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출애굽기 03] 이중적 정체성의 주인공 모세의 출생과 성장 - 2:1~25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8-05-01 00:37
조회
2483
천안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1 <출애굽기 읽기>  

2008년 4월 16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3 (4/30) 이중적 정체성의 주인공 모세의 출생과 성장(2:1~25)


1. 이집트의 왕자 모세(2:1~10)


모세의 탄생은 비극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오래 전에 기근을 피해 이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정착하였다. 이주민으로서 총리를 맡았던 요셉과 그 세대가 죽은 다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살며 번성하였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파라오가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은 시련을 겪게 된다. 새로운 파라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험세력으로 간주하여 강제노역을 시켰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조직적인 유아학살을 감행한다. 모세가 태어난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 비극의 역사는 모세에게 끊임없이 정체성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게 만드는 근본 배경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의 운명을 예고한다.

강물에 내던져 죽을 운명에 처했던 히브리인의 아들 모세는 현명한 누이와 어머니 덕에 목숨을 건진다. 파라오의 공주에게 발견된 모세는 이제 히브리인의 아들이 아니라 이집트의 왕자로 다시 태어난다. ‘히브리인의 아들’로서 모세와 ‘이집트의 왕자’로서 모세는 어울릴 수 없는 양극의 대립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혼용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히브리’는 사실은 서로 다른 개념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적 집단을 일컫는 말이라면, ‘히브리’는 그 민족 이전에 고대 중동 사회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하층민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노예, 용병, 떠돌이들을 포함한 하층 계급을 일컫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의 민족 집단으로 존속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하층 계급을 모체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 히브리는 거대한 전제왕권 국가 이집트 사회의 최하층 집단이었다. 모세는 그렇게 최하층에서 최상층으로 존재 이전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모세에게 ‘히브리인의 아들’은 잊혀진 과거가 아니었다. 모세는 파라오 공주의 양아들이 되지만, 유모가 된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다. 모세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모순된 존재였다. 모세 자신이 그 사실을 자각하지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마도 그는 궁중의 안락함을 향유했을 것이고, 장차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리라는 기대를 안고 있었을 것이다.

* ‘모세’라는 이름 자체도 이중적이다. 본래 그 이름은 이집트식이다. 후대 히브리적 해석은 이 이름이 ‘건져내다’,‘끌어내다’(‘마아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하지만(출애 2:10), 본래 이 이름은 전형적인 이집트 이름 ‘...의 아들’ 또는 ‘...를 통해 태어난’을 뜻한다(예> 투트모세 Thutmose: 지혜의 신 Thot의 아들).


2. 낯선 땅의 나그네(2:11~25)


그러나 어느 날 모세는 강제 노역을 하는 히브리인이 공사 감독에게 매를 맞는 장면을 목격한다. 의분에 찬 모세는 이집트인 공사 감독을 처 죽였다. 이 사건은 모세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한 첫 번째 사건이다. 그 때까지 모세는 이집트인이면서 동시에 히브리인으로서 이중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 정반대로 진짜 이집트인도 아니면서 히브리인도 아닌,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한 모호한 주변인, 경계인으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받는 히브리인의 편에 서는 선택을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비로소 자각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아무런 문제의식을 지니지 않고 살아갈 때에는 잘 모르지만, ‘내가 누구인가?’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그 정체성을 자각하게 될 경우 대개 기쁨에 앞서 진통을 겪게 되어 있다. 모세의 경우는 이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당장 그는 이집트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왕자에서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여 한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성서에서 광야는 언제나 시련을 상징하며, 우물은 목숨을 상징한다. 모세의 이중적 모순은 이제부터 더욱 분명해진다. 그것은, 어디에 몸 붙일 곳 없는 도망자의 신세로 시련을 겪어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련의 고통이 큰 만큼 일상의 유혹이 또한 강렬할 수밖에 없는 모세의 존재 조건이었다.

광야의 우물가에 앉아 있는 모세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 낯선 나그네가 한 지역의 주민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곳으로서 우물가의 이야기는 성서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우물가에 사람들이 모일 때에는 단순히 만남이 있고 좋은 일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 우물가에 서로 다른 집단의 사람들이 마주치게 되면 충돌 또한 자주 일어났다. 물이 흔치 않았을 그곳에서 서로가 자기들이 더 많은 물을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모세가 마주친 상황이 그런 것이었다. 미디안의 사제(르우엘 / 혹은 이드로)의 딸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데, 목자들이 와서 내쫓으려 했다. 바로 이 때 우물가에 앉아 있던 모세가 나타나 미디안 사제의 딸들을 도와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했다. 그 사실을 안 사제는 모세를 대접하고 같이 살도록 했으며 급기야는 딸 십보라와 결혼까지 시켜 주었다. 이렇게 하여 모세는 미디안에 머물며 아들까지 낳게 되었다. 그 때 그 아들의 이름을 ‘낯선 땅의 나그네’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게르솜’(게르=나그네)이라 하였다.

사실 이 이야기는 모세의 그 엄청난 업적에 비하면 쉽게 지나쳐버려도 그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냥 스치듯 지나쳐야 할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훗날 민족 해방의 지도자로서 모세가 있게 한 중요한 계기를 시사한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 이른 때가 나이 사십이었고, 거기서 다시 사십 년을 살았다(사도행전 7:23). 모세는 바로 그 광야에서 사십 년이 지난 훗날 신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고, 다시 이집트에서 탈출한 무리를 이끌고 나오는 중에 신의 계명을 받았다. 모세가 그와 같은 체험을 통해 민족 해방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었던 계기가 사실은 광야에서의 삶이었다. 특별히 그 광야에서 나은 자식의 이름을 짓는 데서 모세의 자의식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십보라가 아들을 낳자 모세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하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그와 같은 뜻을 지닌 ‘게르솜’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말은 단순한 푸념이요 신세 한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순간적인 푸념이나 신세 한탄일 수 없는 까닭은, 바로 그런 처지를 자식의 이름으로 남겨 두고두고 기억해 두려고 했다는 데 있다. 우리의 경우나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 뿐만 아니라 어느 민족의 경우든 이름을 짓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별히 중요성을 지니는 그와 같은 이름짓는 일을 통해 현재 자신의 처지를 각인시켜 두는 행위는 예사로운 행위가 아니라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행위이다.

어떤 목적의식일까? 그것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작업이다. 다시 말해 지금 자기가 있는 자리가 어떠한 곳인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행위다. 모세는 끊임없이 이러한 자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자리,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지금 이 자리가 ‘내 자리인가, 아닌가’ 이 둘 가운데 하나의 답변을 구하려는 것이다. 그 자리가 자기 자리라면 지금 그 자리에서 걸맞는 일을 더욱 충실히 해야 할 것이요, 그 자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자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 모세가 낯선 땅의 나그네로 전락해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있는 것은, 그 자리가 자기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경우에 해당한다. 모세의 미디안 사십 년 생활은 단순한 안주나 정착이 아니었다. 거기에서도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변인으로서 경계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자기가 택한 히브리 백성과 더불어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몸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양떼를 거느리고 처자식을 거느리게 된 모세에게 ‘낯선 땅의 나그네’로서의 의식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영영 그 지역에서 성실하고 이름난 목자가 되었을지 몰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로 지금 주어진 일상에 매몰되어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이 그의 생활을 지배하였고, 그랬기에 어느 날 정말 그가 가서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일깨워 주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 다음 주제는 “모세의 소명”(출애굽기 3:1~2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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