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10] 바벨탑 이야기 - 창세기 11:1~9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10-18 21:28
조회
2385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10 (10/18) 바벨탑 이야기 - 창세기 11:1~9



1. 인간문명의 악한 속성에 대한 해명


홍수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에서 악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존재는 그 한편에 의인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선악이 혼재된 인간사회의 실상을 성서 기자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바벨탑 이야기는 성서 기자 당대의 경험하고 있는 인간문명의 악한 속성에 대한 통찰이다.

본래 ‘신의 문’을 뜻함과 동시에 ‘바빌론’을 지칭하는 ‘바벨’은, ‘혼란’을 뜻하는 히브리어 ‘발랄’과 발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쌓은 탑을 ‘바벨’이라 하고 거기에서부터 사람들이 흩어졌다는 성서 기자의 일종의 말장난은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비판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바벨 탑 이야기는 인간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자 동시에 그 문명의 밑바탕의 동기를 이루고 있는 부정적인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2.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바벨탑 이야기는 수많은 민족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흩어져 살게 된 사연을 전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속뜻은 겉으로 드러난 줄거리와는 달리 훨씬 깊은 데 있다. 이 이야기는 문명을 창조한 인간의 행위 그 자체가 매우 의도적인 동기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도시 건설에 관한 언급(4:17)은 그저 그 사실을 전하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악한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시사할 뿐이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 동기가 하나님에 대한 도전에 있음을 시사한다(11:4).  

서양 속담 가운데 “하나님은 시골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바벨탑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인위적인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도시문명의 특징이 무얼까? 한마디로 인위적인 규격화이다. ‘네모난 세상’. 모든 것이 직선과 네모로 구성되어 있는 곳이 도시다. 도로도, 건물도, 집도, 방도, 교실도, 책상도, 차도, 그 기본형을 그리자면 직선과 네모가 아닌 것이 없다. 세상은 네모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모두가 둥글게 되어 있고,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자연적 현상은 모두가 꼬불꼬불하게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직선과 네모는, 인간의 편의에 따른 인위적인 획일화의 결과이다. 벽돌을 굽고 탑을 쌓았다는 것은 바로 그 인위적인 조작의 상태를 말한다.

도시문명이 인위적인 것이라는 것은 그 공간의 형태가 인위적이라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관계, 사회질서까지도 인위적이고 규격화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시간까지도 그와 같이 통제되고 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까지 출근을 하거나 등교를 해서 일사분란하게 정해진 자리에서, 서열에 따라 맡겨진 일을 보고 다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차편을 이용해 들어오고 나가는 생활이 되풀이된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네모난 탁자에서 밥을 먹고 네모난 가방에 네모난 도시락을 넣고 직선으로 뻗은 길을 따라 네모난 차를 타고 네모난 기둥이 우뚝 선 교문 앞의 네모반듯한 규율부 앞을 지나 역시 평평하고 네모난 운동장 한켠을 직각으로 꺾어 들어가 네모난 책상에 앉아 네모난 칠판을 바라보며 공부하는 아이들은 네모난 세상에 익숙해진다. 그것이 도시적 삶, 도시문화의 실체다. 규격화된 시공간 안에 규격화된 인간적 질서가 자리하는 곳이 곧 도시다.

한마디로 획일적인 규격, 곧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곳이 도시공간이 상징하는 인위적인 시공간이다.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는 곧 권력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신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이다. 현대사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성서가 기록된 고대사회에서 이와 같은 권력의 속성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고대의 모든 권력은 노골적으로 예외없이 신의 권위를 대변한다고 자처했다. 모든 왕들은 신의 대변자로, 또는 화신으로, 아니면 왕 자체가 신으로 받들어졌다. 그와 같이 받들어진 권력자는 자신의 욕망을 사회의 보편적 가치로 강요한다. “짐의 말이 곧 법”이다. 하나의 가치,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현실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물나게 경험한 것이 바로 그러한 현실이었다. 이집트에서, 바빌론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의 여러 도시국가들에서 그와 같이 하나의 언어가 지배하는 현실을 이스라엘 백성은 신물나게 경험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이 무엇일까? 바로 분열과 갈등이다. 자신의 욕망을, 자신의 가치관을, 자신의 언어를 유일한 기준으로 제시하고 그 기준하에 모두가 통합되기를 바라지만, 그 결과는 거꾸로 분열이요 흩어짐이다. 하나의 가치관에 의한 통합은 획일화를 의미할 뿐 진정한 통일일 수 없다. 그리고 하나의 언어, 하나의 가치관에 의한 강제적 획일화는 필연적으로 분열을 낳을 수밖에 없다. 바벨탑 이야기는 그 진실을 전한다.


3. 다양한 목소리의 어울림


사도행전 2장에는 성령강림절 사건이 등장한다. 사도들과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함께 있는데, 성령이 임하셨다. 그런데 갈릴리 사람들이었던 사도들이 하는 말이 그곳에 모인 여러 다른 출신지역의 언어로 들렸다고 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갈라졌다고 했다. 대비되는 이 두 이야기는 진정으로 하나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보여 준다. 진정으로 하나되는 것은, 하나의 언어를 강요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여러 다른 언어를 보장하고 존중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강요했던 많은 일들을 알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소위 內鮮一體, 곧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은 같다고 하여 하나의 언어 곧 일본어를 강요한 것이다. 그 결과는 민족적 저항의 불길을 더욱 지피는 것이었고, 모국어에 대한 더 강렬한 애착이었다. 하나의 언어를 강요한 의도와는 정반대의 현상이었다.

생물종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이 우주의 온 생명이 보장될 수 있듯이, 문화와 언어의 다양성이 보장될 때 진정으로 하나되는 ‘지구촌’ 문화가 건설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에게든, 그 어떤 언어나 가치관에든 유일한 독점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성서는 그와 같이 독점권을 누리며,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는 야망을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욕망으로, 가장 큰 죄악으로 보고 있다. 우리 안에 지배의 욕망을 간직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목소리, 다른 사람의 언어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다른 사람의 탄식과 한숨 소리만을 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먼저 다른 사람의 언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열어두고 경청할 때, 우리는 다양한 목소리가 어울려 화음을 이루는 위대한 합창을 듣게 될 것이다.



* 다음 주제는 “길 떠나는 믿음 - 아브라함의 믿음”(창세기 11:10~12:9)입니다. 담임목사의 안식년 연수로 5주간 쉬었다가, 11월 29일(수)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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