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성찰하는 교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1-04-19 19:34
조회
2491
* <주간 기독교> 다림줄 14번째 원고입니다(110419).


성찰하는 교회


지방의 작은 도시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 교회에 요새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제법 오래 전부터 이야기가 솔솔 피어나오던 인문학 강좌를 봄의 시작과 함께 열었다. 솔직한 기대로 그저 여남은 명이 모여 꾸준히 공부할 수 있다면 의미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역 청소년과 일반인을 망라하여 수십 명이 모이기 시작했고, 회를 거듭하고 있는데도 열기가 지속되고 있다. 참가자 가운데서는 많은 분들이 ‘교회에서 좋은 일 한다’고 덕담을 건넨다. 그러고 보니 어쩌자고 교회가 그런 일을 벌였는지 변이 없을 수 없다.


교회에서 가장 중시되는 미덕은 두말할 나위 없이 ‘믿음’일 것이다. 교회 안에서 그 믿음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최고의 미덕으로서 모든 것에 대한 가치판단 기준이다. 그런데 얄궂게도 교회가 그렇게 믿음을 강조하고 있건만 오늘날 그 교회를 향한 세간 사람들의 믿음은 바닥을 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그 두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전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서 ‘신앙’에 해당하는 반면 후자는 인간들 사이의 믿음으로서 ‘신뢰’에 해당한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다르다는 것만 강조되는 가운데 정작 중요한 믿음의 요체가 간과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말은 어떤 경우든 ‘믿음’으로 말하고 있거니와, 그리스도교 믿음의 요체로 보더라도 그 두 가지 차원은 상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믿음은 맹목적 순종이 아니라 상호간의 소통을 근본적인 요체로 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과의 소통을, 인간들 사이의 믿음은 인간들 사이의 소통을 뜻한다. 성서는 두 가지 차원을 별개로 이야기하지 않고 항상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야기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말하고 있고, 신앙과 윤리를 하나로 말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일반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교회가 일반 사람들과의 소통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그것은 교회가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믿음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소통으로서 믿음을 추구하기보다는 일방통행식 욕구의 반영을 곧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부재가 세간에서의 교회에 대한 믿음의 부재로 귀결되고 있는 셈이다.


믿음이 상호간의 소통을 요체로 하고 있다면 그 믿음은 맹목적 성격을 띠기보다는 깊은 자기 성찰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돌아보는 성찰을 동반한다. 그 점에서 교회가 믿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더 깊은 성찰과 함께 소통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지역의 다른 단체들과 협력하는 가운데 인문학 강좌를 성사시켰고, 또한 참여하는 이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의의를 찾고 있겠지만, 교회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믿음의 요체에 해당하는 소통의 능력을 갖춘 성찰하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데 그 뜻을 찾고 있다. 믿음이 오용되고 있는 이 시대에 성찰하는 교회상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이 아닐까.


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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