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서평] 인민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라바를 원한다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9-08-03 23:15
조회
3743
*<진보평론> 41호[2009. 가을호] 서평 원고입니다(2009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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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라이히 지음 / 윤수종 옮김, 『그리스도의 살해』,  전남대학교출판부, 2009. 서평


인민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라바를 원한다.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천안살림교회 목사)



1.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이라는 극시를 보면, 16세기 어느 날 스페인 세빌랴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 현장은 바로 전 날, 소위 신의 영광을 위하여 백 명에 가까운 이교도들이 화형에 처해진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1500년 전의 초라한 모습 그대로 그 현장에 나타난다. 바로 어제 이단자들을 처형한 장본인인 대심문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여 심문한다. “너는 필경 우리를 방해할 목적으로 이 곳에 나타난 것임에 틀림없어! ... 나는 내일 너를 재판에 회부하여 극악무도한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 버리고 말 테다. ... 그러면 오늘 너의 발밑에 입을 맞춘 사람들이 ... 너를 태우고 있는 불더미 속에 장작개비를 던질 것이다.” 대심문관은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받은 세 가지 유혹에 인생사의 모든 문제가 응축되어 있다고 보며 과연 그리스도와 악마 사이에서 누가 옳은지 따진다.

첫 번째로, “너는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돌멩이들을 빵으로 만든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봐라! 본래 비천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하늘의 빵과 자유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 자유를 두려워하며 견디기 어려워한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들을 노예로 삼아도 좋으니 제발 먹을 것을 달라고 외친다. 너는 어리석게도 그 외침을 외면하고 말았다. 결국 지상의 빵을 버리고 되지도 않는 천국의 빵과 자유를 약속해서 사람들에게 헤어나지 못할 무거운 짐만 지워준 거 아니냐?”고 심문한다.

대심문관은 두 번째 유혹과 관련해서 말한다. “인간을 다스릴 힘은 이 지상에 세 가지 힘 밖에 없다. 기적과 신비와 권위다. 악마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고 했을 때 너는 과연 그리스도답게 그것을 물리쳤지만 그 유혹을 물리칠 힘이 다른 보통 사람들에게도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인간의 본성이란 기적을 부정하게끔 되어 있지 않다. 특히 생사에 관한 무서운 순간에는..., 가장 심각하고 가장 괴롭고 가장 근본적인 의혹의 순간에 자기의 자유로운 양심의 결정에 따라서 행동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인간이 기적을 원하지 않을 때 인간은 신까지 동시에 부정하려 든다는 것을 너는 몰랐다. 한마디로 너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 했다. 인간은 본래부터 반역자이면서도 또한 노예라는 것을 몰랐어, 잘 판단해 봐라!”

마지막으로 대심문관은, 권력의 유혹을 물리친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한다. “케사르의 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데 왜 그걸 물리쳤느냐? 인간은 숭배할 가치가 충분한 사람과 양심을 맡길 만한 사람, 그리고 지상의 모든 인간이 오직 하나로 개미처럼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이 고민이야말로 제3의 고민이자 동시에 마지막 고민이다. 케사르의 자주 빛 옷을 수중에 넣었을 때 비로소 세계적 왕국을 실현할 수 있고 인류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인간의 양심을 지배하고 빵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만이 인간을 지배한다. 그래서 우리는 케사르의 검을 잡았다.”

대심문관은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그와 같은 일을 잘 해왔는데, 이제 네가 나타나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고 심문한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너무나 고상하게 평가하고 기대하는 바람에, 소수의 사람들 밖의 대다수 사람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허황한 길을 제시해 부담만 안겨 줬다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심문에 한 마디 대꾸하지 않은 그리스도는 오히려 대심문관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몸을 부르르 떤 대심문관은, 문을 열어 제치고 ‘죄수’에게 외친다. “자 가거라, 그리고 이젠 다시 이곳에 나타나지 마라...,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라...영원히!”


2.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1세기 갈릴리에서 삶을 살았던 예수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학에서 새삼스러운 문제꺼리가 아니다. 물론 현실에서 지배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여전히 교리상의 예수 그리스도와 실제 예수 사이의 불일치를 인정하지 않지만, 기독교 신학에서 그에 대한 의문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이른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그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계몽주의 시대 합리주의적 사고는 ‘교회만이 지식의 유일한 대리인’이라는 중세적 사유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그와 같은 사유를 공유한 기독교 신학은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물음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 방법론적으로 주로 문헌비평에 의존하였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18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동안 수많은 예수전을 쏟아 냈다. 그러나 그렇게 재건된 예수상은 실제 역사의 예수라기보다는 저자들의 당대적 이상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알버트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의 주장으로 역사적 예수에 관한 탐구는 사실상 파산선고를 당한다.

이후 문헌비평의 한계를 넘어 문헌형성 이전의 구술전승의 양식을 규명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러한 시도는 예수의 생애를 전하는 복음서의 구술양식이 헬레니즘화된 초기 기독교 교회의 산물이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복원 과제는 결정적 난관에 봉착한다. 이러한 난관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사회적 위기와 맞물려 신학의 중대한 위기로 받아들여졌다. 인간 사회의 악마성을 통감하게 한 역사적 위기 가운데서 뭔가 확실한 ‘신적 개입’이 요구되었지만, 신적 개입의 역사적 근거인 인간 예수는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는 이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법론상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접근 불가가 곧 신앙과 신학의 위기일 수 없다는 인식의 전환 계기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을 통해 나타난다. 불트만은 실존적 깊이의 차원에서 신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였으며, 초기 기독교의 문헌상에 나타난 신화적 외피를 걷어냄으로써 오늘 우리와 예수는 실존적 차원에서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불트만의 이러한 시도는 단순히 과거의 예수를 복원하는 데 그치고 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물음과는 달리 예수를 ‘오늘 여기’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오늘의 실천에 개입하는 신학적 인식의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실존주의 신학은 역사 내에 존재하는 인간의 문제를 유예시킴과 아울러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를 사실상 폐기시켜 버리고 말았다.

1950년대 들어 전후 세계 재건과정의 활기와 더불어 역사적 물음이 부활하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도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전에 비해 방법론상 별다른 진전은 없었고, 다만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자료로 예수의 ‘말’을 검증하기 위한 보다 엄밀한 기준이 제시되는 정도였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전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예수 르네상스’로 불리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의 본격화이다. ‘예수 르네상스’의 배경에는 1970년대 이후 활발해진 학제적 연구의 성과가 자리잡고 있다.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는 역사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문화인류학과 고고학, 비교종교학 등과의 만남을 통해 방법론적 진전을 이룩한다. 이 방법론상의 진전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의 초점 또한 변화시킨다. 이전에는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는 데 가장 신빙성 있는 근거로 예수의 ‘말’을 규명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나, 이제 사회역사적 세계를 통해 예수를 조명하게 된 것이다. 사회역사적 세계를 통해 예수를 조명한다는 것은, 예수를 단순한 개체적 인격으로서보다는 주변의 맥락과 결합되어 있는 사회역사적 존재로 보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 신학에서 ‘예수운동’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식과 관련된다. 그것은 예수 개인의 행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관계 안에서 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일으킨 일련의 운동을 말한다. 역사의 예수에 관한 탐구의 이와 같은 성취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바로 제3세계의 민중운동 그리고 이와 더불어 전개된 새로운 신학운동 및 서구의 급진적 신학운동의 영향이다. 이러한 운동은 ‘오늘 여기’의 ‘갈등’의 문제를 ‘신학하기’의 전면에 내세우며 그것을 역사의 예수에 적용하도록 고무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늘 여기’와 ‘그때 거기’를 통합하는 문제설정이 가능해졌다. 불트만이 실존적 차원에서 강조했던 이 양자의 만남이 오늘 새로운 신학적 인식에서는 역사의 차원에서 재현된 것이다.


3.

정작 서평보다는 객담이 길어졌다.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의 시도가 신학자의 눈에 비단 새삼스럽거나 낯선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변증하려다 보니 그리 되었다. 하지만 단지 그 점을 변증하려고 했던 것만은 아니다. 교회에서 가르치고 믿고 있는 예수와는 다른 예수에 대한 탐구의 계보에서 라이히의 시도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가늠해보기 위해서라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 과정을 개괄해보는 것은 필요했다.

라이히의 『그리스도의 살해』는 기독교 신학 내에서 역사의 예수 탐구 계보와 무관하지 않지만 직접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예수 탐구의 ‘외전’(外傳) 가운데 하나쯤이라고 할까? 라이히는 19세기 르낭(Ernest Renan)의 『예수전』을 간간히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 예수 탐구 전사(前史)를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서 라이히의 시도는 기독교 신학 내의 역사적 예수 탐구 계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방법론상으로나 신학적 전제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예수 탐구 계보와 직결되어 있지 않다. 역사적 예수 탐구가 성취한 방법론적 도구들을 사용하지도 않으며 신학자들의 논제에 매이지도 않는다. 그의 방법은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서두에 언급한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문학가들의 문학적 상상과 통찰에 가깝다. 그 까닭에 당연히 신학자들이 마치 목숨이라도 건 듯이 매달리는 논제들에 매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라이히의 시도가 갖는 의의가 과소평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상상과 통찰이 더욱 빛난다.  

그리스도의 ‘살해’라는 제목은 거꾸로 ‘삶’을 강력히 시사한다. 라이히는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 대신에 이천년 전 팔레스타인 갈릴리에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을 환기하고 있다.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것은 과거의 한 인물을 복원해내고자 함이 아니다. 오늘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되살려 놓고자 함이다. ‘그리스도의 살해’는 이천년 전의 특정한 사건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진정한 삶의 거부 곧 스스로의 삶에 대한 죽임을 뜻한다.

라이히는 그의 독특한 ‘오르가즘론’, 여기에서 더 발전한 ‘오르곤론’을 이 문제설정의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스도의 살해는 삶 기능의 핵심인 오르가즘 기능을 부정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라이히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독특한 이론적 전제 자체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제대로 된 서평을 위해서도 그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일 것이다. 하지만 라이히의 사상 전모에 관해 과문한 필자로서는 그의 독특한 이론의 의의를 평가할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다행스럽게도 역자는 책의 역자서문과 용어해설을 통해 그에 관해 안내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별도의 논문 “오르가즘론과 성혁명: 빌헬름 라이히의 논의를 중심으로”(『진보평론』40[2009. 여름])를 통해서 또한 그 핵심을 잘 안내해 주고 있다. 더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리스도의 살해』가 비록 그 이론을 본격적으로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에 관한 사전 이해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까다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별도의 독서를 하지 않아도 그 핵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덩달아 라이히의 독특한 이론의 지평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수 있다. 그 점에서 라이히의 독특한 이론적 세계에 대한 관심과 별개로 ‘그리스도의 살해’라는 문제의식에 관심 있는 독자나 그의 독특한 이론 세계에 관심이 있는 독자 모두에게 이 책은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학을 하는 평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리스도의 살해’가 함축하는 의의이다.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대표한다. 그의 삶은 육체를 벗어나 있지 않다. 그의 삶은 자연적인 위엄과 매력적인 신랄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기에 삶을 파괴하는 원수들을 미워한다. 삶은 미움이 필요한 경우에 미워할 수 없다면 사랑이 필요한 경우에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렇게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의 삶을 따라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그의 육체적 삶을 신비화하고 정신화할 때 그는 살해당한다.

맘껏 사랑을 발산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삶을 신비화고 정신화하여 결국 그리스도를 살해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살아 있는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특정한 처소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머물러 있는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람들은 무장을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삶을 억압한다. 그리스도의 살해는 바로 그 삶의 억압을 뜻한다. 여기에서 살아 있는 삶은 현실로 경험되기보다는 신비화되고 정신화되어 버린다. 그것은 진정한 삶에 대한 포기로서 좌절을 뜻한다. 라이히는 사람들 사이에 구조화되어 있는 그 좌절을 ‘정서적 전염병’이라 이른다. 그 정서적 전염병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살해한다. 그리스도가 살해당한 바로 그 자리에 외부적인 권력이 개입한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고 어떤 초월적이고 신비한 힘에 의탁하고자 할 때 외부적 권력이 사람들 스스로의 능력을 대신한다. 성서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처형에 이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리스도보다는 정치적 투사인 바라바를 원했다는 것을 전해 준다. 온전히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보여 준 그리스도는 인민들에게 무력할 뿐인 존재로 비춰졌고 정치적 투쟁을 한 바라바야말로 자신들이 하고자 한 일을 대신해 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천년 전의 사건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20세기에도 반복되는 현상이라는 점을 라이히는 지적하고 있다. 인민 스스로 무력해지고 공허함을 느끼는 그 자리에 히틀러와 스탈린과 같은 독재자들이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살해는 지나간 일이 아니라 오늘도 되풀이 되고 있는 현상이다.

라이히는 인간의 정서 안에 자리 잡은 질병을 그렇게 진단하고 있지만 그 질병을 극복 불가능한 난치병으로 치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성서가 증언하는 부활이 살아 있는 삶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그는 삶 자체의 살해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그 희망을 피력하는 맥락에서 라이히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진정한 삶을 보장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의 살해』는 대중심리에 대한 탐색 및 권력비판에서 나아가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미래교육의 전망을 포함하고 있다.


4.

역사적 예수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독자에게 언뜻 보기에 『그리스도의 살해』는 당대의 문제를 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바이 정도로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평가에서 슈바이쳐가 선언한 바와 같이, 이 역시 당대적 이상을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슈바이쳐의 평가 이후에 오히려 더욱 활발해진 역사적 예수 탐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카아(E. Carr)의 말대로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현대 역사학의 인식에도 힘입은 것이기도 하지만, 결코 중단될 수 없는 인간 자체에 대한 물음의 근원성과 통한다. 사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는 인간성에 대한 물음을 뜻한다. 여기서 그 방법론이 어떤 것이냐, 또는 어떤 계보와 연결되는 것이냐 하는 점은 부차적이다. 인간성에 대한 물음의 진정성이 중요할 뿐이다. 그 물음의 진정성으로 과거 한 인물에 대한 기억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발견해내고 동시에 오늘 재현되고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성찰하는 것은 주저할 일이 아니다.

라이히가 그려내는 그리스도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교회와 정치권력에는 위험하고 불온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더 없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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