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22] 선민의 하나님과 쫓겨난 이들의 하나님: 이삭과 이스마엘 - 창세기 21:1~3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3-28 21:26
조회
4710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22 (3/28) 선민의 하나님과 쫓겨난 이들의 하나님: 이삭과 이스마엘 - 창세기 21:1~34



1. 이삭의 탄생(21:1~7)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의 이름을 ‘그가 웃다’를 뜻하는 이삭이라 지었다. 이 대목에 이르러 그 웃음의 의미는 명백해졌다. 사라의 말처럼 그 말은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 하는 의미가 된 것이다. 아기의 탄생은 한 가계, 나아가 보다 넓은 차원의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을 의미하므로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표시로 할례를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기가 태어난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베풀었다. 약속의 자식이라는 징표이다.


2. 쫓겨나는 하갈과 이스마엘(21:8~21)


이삭이 자라 젖을 떼게 되었다. 고대 셈족에게서 젖을 떼는 시기는 대개 생후 만 3년이 되는 시점으로 그 때에 가족 잔치를 벌였다. 백일, 돌 등을 축하하는 우리의 관습과 마찬가지로 셈족 사회에서도 아기가 독자적으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을 크게 축하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삭이 성장하니 문제가 생겼다. 배가 다른 두 형제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사실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갈과 사라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성장하여 함께 노는 아이들을 보고 사라는 걱정을 한다. 성서 번역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혔다는 견해는 후대의 전승(갈라디아서 4:29~30)일 뿐 이 대목의 히브리어 원문은 이스마엘이 ‘이삭과 놀고 있었다’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각기 어머니의 입장에서 배가 다른 두 형제가 성장하여 그냥 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장래를 걱정할 만하다. 걱정이 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부탁한다. 장차 나눠질 유산이 근심의 근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유산이 문제다. 두 아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으로서는 괴로운 일이었다. 전에 임신한 하갈이 사실상 쫓겨날 때(16장)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 아브라함의 모습과는 달리 몹시 괴로워하는 모습이다. 그 때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신다. 물론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니 지켜주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는 보증을 하신다. 묘한 긴장관계가 서려 있는 대목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아브라함은 곧바로 사라의 말을 따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낸다. 약간의 먹을거리와 물 한 부대를 하갈에게 메워 주며 내보낸다.

약간의 먹을거리와 물 한 부대는 광야에서 버티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던 모자는 이내 탈진 상태에 이른다. 아이도 고통으로 울부짖고, 그 어머니는 더더욱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으로 울부짖는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 울부짖음을 들으신다. 천사가 하갈 앞에 나타나 안심을 시키고 이스마엘에게서 큰 민족 나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재차 확인한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눈이 밝아진 하갈은 샘을 발견하고 그 샘물을 떠다 아이에게 먹임으로써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난다.

병주고 약주는 얄궂은 하나님이란 말인가? 이 이야기를 보다보면 당연히 얄궂은 하나님을 보며 납득하기 어려워진다. 이 이야기는 엇갈리는 두 가지 중요한 동기가 서로 뒤엉켜 있다. 선민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쫓겨난 이들의 신음소리를 듣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쫓겨난 이들이 곧 선민으로 동일시될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선민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상황에 부딪히면 난처해진다. 오늘 본문은 그 난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성서본문이 그나마 그 난처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문은 이삭이 선민의 씨앗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그 때문에 배제된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영영 배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선민의식이 고통받는 이들의 신음을 외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본문은 보여 주고 있다. 오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본문을 어찌 해석할까?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보호로 이스마엘은 장성하여 광야에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 전형적인 목축보다는 수렵을 위주로 했던 베두인의 조상으로서 이스마엘의 모습이다. 그가 팔레스타인 남부 바란 광야에서 살 때 그의 어머니 하갈은 이집트 여인을 데려다가 그의 아내로 삼아주었다. 이 사실은 이집트 출신 하갈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결혼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장차 이뤄질 것을 시사한다.


3.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협약(21:22~34)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에 이어 본문은 다시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20장에 이어지는 아비멜렉과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뒤엉킨 이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아비멜렉의 주도로 계약을 맺은 이야기이며(21:22~24), 두 번째는 아브라함의 주도로 계약을 맺은 이야기이다(21:25~34).

첫 번째 아비멜렉의 주도로 맺은 계약은 그랄 왕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일족 사이의 평화적 신사협정이다. 이 계약은 아비멜렉이 전적으로 주도하는 양상을 띠고 있고 그의 공정함을 드러내주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연중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의 위신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인물됨을 보고 계약을 맺은 것은 아니다. “그대가 나와 나의 아이들과 나의 자손을 속이지 않겠다고 맹세하십시오.”라는 발언은 아브라함의 과오를 재삼 확인하며 그와 같은 사태를 막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어쩌면 충분히 힘으로 제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신사협정을 체결한 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을 돕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대를 돕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아비멜렉의 신실함을 드러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잘것없는 인간을 돕는 하나님의 위력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후광으로 그랄 왕 아비멜렉과 동등하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후광으로 당당할 수 있었던 아브라함은 이번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우물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계약을 아비멜렉과 체결한다. 양과 소를 끌고 와 언약을 맺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 때 양과 소는 계약을 축하하는 잔치용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와는 별도로 새끼 암양 일곱 마리를 아비멜렉에게 선물로 주며 우물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는다. 이로부터 브엘세바, 곧 ‘맹세의 우물’ 또는 ‘일곱 우물’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성서는 전한다. 브엘세바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최남단으로 간주된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한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그 지역에서 숭배된 신의 이름이었으나 훗날 하나님의 별칭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본문은 그 땅을 블레셋 족속의 땅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아브라함 당시에는 블레셋 족속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후대의 상황이 옛 이야기에 반영된 흔적일 뿐이다.



* 다음 주제는 “모리야 산을 오르는 아브라함과 이삭”(창세기 22:1~2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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