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21]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 창세기 20:1~18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3-21 21:19
조회
2615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21 (3/21)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 창세기 20:1~18



1. 길 떠난 아브라함(20:1~2)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 다음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일까? 아브라함은 마므레에서 길을 떠나 네겝 지역에 이른다. 그곳 가데스와 술 사이에서 살게 되는데, 잠시 그랄에 머문다. 그랄에서 머물 때 그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그의 누이로 알고 데려갔다. 창세기 12장 이집트에 간 아브라함 이야기의 반복이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하는 의로운 존재였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자기 부인을 권력자에게 내 주는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아직도 철이 덜 들었다는 이야기일까? 성서 기자는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되풀이함으로써 여전히 나약한 존재로서 아브라함을 말한다. 하지만 12장의 이야기가 야훼기자의 기록인 반면 이 대목은 엘로힘기자의 기록이다. 12장의 이야기가 개관적 사실을 서술하듯 그리고 있다면 이 이야기는 훨씬 깊은 신학적, 윤리적 반성을 담고 있다.      


2. 아비멜렉과 하나님의 대화(20:3~7)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기 위해 데려간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 잘못 탓이다. 아비멜렉은 객관적으로 잘못을 범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주관적으로는 명백히 결백하다. 하나님께서 꿈 속에서 나타나 잘못을 저질렀으니 죽는다고 했을 때 그의 항변은 정당하다. “주님, 주께서 의로운 한 민족을 멸하시렵니까? ... 저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 일을 했습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두려워하지만, 의로운 사람마저 심판하시느냐고 항변한다. 그리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은 무죄를 주장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정당한 항변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그의 결백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로운 아비멜렉이 죄에 빠져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남의 부인인 사라를 건들지 않도록 하셨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라를 되돌려보냄으로써 화를 면하도록 조치하셨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예언자로서 중재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되돌려 보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해줄 것이라 하신다. 아브라함을 예언자로 보는 것은 후대의 견해라는 주장도 있지만(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 이전의 위대한 다섯 예언자[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 나름대로 어떤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 역할의 신성함은 확고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 단초는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면 매우 심각한 신학적 논의로 연결될 수도 있다.


3.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대화(20:8~13)


다음날 아침 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았고,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신하들은 두려워하였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또한 불러들여 호통을 쳤다. 자신과 온 나라를 죄에 빠트릴 수도 있는 중대한 실수를 문책하였다. 아브라함은 궁색한 변명을 한다. 그의 아내 사라는 실제로 이복동생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근친혼이 금지(레위기 18:9)되지 않았던 고대의 관습을 반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브라함의 실수가 옹호되는 것은 아니다. 사라는 분명히 그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유죄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대화는 아브라함의 유죄와 아비멜렉의 무죄를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동시에 아브라함의 신실하지 못함과 아비멜렉의 신실함을 대비시킨다. 아브라함은 실수와 변명으로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지만 아비멜렉은 초지일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따라서 윤리적으로 올곧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는 스스로 선민이라 생각하는 사람의 착오와 동시에 어쩌면 그 선민이 이방인으로 단죄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신실함을 대비한다. 구원은 어쩌면 저 밖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는 이야기이다. 굳이 말하면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4. 결말(20:14~18)


아비멜렉은 사라를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선물까지 잔뜩 안겨주었다. 자신에게 악을 범하게 할 수도 있었던 사람에 대해서까지 선의로 답하는 모습이다. 그 때서야 아브라함은 제자리를 찾는다. 제정신을 차린 아브라함은 중재자로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덕분에 아비멜렉의 아내와 그 여종들에게 내렸던 저주가 풀렸다. 닫혀던 태가 열려 모두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화해의 새 역사의 시작이다. 아브라함이 스스로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중재자로서 몫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이 대목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또는 의인의 표상이 아니다. 한계 상황 안에 존재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인간의 표상이다.




* 다음 주제는 “이삭의 탄생, 그리고 쫓겨나는 하갈과 이스마엘”(창세기 21:1~3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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