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성난 민심을 달래려거든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8-06-05 22:14
조회
3426
* <천안신문>(2008.6.9) 종교인칼럼 원고입니다(080605).


성난 민심을 달래려거든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출애굽 사건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이다. 이집트에서 강제 노역을 당하던 히브리인들은 그 지도자 모세의 영도하에 약속의 땅으로 나서고자 한다. 하나님의 백성을 내보내달라는 모세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절대권력자 파라오는 완강하게 버틴다. 강물이 핏물로 변하여 그 물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재앙에서 시작하여 연이어지는 재앙을 만나면서도 파라오는 막무가내로 버틴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맏아들마저 죽음에 이르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해 히브리인들을 놓아준다. 재앙으로 자기 백성이 겪는 숱한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버티던 파라오가 그 재앙의 파급효과가 자신의 집안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절대권력자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이야기를 다시 음미하자니 오늘 우리의 현실과 그대로 겹친다. 미국과 쇠고기 협상을 다시 하라는 국민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정부는 그 뜻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중고등학생들, 그리고 어린 아이와 주부들까지 나서 연일 촛불을 밝히며 한 달이 넘도록 외치고 있는데도 대통령과 정부는 묘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혀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미봉책만을 내놓고 있을 뿐 아니라 이치에 합당하지도 않은 말로 둘러대며 사태를 호도하고 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야 국민들이 요구하는 주장의 진의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답답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말 끔찍한 재앙과도 같은 파국이 일어나야 대통령과 정부가 그 뜻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이 무엇이 문제이기에 국민들이 이렇게 목소리 높여 재협상을 요구하는지 깊이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검역주권을 포기한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은 국민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안겼다. 미국과 협상을 한 다른 모든 나라들이 확보한 검역주권을 한국 정부만 포기했으니 국민들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최소한의 국제적 통상 기준에도 벗어나 있으니 더 기가 막힐 노릇이다. 국민들은 지금 도대체 누구를 위한 대통령이며 정부인지 의심하며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사태의 핵심은 더더욱 심각한 데 있다. 지금 이 사태는 생명 자체의 안전에 대한 불안감을 강력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광우병 감염 위험이 아무리 확률적으로 낮다 하더라도 그 위험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누구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감은 비단 한국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광우병 발생 국가로부터 유입되는 쇠고기를 먹어야 하는 모든 나라 사람들의 문제이다. 자본의 극대 이윤 효과를 노리느라 농업과 축산업이 사실상 공업화되어버린 오늘 현실에서 안전한 먹거리의 문제는 모든 인류의 생존이 걸린 현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광우병 위험성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누구든 안전한 먹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정당한 권리를 재인식시켜주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그 점에서 지금 한국 국민들의 요구는 안전한 생명의 보장과 관련하여 세계적 보편성을 띤 과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그 사태의 핵심을 제대로 헤아려야 한다. 지금 성난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는 해법은 그나마 최소한의 안전을 위하여 검역주권을 확보하는 선에서 협상을 다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는 그것이 유일한 해법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과 정부는 그것만으로도 성난 민심을 달랠 수 있는 기회를 이미 놓쳤다. 지금 국민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저버린 국가가 무엇이든 못하겠느냐 의심하며 분노하고 있다. 이미 국민들의 평화적 촛불행진 가운데서 정권퇴진 구호가 가장 크게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현 정권의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다.


따라서 이제 성난 민심을 달래는 해법은 쇠고기 재협상은 물론 국정운영 전반을 쇄신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대책을 내놓고 시행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현 정권은 내내 불안정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국민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재앙은 다른 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요구를 무시한 국가권력이 일방통행하며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사태가 곧 재앙이다. 이명박 정권 5년이 제발 끔찍한 ‘재앙의 5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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