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13] 이집트의 아브라함, 위기에 처한 인간 - 창세기 12:10~20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12-13 22:16
조회
2290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13 (12/13) 이집트의 아브라함, 위기에 처한 인간 - 창세기 12:10~20


1. 이집트로 간 아브람


고향을 떠난 아브람이었지만, 어쩌면 그동안은 아직 전혀 낯선 땅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나안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되는 초승달 지대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넓은 의미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연장선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 지역의 남쪽 네겝에 이르면서 정말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가나안 지역, 특히 유다 남쪽 지역의 기근은 흔한 일이어 성서에 자주 등장한다(26:1; 43:1; 47:4; 룻기 1:1; 삼하 21:1; 열하 4:38; 8:1). 그 지역은 땅이 척박할 뿐 아니라 비도 충분히 내리지 않는다. 기근이 들자 아브람은 이집트로 내려간다. 가나안 지역에 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 또한 흔한 일이었다(26장; 41:54이하; 43장: 47:4). 이집트는 나일 강 덕분에 좀처럼 기근이 들지 않았다.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이집트는 놀라운 번영과 문화를 누리고 있던 시절로 추정된다. 이집트는 메소포타미아와 함께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서 영예를 누리고 있다. 때문에 성서의 세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더불어 이집트 문명을 중요한 배후로 하고 있다. 아마도 아브람이 이집트로 간 때는 이집트 중왕국(대략 기원전 2134~1786) 시대 제12왕조(1991~1786) 때로 추정된다. 이집트에는 고래로 역사의 부침이 있었지만, 이 시기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였고 번영을 누린 시기였다. 아브람이 발길을 내딛은 이집트는 마치 구원의 땅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고도로 발달한 문명과 풍요로운 경제는 그 어떤 사람이든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당시 이집트에는 이미 고왕국 시대(2664~2181)에 건설된 피라미드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것은 이집트의 위용과 그 통치자 파라오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2. 위기에 처한 아브람의 선택


그와 같은 위세 앞에서 아브람은 지레 겁을 먹었을 것이다. 아브람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선조답지 못하게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아직 이집트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아브람은 아내 사래에게 당부한다. 아내 사래의 미모 때문에 자신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이집트 사람들에게 누이라고 하기로 했다. 이에 대답하지 않는 사래는 암묵적으로 그 말에 동의했음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 목숨 부지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남편에 대한 침묵의 항변하고 있는 것일까? 성서는 뒤에서 사래가 아브람의 이복동생이라고 밝혀 아브람을 옹호하는 듯하지만(20:12), 부부관계로 있는 한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브람이 예상했던 일은 현실로 벌어지고 말았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이집트의 범부가 아니라 최고 권력자 파라오의 눈에 띤다. 아브람이 부딪힌 이 상황은 보상과 파멸의 극단적인 갈림길을 시사한다. 선택여하에 따라 죽을 수도 있고 반대로 목숨을 부지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집트로 나선 아브람에게는 처음부터 선택여부를 두고 갈등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찌 인간적인 고뇌가 없었을까? 그러나 성서가 전하는 이야기는 아브람이 처음부터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 덕에 아브람은 목숨을 부지했을 뿐 아니라 엄청난 보상을 받는다. 아내를 팔고(?) 파라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양과 소, 나귀, 낙타와 종까지 대가로 받는다. 단단히 한 몫 챙긴 셈이다.

사태의 반전은 갑작스러운 하나님의 개입으로 벌어진다. 하나님께서 애꿎은 파라오에게 재앙을 내린다. 그때서야 파라오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아브람을 크게 질책하고 사태를 원상태로 복귀한다. 그렇다고 파라오는 자신이 아브람에게 베풀었던 것을 환수하지 않는다. 고스란히 그대로 주어 안전하게 아브람이 이집트 땅을 떠나도록 조치한다.

아브람에게서 윤리적 갈등을 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도 전혀 안중에 없다. 최소한의 윤리적 갈등을 했다면 뭔가 묘책을 찾고자 궁리를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면 정면돌파를 시도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아브람은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아무런 모범이 되지 않는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후대의 이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3. 위기에 처한 인간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성서는 어째서 거룩한 이스라엘의 선조이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흠집이 되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공적에 따라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공적에 상관없이 은총을 베푸시고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해야 할 도리를 저버려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다. 곧 윤리부재의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윤리를 넘어선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 것이다. 위기에 처한 인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하나님의 개입을 말하는 것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마저 못한 사람이지만 그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 위기의 상황을 벗어나게 해 주는 하나님의 손길을, 이 이야기는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서술된 상황과는 정반대로 그 손길에 대한 믿음을 환기시킨다. 또 다시 실수를 반복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지켜나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 의미를 일깨워준다.




* 다음 주제는 “아브라함과 룻”(창세기 13:1~19)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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