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5] 증오와 폭력, 카인과 아벨 이야기 - 창세기 4:1~16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9-06 21:36
조회
2571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5 (9/6) 증오와 폭력, 카인과 아벨 - 창세기 4:1~16



1. 이해하기 어려운 사태


카인과 아벨 이야기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간의 불순종 이야기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인간의 불순종 혹은 범죄에 관한 이야기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의 최초의 살인행위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담과 하와가 낳은 자식들이 카인과 아벨이 있었다. 카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목축을 하는 사람이어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각기 자기가 거둔 소출을 제물로 바쳤는데, 카인이 드린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께서 받았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기본 배경이다. 그래서 분노한 카인이 아벨을 불어내어 돌로 쳐 죽임으로써, 그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커다란 의문을 갖게 된다. 도대체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을까? 성서 이야기 자체에는 암만 들여다보아도 그 이유를 알 만한 내용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곡식보다는 동물의 피의 제물을 더 좋아하셨구나’ 하는 피상적인 것만 알 수 있을 뿐 언뜻 봐서는 도대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이를 해명하려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이를 문화사적으로 이해하려는 시각에서는 카인과 아벨의 갈등을 농경민과 유목민의 갈등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당시 가나안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조상들처럼 유목을 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유목민의 신앙이라는 것을 옹호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또 다른 시각은 역사적인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주변에는 여러 민족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켄족’이라는 족속이 있었고, 모세의 장인도 이 ‘켄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 ‘켄족’은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레갑인들과 더불어) 야훼 하나님 숭배자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도 하나님의 선민이 되지 못하고 미디안의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는 베두인들처럼 살아가는 켄족의 기원을 해명하고 있는 것이 이 이야기라는 설명이다. 곧 그 발음도 비슷한 카인이 이 켄족의 조상이고 이 카인 때부터 켄족은 유리방황하는 족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흔히 이해되는 신학적 이해방식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드리는 제사, 예배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매인 일이라는 해석이다. 카인과 아벨 가운데 누가 더 정성을 드렸고 안 드렸는지 우리 인간적 안목에서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이다.

이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의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시도로,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일까? 이 해명들에는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한 답변이 없다. 이 이야기의 문화사적, 역사적 배경, 혹은 최종적인 신학적 판단은 이해할 수 있으나,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의 의미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로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2. 증오와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관계


우선 우리는, 오늘 이야기에서 두 형제가 제사를 따로따로 드린 데 주목해야 한다. 한 하나님을 섬기는 한 형제로서, 그것도 서로 접근하기 어려울 만큼 먼 거리에 떨어져 살았던 사이도 아닌데 이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따로따로 드리고 있다. 여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 내용을 해명하는 첫 번째 열쇠가 있다. 한 마음이 되어, 하나가 되어 함께 드려야 할 예배가 각기 따로 드려지고 있는 상황 자체가 문제다. 하나가 되어야 할 예배가 둘로 갈라놓는 행위로 변질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결국 어느 누군가가 예배를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시켜 자기의 사욕을 앞세우는 자기 과시의 행위로서, 그리고 경쟁의 행위로서 전락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조화와 화해의 행위로서 예배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으로서 예배가 되고 만 것이다. 형제 사이의 관계의 파탄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탄으로 나타나고 있다.    

누가 왜 그와 같이 변질시켰는지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문은 결과적으로 형인 카인에게 그 책임을 묻고 그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그 장본인이 카인이라는 것을 밝혀 주고 있다.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카인의 예배의 동기가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동생을 제치고, 자기 자신만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했던 카인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이 물음 앞에서도 카인은 여전히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질책하는 하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자신의 행위가 당연한 듯 여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책임을 묻는 하나님의 물음을 외면하고 갈 데까지 간다. 아벨을 불러내어 끝내 그를 살해하고 만다. 완악한 카인의 마음, 아니 완악한 인간의 불순종은 여기에서도 끝이 나지 않는다. 아우를 살해함으로써, 관계회복의 일말의 가능성마저도 송두리째 부정해 버린 카인은 이제 그 살인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을 묻는 하나님의 문책 앞에서마저도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여전히 책임회피를 하는 모습이다. 범죄한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책임회피’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나만 살겠다는 식의 경쟁의 관계는 결국 인간의 생존 조건 자체의 파탄이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네가 아무리 애를 써서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 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던 아우를 제치고 나면 그 다음부터 땅에서 나온 모든 소출은 자기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카인, 인간이 맞이하게 되는 결과다. 아우와 더불어, 형제와 더불어 땅의 소출을 누리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허용하지만, 혼자 누리고자 할 때에는 아무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사실은 죄를 범한 카인을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죽음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파멸의 상황을 비로소 실감하고서 두려워하는 카인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오히려 카인을 죽이는 자에게 일곱 배의 벌을 내리신다고 했다. 이것은 죄를 범한 카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허락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다시 기회를 허락할 터이니 관계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라!’하는 말씀이다.



* 다음 주제는 “창세기 족보의 의미”(창세기 4:17~5:3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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