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26] 아브라함의 죽음과 그 자손들 - 창세기 25:1~18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5-02 21:01
조회
2154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26 (5/2) 아브라함의 죽음과 그 자손들 - 창세기 25:1~18



1. 아브라함의 다른 자손(25:1~6)


아마도 이삭의 결혼을 앞둔 어간에 아브라함은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예측되지만, 성서는 이삭의 결혼 이야기 다음에 아브라함을 재등장시켜 그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사제 기자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하며 그 후손의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의미를 갖는다.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맞아들여 자손을 낳는다. 그 아내의 이름은 그두라이다. 그두라는 ‘향을 피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아라비아 땅과의 관련성을 시사한다. 아라비아는 성서에서 향의 땅 또는 향이 나오는 땅으로 불렸다(열왕기상 10장; 이사야 60:6; 예레미야 6:20; 에스겔 27:22). 그 자손들의 이름들 또한 아라비아 지역의 명칭들과 관련이 있으며 아랍 부족들의 시조 이름으로 추정된다. 수아는 팔레스타인 동쪽 변경지방을, 욕산은 사막을, 미디안은 시리아 아라비아 사막 지역을 말한다. 이 가운데 특히 미디안은 가장 유명한데 통상 미디안인과 이스마엘인은 같은 의미로 통용되기도 했다. 성서는 이들을 모두 동쪽에 보내 이삭과 떨어져 살게 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그 뿌리가 하나라는 것을 시사한다.

  


2. 아브라함의 죽음과 장례(25:7~11)


아브라함은 천수를 누렸다. 백일흔다섯에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 아브라함이 죽은 다음에 그는 예전에 구했던 막벨라 동굴에 그의 아내 사라와 함께 안장되었다. 어떤 민족에게서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천수를 누리고 편안하게 임종하여 고향 땅에 묻히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복된 일이었다. 또한 죽음은 삶의 최종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삶의 연장이라는 관념을 이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죽은 자들은 조상들에게 돌아간 것을 의미할 뿐이며 이 세상을 떠난 조상들은 여전히 공동체적 유대의 근거로 남아 있다.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삭과 이스마엘이 나란히 아브라함의 장례를 모시고 있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가 적자의 상속권은 이삭에게 전해진 것으로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이스마엘과 함께 아버지 장례를 모셨다고 전하는 것은 이스마엘의 추방을 전제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이삭과 이스마엘에 관한 여러 전승이 혼재되어 있었던 상황을 반영한다.  

  


3. 이스마엘의 자손(25:12~18)


적자로서 상속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이스마엘의 비중을 결코 소홀히 다루지 않는 이 이야기는 그 입장에 걸맞게 이스마엘의 자손을 언급함으로써 아브라함 이야기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스마엘의 자손은 마치 야곱/이스라엘의 자손이 열두 지파로 분화된 것과 마찬가지로 열두 지파로 분화되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개인이나 종족 또는 지역의 이름이 혼합된 것인데, 대부분 기원전 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아랍족의 이름들이다(시편 120:5; 아가 1:5; 이사야 21:16; 42:11; 예레미아 2:10; 49:28; 에스겔 27:21). 이들이 산 지역은 오늘날 페르시아만으로 추정되는 하윌라에서 이집트 국경지대인 수르에 이르는 아라비아 반도였다.

아랍인과 유대인이 후대에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지만, 이 이야기는 적대적 관계에 놓이기 이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이야기는 아랍인과 유대인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시사해 주며, 동시에 아브라함에게 내린 하나님의 약속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아랍인에게 이르기까지 포괄하는 큰 민족을 이룸으로써 실현되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제한된 선민의 시각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버리는 성서해석의 무모함을 막아주는 방패막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갈등, 나아가서는 무슬림과 기독교인들과의 갈등 기원을 성서에서 찾으려 한다거나 성서를 통해 정당화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모한 짓이다. 그 갈등은 후대의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평화롭게 공존했던 시절의 상황을 간직하고 있는 성서의 이야기는 전쟁과 갈등을 정당화하는 오늘 무모한 성서해석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 다음 주제는 “야곱과 에서 이야기”(창세기 25:19~34)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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