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세계 교회사 10] 중세 유럽의 민간신앙과 마녀재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09-21 21:48
조회
1799
천안살림교회 2011년 수요 성서연구

기독교의 역사 1 - 세계 교회사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 2011년 9월 21일 / 최형묵 목사



제10강 중세 유럽의 민간신앙과 마녀재판



1. 마녀소동 / 마녀재판


13세기(1275년 최초의 마녀재판)에 시작되어 18세기(1714년 법률로 금지, 그러나 실제로는 1775년 최후의 마녀재판)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마녀 재판은 말 그대로 ‘광기의 역사’였다.

처음에 마녀재판은 ‘이단’에 대한 정죄의 수단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종교적 의미의 이단만이 아니라 비종교적 차원의 ‘이단자’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져(교회와 국가기관의 결합-이단심문관/관료/사냥꾼), 16~17세기에 이르러 유럽 전역에서 광적인 소동으로 확산된다: 프랑스지역의 경우 예> 1557 툴루즈 40명, 1582 아비뇽 18명, 1581~91 로렌 900명, 1609 4개월 400명 / 독일지역 예> 1572 토리아 5명, 1587~94 330명이상, 17세기초에 이르러는 수천명씩, 1631~36 어떤 지역에서는 300명 주민 가운데 절반, 밤베르크 1,600명. 뷔르츠부르크에서는 3~15세의 어린이도 포함 / 미국에서는 1692년에 절정.

그 대상도 처음에는 늙은 여인들, 산파, 유랑자, 거지들, 떠돌아다니는 도제들, 하루벌이 노동자들에서 급기야는 명문귀족의 딸들, 공무원, 사제, 수녀, 여자상인들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마녀로 혐의를 뒤집어쓰는 그 이유도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며, 자백을 강요하기 위한 참혹한 고문의 방법 또한 다양하고 어처구니없었다.

            

2. 마녀소동이 벌어진 까닭?


마녀사냥의 공식적 이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순수성 혹은 그리스도교적 세계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사탄의 세력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그리스도교 세계는 사실 마녀사냥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그 사회질서 내에서 ‘이단자들’을 규정하여 배제해 왔다: 이단자, 문둥병환자, 유대인, 마법사, 남색가, 불구자, 이방인, 낙오자.  

그러나 마녀사냥이 유독 16~17세기에 광적인 상태에 이른 현상과 그 실질적 결과를 주목해야 한다. 이 시기 유럽은 한편으로는 길고 참혹한 전쟁과 종교개혁의 후유증으로 무력감이 만연해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농촌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때였다. 한마디로 중세적 그리스도교 유럽 세계가 동요하고 있던 시기였으며, 그 과정에서의 사회적 불안이 증대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염병과 굶주림, 흉작과 가축의 떼죽음 등은 어둠의 세력에 의해 저질러지는 일이라는 믿음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서 지배세력은 동요하는 사회질서와 불안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을 찾고자 했고 그 결과가 광적인 마녀사냥으로 이어졌다. 무질서와 사회적 해악의 책임을 ‘마녀’라는 희생양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3. 유럽의 민간신앙과 마녀사냥의 희생자들


마녀 사냥이 광적인 지경에 이르렀을 때 희생의 대상은 거의 무차별적이었지만, 본래 마녀 사냥의 가장 주된 희생자들은 농촌사회의 나이든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민간요법과 민간신앙의 전수자들이었고, 많은 경우 농촌사회에서 치료자로서 산파로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었다. 마녀 사냥이 진행될 때 이들은 특별한 악마적 의식(마녀제의)를 치르는 것으로 음해받았으나, 실제로 마녀제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어느 전통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민간의식(치유, 출산, 농경주기와 관련된)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은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와는 달리, 그리스도교적 양식을 취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개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한 지역의 공식적 교회의 성직자들만큼 많았으며, 공식적 교회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회 구석에서 사람들에게 지혜를 가르치고 문제를 해결하며 사회 자체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대개 노동력이 없는 상태에서 외롭게 살았던 이들은 이러한 역할을 통해 농촌공동체의 부양을 받음으로써 실질적 구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말 그대로 ‘마녀’라고 일컬어지는 경우에조차도 이들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은 결과적으로 그들을 보호함과 아울러 농촌사회 사회 자체를 보호하는 효과를 가져 왔다(마녀소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그러나 마녀사냥은 이들의 역할을 해체함과 더불어 농촌사회 자체를 급격히 와해시키는 결과를 빚는다. 그 결과 이어진 세상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경쟁이 지배하는 메마르고 거친 사회였다.


4. 오늘도 되풀이되는 마녀 사냥


불행하게도 마녀 사냥이라는 광기의 역사는 오늘도 되풀이 되고 있다. 하나의 기준으로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려는 태도,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틀 안에 우겨넣으려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마녀사냥’과 다를 바 없는 태도이다.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문화는 ‘차이’를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사람이 같아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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