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08] 어디서 왔느냐고 묻거든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11-29 21:32
조회
261
2023년 하반기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도마복음 다시읽기 08
2023년 9월 20일~12월 20일 11주간(휴강주간 제외) 매주 수요일 저녁 7:00~8:30
최형묵 목사

8강 (11/29) 어디서 왔느냐고 묻거든

50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거든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우리는 빛에서, 빛이 스스로 생겨나 확고히 되고, 그들의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 그곳에서 왔다.’라고. 그들이 여러분에게 ‘그것이 너희냐?’ 하고 묻거든 이렇게 말하십시오. ‘우리는 그[빛의] 자녀들로서, 살아계신 아버지의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그들이 여러분에게 ‘너희 속에 있는 너희 아버지를 입증할 증거가 무엇이냐?’ 하고 묻거든 그들에게 말하십시오. ‘그것은 움직임과 쉼’이라고.”
51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언제 죽은 사람들의 쉼이 있겠으며, 언제 새 세상이 이르겠습니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것이 이미 와 있지만, 여러분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52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스물네 명의 예언자들이 말했는데, 그들이 모두 주님에 대해 말했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과 함께 있는 산 사람은 무시하고 죽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53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할례가 쓸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할례가 유익했다면 아이들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배에서 이미 할례받은 아이들을 출산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받는 참된 할례가 모든 면에서 유익합니다.”
54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늘나라가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55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미워하지 않는 이들은 내 제자가 될 수 없으며, 자기 형제자매들을 미워하고 내가 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않으면 내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56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알게 된 사람은 시체를 찾은 사람입니다. 시체를 찾은 사람은 세상보다 더 값진 사람입니다.”
57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좋은 씨를 가진 사람과 같습니다. 밤에 그의 원수가 와서 좋은 씨 사이에 가라지 씨를 뿌리고 갔습니다. 농부는 일꾼들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까 걱정입니다. 추수 때가 되어 가라지가 드러나게 될 때 뽑아 불 태울 것입니다.’”
58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픔을 겪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생명을 찾았습니다.”
- 오강남, <또 다른 예수>; Thomas O. Lambdin 외 번역본; <도올도마복음한글역주> 참조

50.
* 어디서 왔느냐고 묻거든: 선문답 또는 교리문답과 같은 형식의 대화로서, 앞의 구절과 그 의미가 직결되고 있다. 사람은 본시 빛에서 왔고, 빛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선택을 받았다. 여기서 앞 구절의 ‘나라’가 ‘빛’으로 대치되었을 뿐 그 의미는 상통한다. 도마복음서에서 빛의 모티프는 자주 강조되지만, 여기서는 깨달은 인간의 역할을 지시하는 차원을 넘어 인간의 본성 자체를 함축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만이 배타적 의미에서 빛의 아들이 아니라 따르는 무리들, 나아가 인간 자체가 빛의 자녀라는 의미이다. 스스로 존재하고 자립하는 빛의 성격은 앞 구절에서 말한 단독자와 같은 의미이다. ‘나는 나’(출애 3:14)를 연상시킨다.
* 움직임과 쉼: 빛의 자녀라는 사실, 아버지가 임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표는 움직임과 쉼이다. 아주 명쾌하다. 움직임과 쉼은 생명활동의 기본적인 양태로서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창조세계의 원리를 말한다. ‘동(動)’과 ‘정(靜)’이 조화를 이룬 상태로, 그것은 곧 살아 있다는 것의 실상이다. 그것이 비단 몸뚱어리가 살아 있다는 것만 말할까?

51. (* 유사병행구: 누가 17: 20~21, 요한 5:24~25)
* 진정한 쉼과 새 세상: 앞 구절의 움직임과 쉼에 관한 이야기는 이 구절에서 진정한 쉼과 새 세상에 대한 기대로 연결되고 있다. 여기서는 쉼이 강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지금 세상의 삶이 쉼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반증한다. 그래서 새 세상에 대한 기대는 쉼이 보장받는 것으로 표현된다. 제자들의 물음에서 ‘죽은 사람들의 쉼’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말한 당시의 통념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쉼이 없는 사람들의 삶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앞 구절과의 의미 연관이 더욱 뚜렷해진다.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예수의 답은 지금 그 새로운 세상이 와 있지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실현된 종말론’에 해당한다. 이 말씀은 지금 당장 스스로의 삶을 온전히 향유할 것을 말한다. 그 어떤 것으로도 유보될 수 없는 삶에 대한 강조이다.

52.
*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사람: 앞의 구절이 미래에 저당 잡힌 삶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 구절은 과거에 사로잡힌 삶과 관련되어 있다. 24 예언자는 히브리성서 분류법에 따른 숫자에 해당한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단절성에 관한 문제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논란의 대상이다. 여기서는 단호하게 단절을 말하는 측면이 두드러진다. “첫번째 언약에 결함이 없었다면 두 번째 언약이 생길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히브 8:7). 어떤 외적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지금 스스로 살아있는 사람을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다.

53. (* 유사병행구: 로마 2:28)
* 할례의 무용성: 할례는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식. 기도, 금식, 구제를 배격할 만큼 도마복음서는 일관되게 형식적인 종교의식을 거부하고 있다. 할례가 유익한 것이라면 뱃속에서부터 받게 했을 것이라는 대답은 유머가 깃든 대답이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할례, 곧 진정한 거듭남이다.

54. (* 유사병행구: 마태 5:3, 누가 6:20)
*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니: 누가복음, 마태복음에도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씀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한 마태복음과 다른 누가복음과 같은 문구이다. 누가복음이 더 본래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누가복음이 말하는 가난은 절대적 빈곤을 말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말씀 또한 굳이 왜곡이라 보기는 어렵다.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를 소유한다는 것은 재물의 소유 여부를 따라서가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삶을 직시하고, 삶의 가치와 행복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더욱이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예수님의 근본 메시지는 재물에 의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지어진다는 세상의 통념을 전적으로 배격한다. 모든 종교의 근본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를 거스르는 종교생활은 근본부터 잘못되었다. 근본부터 잘못된 종교가 주류가 된 현실을 어찌할까?

55. (* 유사병행구: 마태 10:37, 누가 14:26)
* 출가: 정말 부모와 형제자매를 미워해야 하는 것일까? 금식, 기도, 구제를 금지한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헤아릴 필요가 있다. 부모와 형제자매는 평범한 삶의 원초적 기반, 곧 ‘집’에 해당한다. 일상적인 것, 인습적인 것, 의문의 여지없이 당연시되는 모든 것을 표상한다. 그 집은 이기적 자아의 온상일 수도 있다. 예수의 길은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 곧 출가를 뜻한다.
* 십자가: 예수가 훗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사실을 예언한 것이라 볼 필요는 없다. 당시 십자가는 누구나 알고 있는 고통의 표상이다.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의 난에 대한 십자가 처형, 기원전 4년 헤롯대왕이 죽었을 때 신권통치를 요구한 유대인들에 대한 십자가 처형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가족을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큰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나선 사람들이다.

56.
* 시체와 같은 세상: 앞에서 형식인 종교와 재물과 가족을 버릴 것을 요구한 데 이어, 이 대목에서는 그 모든 것을 집약하는 의미로 그러한 것들로 떠받쳐지는 세상을 시체와 같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이것이 물질적 세계의 부정, 염세주의, 도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에 대한 거부요 영적인 거듭남의 안목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을 뜻한다. ‘상여행렬을 보고 나면 재수 좋다’는 속설에 담긴 뜻을 새겨봄직하다.

57. (* 유사병행구: 마태 13:24~30)
* 좋은 씨와 가라지의 공존: 마태복음과 병행하는 구절로, 마태복음이나 도마복음 모두 일반적 상식에는 어긋난다. 좋은 씨앗의 새싹과 가라지의 새싹은 노련한 농사꾼에게는 확연하게 구별되고 따라서 가라지를 골라내는 것이 상례이다. 이 구절은 그런 상례를 벗어나 마지막 추수 때까지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물론 마태복음에는 종말론적 긴박감이 배어 있으나 도마복음에는 그런 긴박감마저 없다. 선과 악을 구별하고 악을 서둘러서 일소하려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으로 여유로움을 강조하는 듯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모든 것이 판별되는데 어찌 서두르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하고, 우리는 그 이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악을 일순간에 뿌리 뽑고 싶지만, 그로 인한 혼란과 고통 가운데서 더욱 성숙해지라는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선악과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마녀사냥’, ‘빨갱이/종북세력/반국가세력 척결’을 시도하는 이들과 같은 태도를 경계하는 말씀이다.

58.
* 아픔과 생명: 이 구절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 마태복음의 구절(5:10~11)과,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 때문에 배척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 누가복음(6:22)의 구절을 연상시킨다. 이 두 경우는 명백히 외부의 핍박으로 인한 고통을 말하는 데 과연 도마복음이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도마복음의 이 구절은 보다 일반적인 인간의 실존적 정황을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해산의 고통 이후에 따르는 생명의 탄생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참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한 여정에서 동반되는 수고로움을 뜻한다. 어떤 종류의 아픔이든 그 아픔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아픔을 자각한다는 것은 그 아픔을 극복한 삶의 전망을 찾아 나서게 하는 계기이다. 나그네로서의 삶의 의미를 이렇게 일단락짓고 있다.

* 9강(12/6) 있을 때 잘 해야 – 59절 이하, 다음 주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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