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창세기 2] 아름다운 세계, 아름다운 사람 - 창세기 1:1~2:3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7-05 21:17
조회
2363
천안 살림교회 수요 성서연구 10 <창세기 읽기>  

2006년 6월 21일부터 / 매주 수요일 저녁 7:30

최형묵 목사


2 (7/5-12) 아름다운 세계, 아름다운 사람 - 창세기 1:1~2:3


1. 오경과 여러 저자들


전통적으로 창세기, 출애굽기, 신명기, 레위기, 민수기는 모세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 내용상 또는 히브리성서의 전통분류법으로는 율법(‘토라’)에 해당하지만, 모세의 저작이라는 이유로 ‘모세오경’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모세오경은 모세라는 단일인물의 저작이 아니고 여러 저자들의 작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적어도 모세오경에는 네 명(또는 그 이상)의 저자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J(하나님의 이름 Jahweh에서 유래), E(하나님의 이름 Elohim에서 유래), D(신명기 Deutronomy에서 유래), P(사제를 뜻하는 Priest에서 유래)가 그 기자들이다.


2. 원역사와 태초의 세계


이스라엘 최초의 족장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에 앞서 기록된 창조 이야기에서부터 노아의 이야기까지(창세기 1~11장)를 원역사라 부른다. 이 이야기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보편적인 인류역사 한 가운데서 자신들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원역사의 첫머리에 창조 이야기가 등장한다. 창세기 1:1~2:3까지 이어지는 창조 이야기와 2:4이하의 창조 이야기는 명백히 다른 것으로 각각 P기자와 J기자의 작품으로 분류된다. 조화로운 창조의 질서를 강조하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는 바빌론 포로기 동안 사제 기자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포로기 동안의 이스라엘 민족의 세계관 또는 역사관을 반영한다.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에 포로 잡혀와 있던 이들이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고백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더욱이 그 창조의 질서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고백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것은 비참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도 저버리지 않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과 자의식을 드러내준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셨다. 그 세계는 완전한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세상이다. 그 안에 있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았다.’ 이 이야기는 세계의 기원에 관한 단순한 호기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절망스러운 세계 현실에서 강력한 희망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많은 부분 고대 근동과 이집트의 신화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이스라엘 신앙 안에서 재해석되고 재구성되었다. 통상 다른 신화들이 신들의 노예로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강조하는 반면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놀랍게도 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다른 신화와 다른 성서 창조 이야기가 보여주는 독특한 세계관이자 인간관이다.


3. 아름다운 세계, 아름다운 인간  


창조 이야기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며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 많지만, 아름다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 첫 번째 창조 이야기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인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해명해야 하는 몇 가지 중요한 초점을 지니고  있다.

1) 첫 번째로, 하나님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데 ‘우리’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우리’인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왔다. 한편에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된 것이 주후 4세기라는 점을 감안하여 여기서 ‘우리’라는 표현은 천상의 존재들, 곧 천사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말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성서적 신앙 이전에 다신교적 흔적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을 의미있게 이해하자면, ‘하나이면서 여럿’인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만물을 만드신 궁극적 존재로 하나의 원천이요 근거이지만, 동시에 세상 만물 안에 그리고 세상 만물을 통해 여러 얼굴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이다(참조: 에베소서 4:6).

2) 두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들 때 그 형상대로 만들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도대체 무얼 말하는지, 역시 주석가들은 논란을 거듭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 안에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속성 모두를 통틀어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본질을 말한다. 인간 안에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빛’이다.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하나이면서 여럿’이며, ‘여럿이면서 하나’인 하나님, 동시에 ‘하나이면서 여럿’이며, ‘여럿이면서 하나’인 세상 만물을 자각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특성을 말한다(참조: 떼이야르드 샤르뎅의 <인간현상>).

3) 각기 다른 여럿으로 존재하면서도 하나인 생명을 자각한 인간,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다른 피조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 몫을 한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세 번째 실마리이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창조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역할을 말한다. 그런데 모든 성서가 이 대목에서 한결같이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겨 왔던 서구인들은 바로 이 내용을 그러한 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복’과 ‘통치’는, 땅과 창조 세계에 관한 성서의 다른 내용과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의 몫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와 같이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들(카바쉬, 아바드, 롸다)은 ① ‘정복하다’, ‘지배하다’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② ‘봉사하다’,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다’, ‘돌보아주다’, ‘땅을 개간하다’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본문의 말씀은 분명해진다. ‘...땅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어라.’, ‘..모든 생물을 돌보아 주어라.’가 된다. 정복의 대상으로 밀쳐내야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껴안아야 하는 것이다. 땅과 생물과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당기며 끌며 살아야 하는 관계, 곧 사랑의 관계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그와 같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으로서 몫을 다하는 것이 된다. 생명계 안에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고리를 파괴하지 않고 돌보는 것이 인간의 몫이다.

4) 그러한 관계를 이루는 것이 인간의 생존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한 다른 생명의 파괴는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뜻을 헤아리는 네 번째 실마리이다.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허용된다. 여기서 피 있는 동물이 먹을거리로 허용되지 않고 식물로 제한된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씀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9장의 노아홍수 이야기에는 모든 동물들도 먹을거리로 허용한 것을 보면 성서가 꼭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이 본문에서 중요한 사실은 생존을 위한 먹거리를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질서 자체가 개별 생명의 죽음을 불가피하게 안을 수밖에 없지만, 인위적인 죽임, 남용과 과욕으로 인한 죽임은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과 관련하여 필요 이상의 과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 ‘나’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바로 그 ‘내'가 다른 생명들과 하나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각능력이며 그 자각에 따른 책임적 태도이다. 그리고 그 자각과 책임은 생명에 대한 사랑,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우리 모두의 사랑으로 꽃을 피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아름답게 지으시고, 그 안에 당신의 흔적을 새기셨다. 그리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다. 안식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한다.






* 다음 주간에 미처 끝내지 못한 부분(3절) 이어서 하고, 그 다음 주제는 “인간, 남자와 여자”(창세기 2:4-25)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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