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06]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1-01 21:58
조회
59
2023년 하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06
2023년 9월 20일~12월 20일 12주간(휴강주간 제외) 매주 수요일 저녁 7:00~8:30
최형묵 목사

6강 (11/1) 눈 먼 사람이 눈 먼 사람을 인도하면

3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35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먼저 힘센 사람의 손을 묶어놓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 그 집을 털어갈 수 있겠습니까?”
36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저녁부터 아침까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37 그의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언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우리는 언제 당신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린아이들처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옷을 벗어 발 아래 던지고 그것을 발로 밟을 때, 여러분은 살아계신 분의 아들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38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하고 있는 이런 말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누구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어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나를 찾아도 나를 볼 수 없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39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들을 가져가 감추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진하십시오.”
4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줄기가 아버지와 떨어져 심어져, 튼튼하지 못하기에 뿌리째 뽑혀 죽고 말 것입니다.”
41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많이 받을 것이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작은 것도 빼앗길 것입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 Thomas O. Lambdin 외 번역본; <도올도마복음한글역주> 참조

34. (* 유사병행구: 마태 15:14, 누가 6:39)
*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은 이 말씀은 예수님 당대의 현실뿐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매우 적절하게 꼬집고 있다. 우선 ‘눈먼 사람’이란 도마복음서 전체 맥락에서 볼 때 ‘깨침을 얻지 못한 사람’, 곧 마음의 눈이 어두운 사람을 뜻한다.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지만, 정말 깨침을 얻은 지도자가 얼마나 될까? 자기반성이 없는 종교에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물론 이 말씀은 비단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사람들 저마다의 내면적 각성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변화되지 않은 자아가 자신을 잘못 인도하는 경우에 대한 성찰을 일깨우는 말씀이기도 하다.

35. (* 유사병행구: 마태 12:29, 마가 3:27, 누가: 11:21~22)
* 도둑질의 비법(?): 말 그대로 보자면 ‘도둑질의 비법’에 관한 가르침이다.^^ 물론 그것은 은유일 뿐이다. 당시 속담일 수도 있다. 도마복음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이 말씀은 깨우침의 비법을 일러준다. 다른 복음서의 병행구들은 축귀(逐鬼)와 관련된 문맥에서 등장한다. 축귀와 관련해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도마복음에서 일관된 깨우침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지 내면적 각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각성을 방해하는 실체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진다. 힘센 사람을 무력화시켜야 그 집에서 보화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진정한 각성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의 실체를 붙들어 매지 않고서는 깨달음의 길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깨우침은 단지 마음의 다스림으로 이르는 것이 아니라 참 마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힘의 실체를 인식하고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힘은 내면화된 욕망으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적 조건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단지 개별적 수행자의 길이 아니라 강렬한 사회참여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으로서 예수운동의 면모를 보여준다. 다른 복음서에서 바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대의 정치사회적 질서를 재가하는 강력한 종교를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36. (* 유사병행구: 마태 5:25~34, 누가 12:22~23)
*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 것: 다른 복음서들의 병행구가 먹을 것까지 포함하고 있는 반면 이 구절은 오직 입을 것에 관해서만 말한다. 다음 구절과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감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상의 삶 가운데서 입는 다양한 ‘옷’을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은, 통념상 인격과 동일시되는 온갖 껍데기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역설한다. 35절이 사회적 관심을 드러낸다면 이 구절은 사회적 무관심을 말하는 셈이다. 도마복음은 이를 단순히 모순관계로 인식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37.
* 언제 당신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와 대면하고 있는 제자들이 예수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이 질문은 다소 뜻밖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당대 팽만해 있는 종말론적 기대에 따라 예수의 재림에 관한 물음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도마복음의 맥락에서는 ‘본질적인 해후’(도올)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부끄럼 없이 벌거벗을 것: 뜻밖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이 구절은 사고의 전환을 역설한다. 물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서 물음을 제기한 당사자의 문제로 전환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볼 수 있는 경우이다. 언제 당신을 볼 수 있느냐는 물음에 여러분들이 옷을 벗어 던져버리고 벌거벗은 상태의 어린아이가 되면 곧바로 볼 수 있다고 답한다. 옷을 벗어버린다는 것이나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도마복음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모티프로서, 무구한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뜻한다. 물론 그것은 ‘퇴행’이 아니라 ‘거듭남’을 뜻한다. 여기서 ‘살아계신 분의 아들’은 중의적 성격을 지닌다. 곧 제자들의 물음이 겨냥하는 예수의 참모습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물음을 던진 제자들이 깨달아 발견한 자신의 참모습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의 내용과 관련하여 볼 때, 결국 현재의 육신의 삶을 떠받치는 조건들을 극복할 때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첫 인간의 모습(창세 2:25), 세례의 의미, 그리고 해탈(解脫)과 상통한다. 이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표상과는 대비된다(고후 5:1~4).

38. (* 유사병행구: 마태 13:16~17, 누가 10:23~24, 17:22, 요한 7:33~34)
* 찾아도 볼 수 없게 되는 때: 이 구절은 긍정적인 시인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듣고 싶기를 갈구했지만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을 지금 당신에게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제자들의 갈구와 동시에 그 요구에 응답하는 예수님의 자신감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혼연일체가 되어 행복한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것이 어긋나는 사태를 말하고 있다. 지금 보고 있으나 장차 보지 못하게 되는 사태는 모든 신화와 종교적 사화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복음서의 다른 병행구들은 이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의 일관된 맥락에서 볼 때, 이는 내적인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길이 어긋나는 사태를 말하는 것이다. 여전히 갈구하고 있으나 그것이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어긋나는 사태를 말한다. 많은 종교인들의 실상이 그런 것 아닐까?

39. (* 유사병행구: 마태 23:13, 누가 11:52)
* 깨달음의 열쇠: 도마복음서는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유대인 지도자들을 적대적으로 언급한 경우(이 구절과 102절)가 매우 드물다. 이 구절 역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겨냥하는 것은 제자들이다. 어쨌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잘못이 무엇인지 헤아려야 할 것이다. 그들의 잘못은 깨달음의 열쇠를 감추고 있어 자신들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깨달음에 이르려는 사람들도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열쇠를 감췄다는 것은 아예 무지하다는 것은 아니다. 알고 있으되, 알고 있는 그것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식의 독점과 은폐를 말한다. 세속적 이익과 이기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종교적 열정과 순종을 역설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가르치지 않는 종교를 말한다. 그 길을 가로막는 것은 가로막는 자들 역시 그 길을 걷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존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과오에 빠지지 말 것을 역설한다.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진함으로써 그 길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뱀과 비둘기의 상징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뱀은 지혜와 생명력, 그리고 거듭남을 상징한다. 비둘기는 순결과 평화 등을 상징하지만 성서에서는 곧잘 성령을 상징(누가 3:22, 마태 3:17)한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거듭남으로 순결한 상태에 이르는 깨달음을 말한다.
* 나그함마디 문서 가운데 <빌립복음서>의 한 대목: “믿음은 우리의 토양, 우리가 거기에 뿌리를 내리고, 소망은 우리의 물, 우리가 그것으로 양분을 얻고, 사랑은 공기, 우리가 그것으로 자라고, 깨침은 빛, 우리가 그것으로 익게 됩니다.”(79:25~31)

40. (* 유사병행구: 마태 15:13, 요한 15:6)
* 아버지와 떨어진 포도나무: 근원적인 주체와 분리된 개별적 주체의 실상을 말한다. 다른 복음서의 병행구들도 그 근본 뜻에서는 도마복음의 이 구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마태복음의 경우 이 말이 바리새인들을 겨냥하고 있는 반면 도마복음서는 제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그런 사태에 이르지 않도록 경계하는 교훈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게 되는 사태이다.

41. (* 유사병행구: 마태 13:12, 마가 4:24~24, 누가 8:18 // 마태 25:29, 누가 19:26)
* 가진 사람은 더 많이...: 다른 복음서에도 등장하는 유사병행구는 심각한 논란꺼리이다. 그것이 만일 일상의 물질적 삶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면 공평을 부정하는 것(‘부익부 빈익빈’)이 된다. 더욱이 달란트의 비유(마태) 또는 므나의 비유(누가)와 같이 돈놀이와 결부되었을 때 그것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은 현실의 실상을 비유로 삼아 어떤 교훈을 일깨우는 것인지 현실의 실상을 고발하는 것인지 논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어떤 정황에 대한 묘사 없이 그저 ‘말씀’으로 등장하는 도마복음의 이 구절은 오히려 불필요한 논란의 여지없이 곧바로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도마복음의 일관된 맥락에서 볼 때 깨달음이 갖는 어떤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다. 질적인 단절이다. 겉으로 보기에 깨달음의 정도의 차이, 곧 더 많이 깨닫고 더 적게 깨달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 차원에서 근본적 차이(유무)가 있다는 것을 이르는 말씀이다. 점화되어 곧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이내 사그라드는 불꽃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어줍잖은 성찰, 깨달음으로 자만에 빠지지 말고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도록 정진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 7강(11/8) 나그네가 되어라 – 42~53절, 다음 주간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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