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4] 실낙원, 창조질서의 파괴 - 창세기 3:1~24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8-30 21:37
조회
2302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4 (8/30) 실낙원, 창조질서의 파괴 - 창세기 3:1~24



1. 선악과의 비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픈 인간의 욕망(3:1~13)


하나님께서는 어째 아름다운 동산에 선악과나무를 만들어 인간에게 시험거리를 던져주었을까?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마다 던지는 물음이다. 창조 이야기는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 세계의 기원을 해명하거나 그야말로 비밀스러운 사연을 해명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문명에 대한 통찰에 해당한다. 그런 시각에서 접근할 때 우리는 선악과 이야기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맨 먼저 한 일이 옷을 해 입은 것이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인간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구별짓기’다.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그 사실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고픈 인간의 욕망은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뱀의 유혹을 못이겨 ‘선악과’를 범하는 것으로 표상된다. 선과 악의 궁극적 판단은 하나님의 영역이었는데,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을 구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끝끝내 궁극적 판단의 영역으로 남겨져야 할 것이 이제 성급하게 선과 악으로 구별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태초의 세계에 구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땅과 하늘이 구별되고, 그 위에 사는 식물과 동물이 구별되고, 다시 거기에서 인간이 구별되고, 인간 안에서도 남과 여과 구별되어 있었다. 성서가 말하는 태초의 세상 모습은 그렇게 구별되어 있었으나 그것이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 구별이 어느 편은 선이고 어느 편은 악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기 저마다 존재 의의를 지니고 모두가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다시 말해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별되기 시작한다.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 판단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는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부터는 구별되어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구별이 선악과 결부되면서 차별이 된다. 그래서 구별되어 있는 것이 고통이 된다. “벗은 몸인 것을 알고, 옷을 해 입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다. 남자와 여자가 각기 온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더 확연하게 구별짓고 더욱 두텁게 자기를 감싸는 일이 벌어진다.

스스럼없이 일체감을 느꼈던 인간의 연대성은 무너지고,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는 태도로 살아가게 된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고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로 살아간다.    


2. 관계의 파탄, 고단한 노동과 소외로 시달리는 인간(3:14~21)


태초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일이 없었고, 인간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일도 없고 아울러 인간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에서의 소외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의 징표가 무너지면서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벌거벗은 채 서로 한몸을 이루었던 인간은 알몸이 상대방에게 노출되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는 ‘인간들 사이의 소외’로부터 이어지는 관계의 파탄은 총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뱀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전도(3,14-15),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고통스러움과 끊임없는 남녀의 우열경쟁(3,16), 소외된 노동의 고통(3,17-18) 등이 관계파탄의 실상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실상은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서 마땅히 축복이어야 할 것들이 그 본래의 모습과는 달리 저주로 전도되고 만 것을 말한다.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땅의 저주와 다시 그로 인한 인간의 고통스러운 노동의 현실이 계속된다. 애초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협력자로서 인간의 노동은 만물을 생성시키고 생명을 키우는 동인으로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 앞선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땅의 피폐화를 불러일으키고 따라서 그 노동의 결과는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것이 되었다. 이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고 생명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한갓 흙먼지로 돌아갈 운명을 향해 자신을 소진시키고 자신을 포함해 만물의 생명의 터전이어야 할 땅마저 황폐화시키고 만 것이다.


3. 실낙원(3:22~23)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인간은 낙원을 잃었다. 그런데 성서는 선악과나무와 구별되는 생명나무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무를, 거룹들을 세우고 불칼을 장치하여 사람이 거기에 이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보존되도록 했다고 한다. 선악과는 이미 범했지만 생명나무는 범하지 않도록 해야 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이 생명나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이 범해서는 안 되는 어떤 신성한 경계를 나타낸다. 피조물로서 우리 인간의 한계, 나아가 피조된 세계의 한계를 나타낸다는 말이다. 둘째, 이 생명나무는 지키고 보존해야 할 중심이자 동시에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절대적 기준을 의미한다. 결국 선악과 비유와 생명나무 비유를 종합해서 이해할 것 같으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제 인간이 스스로의 생명을 인간 스스로의 방법에 의해 영원히 보존하려는 유혹에는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나무는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낙원회복 가능성을 동시에 상징한다. 그것마저 인간의 욕망에 의해 범하여진다면 인간은 영영 파멸의 길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이 지켜진다면 인간은 낙원을 회복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오늘 세계 현실에서 생명나무는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까? 아니면 이미 훼손되었을까? 성서의 실낙원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그 물음에 스스로 답하도록 촉구한다.



* 다음 주제는 “증오와 폭력, 가인과 아벨 이야기”(창세기 4:1~2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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