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23] 모리아산을 오르는 아브라함과 이삭 - 창세기 22:1~2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4-04 21:19
조회
2682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23 (4/4) 모리아산을 오르는 아브라함과 이삭 - 창세기 22:1~24


1.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마라!(22:1~19)


이삭을 바치라는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극적이다. 교회 역사는 전통적으로 이 이야기를 기리기리 새기며 그 교훈을 가르쳐 왔다. 임마누엘 칸트가 도덕율을 어기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이상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아,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거기서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아이가 없어 그렇게 애를 태우다 하나님의 은혜로 가까스로 얻은 아들인데, 이제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니 정말 얼토당토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런 군소리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

길 떠난 지 사흘만에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 이른다. 성서 역대기하(3:1) 딱 한 구절이 그 산 위에 성전을 세웠다고 증언하고 있어서 전통적으로 모리아산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산으로 여겨져 왔다. 오늘날 그 산 위에는 이슬람의 알 아크사 사원이 있고,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것으로 여겨진 바로 그 자리에는 장엄한 황금돔이 자리를 하고 있다. 어쨌든 브엘세바에서 그곳에 이르기까지 나귀 타고 한 사흘 걸린다. 아브라함은 그 산이 보이는 곳에 이르러 종들에게 기다리라 말하고 아들과 함께 산에 오른다.

이 곳에 이르기까지 아무 말이 없던 이삭이 말문을 연다. “아버지,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무척 담담하게 말한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나 달리 준비되어 있는 것은 없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는다. 이삭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었을 때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외칩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알았다.” 아들을 내리치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수풀에 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다가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렸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그곳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으로 ‘여호와이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 이야기는 완전한 믿음의 소유자 아브라함이 그 믿음을 입증 받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식마저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완전한 믿음, 철저한 순종의 표본으로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로 기억한다. 더불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반항하지 않고 순종한 이삭의 믿음을 전하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다시 말해 너무나 당연한 순종과 헌신에 관한 이야기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중대한 두 가지 진실을 간과한다. 하나는 이 이야기 주인공들이 처한 딱한 처지요, 또 다른 하나는 그 처지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인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자식을 바치라니! 성서는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의 심경을 전혀 묘사하고 있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는 묘사되지 않은 그들의 심경을 충분히 예측하게 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바쳐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영문도 모른채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아들은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 정말 그렇게 잔인한 하나님을 믿어야 할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 앞에서 전율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하다. 다행스럽게도 이 이야기는 우리의 두려운 의문을 해소해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그 무모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중단시키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종교사적 전환이요, 문명사적 전환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성서의 종교가 다른 모든 고대의 종교들과 구별되는 분기점을 보여주는 중대 사건이다. 인신제사, 곧 인간을 희생제물로 삼는 제의가 여기에서 중단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 희생제물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순전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로만 기억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째서 멀쩡한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아브라함의 양심적 거리낌이나, 까닭 없이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위기에 처한 이삭의 처지를 안중에 두지 않는 해석만이 판을 치고 있을까? 어째서 그 무모한 일을 중단시킨 하나님은 강조하지 않고 시험하는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해석이 마치 정설인 듯이 통용되고 있을까? 그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의식과 생활양식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여기는 믿음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할 때 누군가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어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갈등을 무마하는 방법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인간사회의 고질병이다. 그것은 아주 노골적인 방식에서 아주 은폐되고 세련된 방식에 이르기까지 겉으로 드러난 양식은 다르지만,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변함없다. 고대 사회에서 그와 같이 희생을 강요하는 논리,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은 흔히 신의 뜻으로 정당화되었다. 아브라함은 그런 세계 안에 살던 사람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대목, 곧 그가 도대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태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신의 뜻이라 하여 순종하는 태도는 사실 그러한 고대적 믿음의 표현일 뿐이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물론 인간 대신에 양으로 대체되어 여전히 고대적 믿음의 흔적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폭군과 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희생자의 처지를 헤아리는 자애로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되는 일대 사건이다.


2. 장래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가계(22:20~24)


그 극적인 이야기 다음에 언뜻 보기에는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 듯한 족보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가 이 대목에 등장하는 것은 장차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가계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이야기는 아람족이 아브라함의 친계임을 알려주는데, 이 사실은 아람이 셈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 10장 22절과 다르다. 성서 기자가 다른 두 전승을 그대로 수용한 탓인데, 어쨌든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아람의 친연성을 나타내준다.  




* 다음 주제는 “사라의 죽음”(창세기 23:1~2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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