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성문 밖의 예수를 따라 나선 신학자의 삶과 신학 - 『안병무 평전』서평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11-29 10:21
조회
4055
* <기독교사상> 2007년 12월호 원고입니다(071113).


성문 밖의 예수를 따라 나선 신학자의 삶과 신학

- 김남일, 『민중신학자 안병무 평전 - 성문 밖에서 예수를 말하다』(사계절) 서평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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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와 증언』, 내가 안병무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서였다. 1980년 ‘서울의 봄’, 유난히 화사했던 그 봄이 지나고 신학도로서 길을 선택한 그해 말쯤이었다. 위축된 재수생 시절이었지만, ‘서울의 봄’의 흥분에서 비켜갈 수 없었고, 이어진 ‘5월 광주’ 비극의 소식에 귀 막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훗날 민중운동의 전환기로 기록된 그 시절 개인적으로도 전환기였다. 그 때 『역사와 증언』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 책이 1972년에 나왔으니까 1970년대를 살았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책의 감화를 받았겠지만, 때마침 전환기에 나도 그 감화를 받은 젊은이들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었다. 현실 교회의 신앙에서 그저 믿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성서는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성서는 이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말을 던지고 있는 책으로 새롭게 보였고, 그 새로운 인식은 막 신학에 입문한 나의 길잡이가 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곧바로 읽은『해방자 예수』는 역사적 지평에서 펼쳐져야 할 구원의 의미를 깨우쳐 주었다. 여기저기서 뒤져 읽던 서남동 선생과 문동환 선생 등의 글들과 함께 안병무 선생의 글들은 이미 나의 신학적 사고의 바탕을 형성해 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1982년 4월이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안병무 선생의 얼굴을 뵙고 그 육성을 들을 수 있었다. 혜화동 성당에서 열린 4.19혁명기념 강연회에서였다. 4.19혁명의 정신과 부활의 의미를 설파했던 선생의 강연이 끝나자 성당 안을 가득 메웠던 학생들은 곧바로 거리로 뛰쳐나가 “군부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 체험과 함께 선생의 말씀과 그 인상이 늘 기억되었다. 선생은 늘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 서 정의를 외치는 예언자와 같은 모습으로 기억되었다.

선생을 가까이 뵐 수 있게 된 것은 대학 졸업 후 용두동 한국신학연구소의 월례 연구모임의 말석을 차지하고, 이어 『민중신학 이야기』최초의 녹취록을 작성하는 역할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때 받은 인상은, 도로테아 슈바이쳐의 회상대로 “쉽지 않아요. 까다로워요. 그렇지만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아울러 존경해야 할 사람”이라는 인상 딱 그것이었다. 선생께서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고 다정다감하기도 하다는 것을 내가 느끼게 된 것은 훗날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신학사상』 편집과 함께 연구원으로 일하면서부터였다.

평전에 대한 서평을 써야 하는 마당에 선생과의 인연을 회상하는 감회가 어지럽다. 청탁을 받고 선뜻 답했지만 정독을 한 후 책장을 덮고 나니 자신이 없어졌다. 평을 하자면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할 텐데, 그저 빨려 들어가기만 하고 말았으니 어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작가의 역량이 배어나는 필치의 마력 때문인지, 안병무의 삶과 신학이 끄는 힘 때문인지, 아니면 선생과의 인연이 잡아당기는 힘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 모두가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사연들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해야만 서평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게 쉽지 않다. 선생께서 돌아가시던 해 1996년 봄 아우내에서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내 손을 꽉 잡았던 일, 그리고 내가 한국신학연구소를 떠나면서 보낸 편지에 잊을세라 곧바로 써 보내신 답신의 말씀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고, 지금 18년째 살고 있는 집도 선생과의 인연의 소산이요, 개척한 교회 이름마저 ‘살림’교회이니 선생과의 인연은 거리를 둘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이렇게나마 어설프게 회상하는 것만으로 먼저 선생의 평전에 대한 논평자의 자리를 잡아보려는 시도로 헤아려 주기를 바랄 뿐이다.


2.

            

이제 작가의 역량이 배어나는 필치로 그려진 안병무의 삶과 신학에 대해 말해야 할 차례이다. 책이 나온 직후 한 신문기사를 보니 작가는 “그냥 전기로 할까 생각하다 그래도 평전 쪽으로 갔다”고 밝혔다. 그 까닭은 “시대적 맥락을 짚어줘야겠다”는 것이었다.

과문한 나로서는 문학 장르로서 전기와 평전을 구분할 때 작가의 시도상 어떤 차별성이 있는지, 실제 작가가 어떤 차별성을 유념했는지 잘 모른다. 그저 사전적 의미로 구별되는 그 특징을 대략 가늠할 뿐이다. 아마도 전기라면 매우 세부적인 개인사의 족적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작가적 상상력보다는 일차적으로 주인공이 되는 인물의 전모를 그리는 데 필요한 기초자료들에 의존해야 한다. 자료와 기억을 재현하는 구술 등 그 기초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무척 지난한 일이다. 평전이라면 주인공의 주요 업적을 따라가며 그 의미를 평가하는 것이기에 기초자료 수집의 압박이 상대적으로 가벼울 수 있다. 주요한 업적들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위한 일관된 시각과 작가의 상상력에 따른 재량권이 오히려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일관된 시각과 상상력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짜임새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작가적 역량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겠지만, 요컨대 전기는 주인공의 삶 자체가 지니는 극적인 요소가 저절로 드러날 수 있는 반면 평전은 상대적으로 작가의 공력이 더 요구된다. 평전은 자료수집의 무거운 압박을 상대적으로 더는 대신에 주인공의 존재의 의미를 보편적 지평에서 설득력 있게 평가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는다. 설령 하나의 시각에 따른 평가일지언정 그 평전은 일정하게 보편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더욱이 작가가 밝히고 있다시피 시대적 맥락을 짚겠다고 했을 때 그 성격은 더욱 분명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평전으로서 성공을 거두었는가? 성급한 물음에 답하자면, ‘그렇다’이다. 이 책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삶과 신학, 그리고 동시에 도도하게 흐르는 현대 한국 민중사의 맥을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주객도식의 극복’,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현실’, 안병무 선생에게서 익히 듣던 그 이야기 그대로 현대 한국 민중사와 분리되지 않은 안병무의 삶과 신학이 이 책 속에 살아 있다.    

결례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작가는 소설가답지 않게 학구적이다. 게다가 스스로 무신론자요 종교 맹탕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논의들을 소화해내는 능력과 안목이 놀랍다. 아무리 선생께서 종교 맹탕들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언어로 이야기했다고 하더라도 일생에 걸친 신학적 사고의 궤적을 소화하는 것은 작가의 혜안과 역량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와 같은 신학도들은 한 신학자의 삶과 신학, 그리고 시대적 맥락을 아울러 직조해낸 작가의 능력에 감탄할 뿐이며 동시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펄펄 뛰는 신학을 다시 대할 수 있다니!

이 평전은 매우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기왕에 나온 안병무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자전적 회상기 『선천댁』, 그리고 김명수 교수의 평전 『안병무』에 크게 덕을 본 연유이리라. 크게 보아 연대기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이 책의 각 장에는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중심개념들이 있다. 날줄씨줄 또는 전체 구조를 형성하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들로, 평생 선생의 삶과 신학을 가능하게 해 준 주요 축들이다. ‘어머니’, ‘예수’, ‘민중’이 그것이다.

아마도 흔히 알고 있는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삶과 신학을 집약한다면 ‘예수와 민중’이 될 것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신학적 여정의 귀결로서 민중을 만나고 마침내 민중신학을 꽃피운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선생의 살아생전에 ‘어머니’는 적어도 공표된 의미에서 신학적 의의는 지니지 않았다. 돌아가시던 해 선생께서 쓴 『선천댁』 덕분에 ‘어머니’가 그의 삶과 신학에서 차지하는 의의가 밝혀졌다. 선생은 마치 그간의 신학을 총결산이라도 하듯, 민중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작정하고 그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때서야 밝혀졌지만, 안병무의 삶과 신학에서 ‘어머니’는 원초적인 민중사건이었다. 기존의 도그마적 신학에서는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어머니’, ‘예수’, ‘민중’은 사건 안에서 하나가 되고 있다. 언어를 빼앗기고 희생을 강요당하는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어느 순간 자기를 초월하는 사건의 주체로서 이들은 모두 하나가 된다. 그 사건의 체험을 안병무는 증언했고 그것이 민중신학이 되었다.

평전은 그 일련의 과정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되살려 놓되, 상당한 공력으로 신학적 논증을 펼친다. 작가가 서술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살아 있는 신학의 진면목을 제대로 터득하게 된다. 애초부터 신학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수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따라야겠다는 안병무 선생의 태도에서 그 살아 있는 신학이 나왔다 하더라도 사후평가는 일정하게 박제화의 위험을 지닌다. 작가는 그 위험을 뛰어넘는다. 선생의 저작만을 통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었던 시대적 맥락을 밝혀냄으로써 선생의 신학을 진짜로 되살려낸다. 그렇게 되살리는 일은 단순히 신학적 언술의 배경으로서 시대적 맥락을 덧붙임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시대적 맥락과 신학적 함의를 동시에 파악할 때 가능한 것이다. 작가가 학구적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그 학구적 탐구의 태도가 결코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을 훼손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 대목 예를 들자면, 1980년 5월 광주 이후 충격으로 쓰러진 후 선생의 일시적 실어증과 당시 민중의 실어증을 중의적으로 그려낸 대목은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딱 잘라 말해 이 평전은 문학적이며 동시에 학구적이다. 쉽게 말해 읽는 재미가 있고 그 내용의 깊이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살았던 한 인물의 초상을 인상깊게 그려내고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신학의 의미를 깨우치기에 또한 부족함이 없다. 나아가 안병무의 신학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민중의 고통이 심화되고 오늘 현실에서 여전히 타당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만든다.  

              

3.


괜한 트집 잡기일까? 서평을 맡아놓고도 그저 빠져들기만 해 어쩔 줄 몰랐는데, 작가에게 경의와 고마움을 표하고 나니 비로소 할 말이 떠오른다.

이 평전은 대체적으로 안병무 선생의 삶과 신학에 대해 해체적 독법에 충실한 것 같다. 일차적으로 그 원인은 안병무 선생의 삶과 신학 자체로부터 기인한다. “생래적으로 전체주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선생은 도그마, 체제, 권위 등과 철저히 대결했다. 성문 밖에서 신학의 역사를 쓰고,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의 삶을 지향했던 선생은 늘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했다. 이와 같은 선생의 삶과 신학 자체의 성격으로부터 볼 때 해체적 독법은 그 삶과 신학의 급진성을 드러내주는 정당한 독법일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삶과 신학에는 기존의 체제를 급진적으로 해체하는 성격과 동시에 뭔가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하는 성격이 늘 긴장하고 있다. 김진호의 말을 빌자면, ‘자기를 비우고 타인을 채움으로써’ 자기를 초월하는 ‘어머니’와 ‘자신을 채움으로써’ 자기를 초월하는 ‘아버지’의 긴장인지도 모른다. 작가도 감지했듯이 애초 부정의 대상이었던 것만으로 여겨졌던 ‘아버지’는 은연중 영향을 끼친다. ‘언문족’ 어머니와는 다른 ‘한문족’ 아버지의 잔영일 뿐일까?

선생은 언제나 뭔가를 계획하고 만들었다. 예컨대 현실 교회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고 했지만, 교회와의 인연을 끊은 적이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데 관여했다. 교수직에서 해직되었을 때에도 해직교수들을 위한 조직을 꾸렸다. 항상 당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매체를 만들었고 연구소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목사가 아니었지만 목사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고 부러움을 살 만한 제자군을 거느렸다. 조직가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성공한 운동가의 면모를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선생은 언제나 시대와 소통하는 언어를 개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설파하기에 바빴지만, 이 시대의 언어로 그것을 매개하기 위해 애를 썼다. 1980년대 ‘공’(公)을 말함으로써 민중신학의 사회윤리적 단초를 마련한 것은 일례이다. 그것은 물론 선생이 그토록 부정했던 기존의 윤리에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와 공감할 수 있는 민중신학의 새로운 윤리의 모색이었던 것이다. 1990년대 ‘생명’과 ‘살림’을 역설한 것조차도 시대와 소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생의 말년에 갑작스럽게 신학의 지평을 확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화두, 시대의 언어에 민감한 선생의 반응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안 그런 척 했지만, 선생은 항상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방도를 고심했다.

평전에서 상대적으로 의미부여를 받지 못한 선생의 이와 같은 면모는 안병무의 삶과 신학을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점에서나, 오늘의 민중 현실에서 신학적 대안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끝으로 정정해야 할 오류 몇 가지를 지적해야겠다. 첫째, 평전 167쪽『역사와 증언』집필 시기 1972년은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 초판 출간 시기가 1972년 4월이므로, 집필 시기는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이다. 그 집필 시기가 여름 휴가철이었다면 1971년이 아닐까? 둘째, 259쪽의 단순한 문장상의 오류이다. 뒷 문장에는 이름이 밝혀져 있는데 앞 문장에 이름이 대명사로 처리되어 있다. 중간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그는...”으로 시작되는 문장에서 ‘그’는 인용 내용의 저자인 ‘김진호’로 정정되어야 할 것 같다. 셋째, 271쪽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장례식장에서의 문익환 목사의 조사를 서술하는 부분은 약간의 오해 소지가 있다. 장례식이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것으로 기술되었고, 그곳에서 문익환 목사가 명연설을 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날 장례식은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열렸고 문익환 목사가 그 유명한 조사를 한 것도 그곳에서였다. 그 장례식이 끝나고 백만 인파의 행렬이 서울시청까지 이어졌다. 이상의 지적 사항은 의도하지 않은 오류일 터이므로, 곧바로 정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작가의 노고에 경의를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깊은 사의를 표하고 싶다. 작가는 무지를 변명했지만, 그 무지는 안다고 자처하는 이들의 편견보다 훨씬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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