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12] 길 떠나는 믿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 창세기 12:1~9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12-06 21:53
조회
2687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12 (12/6) 길 떠나는 믿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 창세기 12:1~9


1. 유랑하는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름은 본래 ‘아버지는 높임을 받는다’를 뜻하는 아브람이었다. 그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후 ‘열국(列國)의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라함으로 새 이름을 얻는다.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떠받들어지리라는 그의 이름의 뜻은 확실히 실현된 듯하다. 여러 민족이 서로 그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이름 값을 하고 있는 셈이며, 그것은 그의 영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로서 아브라함은 사실 고단한, 어쩌면 가련한 유랑민이었다. 아브라함은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최초로 그 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인물이다. 아마도 고대 바빌론의 유명한 왕인 함무라비보다 대략 200년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추정된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고대 수메르 시대(기원전 약 3000-2350), 아카드 시대(약 2350-2150), 신 수메르 시대(약 2050-1530), 그리고 함무라비 시대(1792-1750)를 포함한 고대 바빌론 시대(약 1830-1530)로 이어지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에서 대개 고대 바빌론 직전 신 수메르 시대 막바지쯤이 된다. 아브라함의 행적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갈데아 우르 지역에서 시작하여 하란과 세겜을 거쳐 가나안에 이른 여정을 보여준다. 이 경로는 비옥하기로 유명한 회랑지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지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착문명을 꽃피웠던 곳이며, 인류 최초의 문명 탄생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당대 세계 문명의 중심지였다. 문명을 상징하는 바벨탑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지구랏(하늘의 언덕, 신의 산)이 자리한 곳도 바로 그곳이다.

당대 세계 문명의 중심지가 아브라함의 고향이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 고향을 떠나 유랑을 시작한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아마도 후대의 성서 역사가들은 적어도 자기 민족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일종의 자긍심의 표현으로 그 사실을 강조했을 것이다. 애초에 근거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촌놈’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미화된 기억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떠도는 여정은 그와는 다른 실상을 드러내준다. 세계의 중심지에서 발붙일 곳이 없었던 사람이 열국의 조상 아브라함이었다. 모든 기회와 가능성이 다 주어진 곳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곳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는 어딘가에 땅을 소유하고 정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유랑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르를 떠난 아브라함은 오늘날 시리아 지역의 하란을 지나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한다. 가나안 지역의 세겜과 베델, 그리고 아이를 거쳐 네겝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기근을 만난 아브라함 일행은 이집트로 향한다.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이방인 신세로 이집트에서 목숨만을 건진 아브라함 일행은 다시 북상하여 가나안 지역의 네겝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베델 부근으로, 거기서 헤브론으로 그리고 브엘세바로, 그 종적을 좇기 어려울 정도로 이곳저곳을 유랑한다. 그의 삶은 정착지를 누리지 못했다. 끊임없이 길떠나는 여정일 뿐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자식 농사마저도 시원치 않았다. 그는 86세에 이집트인 여종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고(창세기 16:1 이하), 100세에 비로소 아내 사라에게서 이삭을 얻었다(창세기 21:1 이하). 이 사실들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의 처지를 웅변적으로 말해 준다. 유랑하는 중에도 그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쳐야 했으며, 아내가 죽었을 때에도 무덤으로 삼을 만한 변변한 땅 한 뙤기 갖고 있지 못하였다(창세기 23장).


2. 열국의 아버지, 복의 근원  


어느 순간부터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소유한 복의 근원으로 받들어지고, 이스라엘의 조상, 열국의 조상으로 받들어진다. 성서는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맨 선두에 아브라함을 위치시킨다(창세기 12-50장).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가 된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가나안 정착시대의 산물이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사실 처음부터 한 계보로 이어질 수 있는 조상이라기보다는 각기 다른 분파들의 조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저마다 유랑민의 무리를 이끈 이들이라는 점이다. 이 무리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후 가나안에 정착하여, 혈연적으로 재결합하고 통합된 사회단위를 구성하게 되었을 때 이들은 하나의 계보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정착사회가 다시 위계적인 질서(왕조)로 재편되었을 때, 그 계보는 그 질서와 그 바깥을 구분하는 확고한 지표로 몫을 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적법한 후예만이 복을 받는 민족이 되고, 그 밖의 사람들은 가련한 이방인들이 된다. 여기에서 오히려 ‘가련한’ 떠돌이들의 조상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소유한 민족의 시조로 돌변한 것이다. 예수와 초대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그와 같은 배타적 경계짓기를 거부하였다(누가복음 3:7-9; 누가복음 13:28; 요한복음 8:31절 이하 참조). 바울은 아브라함을 혈통의 조상으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의 배타적 경계짓기를 거부하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재해석한다(갈라디아서 3장; 로마서 4장). 그러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은 또 다시 그 아브라함을 경계짓기의 척도로 만들고 말았다. 그 ‘믿음’을 교리와 교회의 제도에 대한 순응으로 고착시킨 데서 비롯된 현상이다. 정착과 소유에 의한 경계짓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떠도는 유랑민의 조상들은 이렇게 해서 엉뚱하게도 가진 것을 지키려는 수호자로 돌변하고 말았다.


3. 길 떠나는 믿음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인’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하느님의 약속을 받고 믿음을 지켰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결단을 동반한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창세기 12:1)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따른 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사연이 있다. ‘네가 살고 있는 땅’, ‘네가 난 곳’, ‘너의 아버지의 집’은 지금까지 자신의 생활의 안정을 제공해준 바탕이며 조건이다. 이미 익숙한 것들이고 언제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다. 눈감아도 알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내가 보여주는 땅’은 낯선 곳이다. 하느님께는 환히 보일지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은 땅이다. 그것은 눈을 아무리 크게 떠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다. ‘네가 살고 있는 땅’이 이미 완결된 세계라면, ‘내가 보여줄 땅’은 열려 있는 가능성의 세계다. ‘네가 살고 있는 땅’에서 ‘내가 보여줄 땅’으로의 이동은 공간적 지리적 이동일 뿐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결단이다. 가능성을 믿고 확실하게 자신을 내던지는 결단이다.

그 한 번의 결단으로 수없이 많은 가능성이 다가온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그런 뜻이다. 그러한 결단을 감행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서는 것이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길 떠나는 믿음의 표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복의 근원이 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그 믿음의 결단을 본받는 것이어야 한다. 가능성을 향해 달리는 믿음은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놓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하지 않는다. 이미 주어져 있는 것보다는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더 큰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뭔가 결핍되어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순수해진다. 비어 있다고 느끼기에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것으로 채우려는 기대를 하고 노력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 다음 주제는 “이집트의 아브라함, 위기 앞에 선 인간”(창세기 12:10~20)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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