닌다. 이 말씀은 깨달음의 내밀한 차원과 개방적인 차원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깨달음은 내밀하게 이뤄지는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 깨달음의 빛은 저절로 사방으로 펼쳐지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존재 그 자체로 빛을 발하는 상황이다.

* 6강(11/1) 눈 먼자가 눈 먼자를 인도하면... – 34~41절, 다음 주간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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