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어떤 책을 읽나?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8-10-18 12:04
조회
4227
* <기독교사상> 2008년 11월호 특집원고입니다(081017).



책읽기와 신앙의 지형도 -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어떤 책을 읽나?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과연 어떤 책을 읽을까? 책읽기와 신앙의 지형도를 판가름해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이 물음은 과연 무슨 방법으로 그 답을 찾아야 할지 우선 멈칫하게 만든다. 아마도 엄밀하게 계산된 방법에 따라 설문조사라도 한다면 비교적 객관적인 그 윤곽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설문조사의 수단이나 여력이 없는 한 사람의 필자에게 의뢰하여 단 시간에 그 답을 찾으라는 주문은 그 필자의 임의적 판단에 전적으로 맡기겠다는 의도일 터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접근방법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첫 번째 손쉬운 방법은 필자의 책읽기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오늘 진보적 기독교 진영의 작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처지에서 스스로의 신앙과 신학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책읽기 경험을 되돌아보는 일은 하나의 생생한 증언이 될 수도 있겠다. 어떤 표준이나 모범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민의 궤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방편은 되는 셈이다. 두 번째 방법은 단순한 독자로서가 아니라 책을 써내고 또한 항상 주변의 사람들에게 책을 권해야 하는 처지와 관련된다. 주어진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어떤 책이 읽히기를 원하는지 그 기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이른바 진보적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어떤 책이 읽히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엄밀한 설문조사를 통한 방법은 아니기에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 인상을 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줄여 말하면, 이 글은 하나의 책읽기 체험기이요, 권고기요, 인상기와 같은 것이다.


2.

삶의 중요한 전환기에 인상 깊었던 책에 대한 기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교 입학 어간,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영향을 끼친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굳이 몇 권을 꼽아야 한다면 지금도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책들이 있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안병무의『역사와 증언』, 한완상의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 그리고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송건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등이다.

나름대로 신앙에 대한 열정과 함께 역사 및 현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청년에게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무척 경이로운 책이었다. 성서로 한국의 역사를 풀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성서가 전하는 고난사와 한민족의 고난사를 겹쳐 풀이한 것이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훗날 『역사와 해석』으로 증보 개정된 『역사와 증언』은 교회에서 배워왔던 성서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거룩한 말씀으로 그저 믿어야만 할 것으로 여겨왔던 성서를 위대한 고전의 하나로 보면서 파노라마처럼 펼쳐 풀어 쓰고 있는 그 책은 성서를 훨씬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 줬고, 이후 성서를 보는 눈을 열어줬다. 한완상 선생의 『저 낮은 곳을 향하여』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우리가 몸담고 있던 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책의 내용은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어렴풋하게 교회에서 품었던 의문들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30년 가까이 지나 몇 년 전에 그 책 개정판이 나왔는데, 여전히 그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현실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만 하지만 말이다.  

초보적인 신학적 물음을 막 던지기 시작한 신학도에게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는 훌륭한 입문서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존 로빈슨의 그 책은 세속화 시대의 신앙의 의미를 조명하고 있다. 틸리히의 철학적 신학,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 불트만의 비신화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 이 책은 종교적 신앙 자체가 의미를 잃고 위기를 맞는 시대에 그 의미를 재해석해 주고 있어서 세상과 소통하며 그 몫을 다하는 신앙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해 줬다. 그 책은 이후에 문제의식을 심화시키기 위해 더 읽어야 할 책들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암시해 주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특별히 본회퍼의 발견은 신학적 이정표를 찾은 것과도 같았다. 이후 본회퍼의 책이나 그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의 신학적 사유 자체에도 놀라워했지만 그의 삶을 보면서 타자를 위한 삶의 표본처럼 느끼게 되었다.

이영희 선생의『전환시대의 논리』를 처음 받아 들었을 때의 살 떨림, 그 안에 실린 글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갔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된다. 당시 금서였던 그 책을 친구가 선배들을 통해 그럴 듯한 사본으로 구해줬을 때 이미 그 책의 은밀한 명성만으로도 흥분했었다. 학교에서 배우고 언론에서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각의 시론들, 특히 베트남 전쟁에 관한 글들은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보는 눈을 완전히 새롭게 해줬다. 이영희 선생의 또 다른 책이 『우상과 이성』이었지만, 그 책을 읽을 때 반공주의의 우상이 무너지는 체험을 하였다. 그렇게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보는 눈이 새로 열린 터에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한국 현대사의 숱한 사건들을 다시 보고 당대의 역사적 조건을 이해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대학입학 초기까지만 해도 어쩌면 신앙적 문제의식을 따라가려는 책읽기와 역사적 현실과 관련한 문제의식을 따라가려는 책읽기는 다소 별개의 과정으로 이루어졌고, 스스로의 문제의식 가운데서 어렴풋하게 통일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다소 모호하고 아귀가 맞지 않는 듯한 그 문제의식으로 갈등하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을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갈등이 해소되기 시작했다.

해방신학에 관해 처음으로 본 글은 문동환 선생이 『신동아』에 실었던 글이었다. 그 다음에 금서였던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접하게 되었고, 아직 민중신학에 관한 단행본이 없던 당시 여기저기 산재한 민중신학자들의 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중과 한국신학』, 서남동 선생의 『민중신학의 탐구』등이 나왔고, 여러 민중신학자들의 책이 나오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쏟아져 나온 민중신학 저작들을 빠트림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민중신학을 읽으면서 역사적 현실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를 동일한 지평에서 사유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지금까지 이어지는 신학적 사유의 기본 틀을 이루게 되었다.


3.

“목마른 자가 샘을 파서 생수를 마시듯이...”, 안병무 선생은 『해방공동체』추천사에 그렇게 썼다. 행복하게 그저 주어진 책을 읽기만 한 시절은 단명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심정으로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 첫 작품이 다른 청년 동료들과의 공동저작인 성서연구 교재 『해방공동체』시리즈였다.

1980년대 기독교 진보 진영의 신학은 곧 민중신학이었다는 데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당연히 당시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으레 민중신학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였다. 지금은 전문적인 학술지로 그 독자층마저도 제한되어 있지만, 민중신학적 담론 형성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신학사상』이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청년학생들에게까지 읽혔던 현실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말해 준다. 그런데 당시 기독교 진보 진영의 저변, 특히 가장 활동력이 왕성하였던 청년학생들에게는 민중신학 그 자체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갈급함이 있었다. 좀더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가장 주요한 관심으로 사회과학적 인식과 신학적 인식의 통일을 가능케 하는 신학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신앙언어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전자의 요구가 제2세대 민중신학의 탄생 배경이 되었고, 후자의 요구가 청년학생들을 위한 성서연구 교재 만들기 작업의 배경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80년대에는 청년학생들이 스스로 만든 성서연구 교재가 다양하게 발간되었고, 그것은 진보적 기독교 진영의 책읽기의 중요한 하나의 축을 형성하였다. 그 첫 번째로 나온 것이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가 내놓은 『역사ㆍ예수ㆍ교회』였고, 그것을 조금 더 발전시킨 것이 『청년과 성서 이해』였다. 그리고 이어 나온 것이 기독교장로회청년회전국연합회가 만든 『해방공동체』시리즈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 만든 『성서와 실천』이었다. 이후 개별적 저작들을 포함하여 민중의 시각에서, 또는 평신도의 시각에서 읽는 성서에 관한 책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고, 그 성과들을 바탕으로 하여 1990년대 초반에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함께 읽는 구약성서』와 『함께 읽는 신약성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 맥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지속되어 최근에도 성서를 재해석하는 여러 저작들이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보수든 진보든 기독교인에게 공통되는 기반은 역시 성서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지만, 성서의 재해석을 시도하는 진보 진영의 시각은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고 그것은 진보 진영의 기독교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을 배격하고, 나아가 오늘의 역사적 현실에서 성서의 메시지를 재해석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 깊이 개입했던 처지에서 책쓰기 내지는 책읽기의 주요 관심사를  확인한다면, 역사적 현실과 소통하는 신앙, 교회와 교회 밖의 세계와 소통하는 신앙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만하고 여기서 책읽기 권고에 해당하는 언급은 자제해야 할 것 같다. 지금 책읽기 지형을 파악하는 데 필자의 임의적 판단이 최대한 보장받는다 하더라도 기대와 현실의 괴리를 잘못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기대나 권고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과 소통하는 신앙, 교회와 교회 밖의 세계와 소통하는 신앙 형성을 위한 성서의 재해석을 시도하는 책들이 진보적 기독교인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다는 것은 재삼 확인해 두고 싶다.


4.

필자 개인의 체험과 기대 내지는 권고의 차원에서 진보 기독교인의 책읽기 경향을 말한 것이 우연찮게 연대기적 성격을 띠게 된 것 같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책읽기 인상기는 바로 오늘의 진보 기독교인들의 책읽기 경향에 해당하는 셈이다.

1990년대 이후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책읽기 경향은 진보적 기독교 운동이 구심력을 잃고 동시에 과거 진보 진영에서 거의 유일한 ‘패권’을 지니고 있던 민중신학이 그 자리를 내어 준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한동안 진보적 기독교 진영은 그 진로를 심각하게 재탐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런 만큼 그 책읽기 경향은 과거처럼 단일한 색조로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책읽기 경향이 매우 다양한 갈래로 펼쳐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 한 때 영성과 관련된 분야의 책들이 관심을 끌게 된 것도 여러 갈래의 책읽기 경향 가운데 두드러진 하나의 현상이었다. 기독교 진보 진영의 책읽기가 여러 갈래로 펼쳐지게 된 것은 그 성향상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끊임없이 역사적 현실과의 대결 속에서 신앙을 모색하는 그 성격 때문이다. 그 기본적인 성향 탓이겠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그 범위가 다양해지긴 했으되 과거의 책읽기 추세와 크게 다르지만은 않다. 오히려 일관된 추세 속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의 핵심적인 청년활동가에게 탐문을 해본 결과 과거에서부터 지속되는 일관된 추세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성서에 대한 기본적인 입문서들이 꾸준히 읽히고 있었다. 예컨대 안병무의 『역사와 해석』은 지금도 여전히 즐겨 읽히는 책으로 ‘고전’이 되어 가고 있으며, 1980년대 신학의 대중화 일환으로 만들어진 한국신학연구소 월요신학서당 편 『새롭게 열리는 구약성서의 세계』와 『신약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한다』등이 꾸준히 읽히고 있다. 역사적 현실에 대한 관심 또한 여전하다. 다만 과거에는 역사적 현실의 관심에서 ‘역사’와 ‘현실’에 대한 관심이 거의 같은 비중을 지니고 있었다면 최근에는 역사보다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고 그 영역이 다변화된 점이 다른 점이다. ‘코뮨’ 내지는 공동체에 관한 관심, 성적 소수자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 페미니즘, 그리고 평화 및 환경과 생명에 대한 관심이 책읽기에 반영되어 있으며, 경제 문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기존 에큐메니칼 진영의 젊은 활동가들에게서만이 아니라 복음주의 진영의 개혁적인 젊은 활동가들에게도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최근 양 진영 저변의 세력이 실천적으로 연대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 인식 또한 상당 부분 공유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와 같은 경향을 볼 때, 신학적 인식과 인문사회과학적 인식을 접목하려는 진보 기독교의 책읽기 경향은 일관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흔히 기독교 진보 진영 하면 떠올리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논의들과 관련해서는 어떨까? 전문적 신학 담론 안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과 달리 일반 평신도들 사이에서 그와 관련된 책들이 널리 읽히는 것 같지는 않다. 기독교 진보 진영에서 그와 같은 현상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서처럼 종교적 배타성 때문은 아니다. 그 배타성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실의 여러 문제들에 비해 그 절박성이 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경향은 전문적 신학 담론과 일반 평신도들 사이에서의 관심의 차이를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며, 다른 많은 주제들과 관련해서도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판단은 아직 섣부르다.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논의는 비단 전문 학자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일정한 독자층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와 유사한 경향을 보이는 또 다른 주제의 책들도 있다. 최근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기독교와 교회 현실과 관련된 비판 서적, 그리고 일종의 내면적 성찰을 돕는 책들이 그런 경우다. 경계를 딱 갈라 말하기 어렵지만, 오강남 선생의 『예수는 없다』와 같은 책이나 그 밖에 현실의 기독교 및 교회를 비판하는 여러 책들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이현주 목사 또는 유사한 경향의 자유로운 몇몇 저자의 책들이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이런 유의 책들은 기독교 진보 진영의 활동가 층에서는 그다지 널리 읽히고 있는 것 같지 않으나 그 밖의 상당한 독자층을 갖고 있다. 그 독자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그 독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기독교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기독교인들 가운데 그 독자들이 상당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현실의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나 드러나게 행동하지 않는 조용한 다수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 독자들의 많은 수는 기성교회에 속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뭐라 딱지를 붙이는 일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신앙의 지형도를 가늠한다는 의미에서 그 의미를 부여해본다면 이 역시 진보적 기독교인의 책읽기 경향의 하나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5.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책읽기 특징은 신앙적 인식과 역사적 현실 인식의 결합, 달리 말하면 신학적 인식과 인문사회과학적 인식의 결합을 추구하는 데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기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밖으로 향하는 자세를 의미하고, 따라서 안팎의 소통을 지향하는 자세를 뜻한다. 나 밖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넓고 깊어질수록 진보적이 되고 소통의 능력을 높이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 아닐까? 그러니까 미리 규정된 이념으로서 진보가 책읽기의 경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책읽기의 어떤 경향이 진보를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은 실천적 차원을 동반한 개념이지만, 굳이 책읽기와 관련해서만 말한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책을 읽힐 수 있느냐에 따라 진보의 영역은 그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문제의식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기독교 진보 진영의 어떤 모임, 특히 활동가들의 모임에 가면 언제나 호소하는 문제가 있다. 신학의 빈곤 내지는 신학적 언어의 빈곤이다. 다급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현실에서 그 현실을 읽기 위해 적지 않게 공부하고 책을 읽는 이들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신학적 언어의 빈곤을 느낀다는 이야기이다. 신학적 인식과 역사적 현실 인식의 결합을 추구해온 책읽기의 경향에 비추어 보면 다소 엉뚱해 보인다. 그 양자의 결합이 그렇게 성공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신학이 빈곤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민중신학이라는 유산이 있지만 이제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여타 전문적 신학 담론들에는 더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을 말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성서를 읽고 그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는 책들을 읽는 한편 동시에 역사적 현실에 관한 책들을 읽지만 그 둘 사이를 가교할 만한 신학적 언어를 찾을 수 있는 저작이 빈약하다는 지적일 것이다. 그런 문제제기를 받을 때마다 신학과 현장, 교회와 사회, 기독교와 역사적 현실 사이의 소통을 역설하는 처지에서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신학적 언어라는 것은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지향하는 가치의 문제다. 그러니까 당면한 역사적 현실에 조응하는 성서적 개념 또는 기독교적 개념을 제시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 인식을 통해 지향하는 가치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신학의 빈곤은 그것을 해명해주는 언어가 지금 우리 현실에서 빈곤하다는 것이다. 앞서 책읽기 경향을 살펴보는 데서 지적했듯이 다변화되고 세분화된 역사적 사회적 현실에 걸맞는 신학적 인식의 불철저함을 말한다.

그 신학의 빈곤을 뛰어넘는 과제는 일차적으로 책쓰기를 맡은 저자들의 몫이다. 현실과 소통 불가능한 폐쇄적 신학 담론에서 해방되어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며 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시도해야 하는 과제가 저자들에게 부여되어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 신학의 빈곤을 뛰어넘는 과제는 책읽기를 즐기는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창조적 사유의 과정이다. 그 창조적 사유의 과정은 저자의 여백마저도 충분히 메울 수 있지 않을까?
전체 1
  • 2015-03-16 10:08
    진보개신교의 장점이라면 우선 사회참여가 활발하고 타종교를 배격하지않으며 타종교인이 강연을 해도 경청해주는등 배려심이 강하다~!!!! 그리고 북한선교를 하더라도 직접 북한에 방북을 해서 통일운동을 하자는 식으로 대화를 하는경우가 많다~!!!!
    rn단점이라면 너무 사회참여를 하는 나머지 복음과 전도에 너무 희석이 되어 극우반공보수개신교 먹사들에게 빨갱이 용공분자로 몰리는등 온갖 어려운일을 많이 당하는경우가 많다~!!!!!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