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대안적 목회 지도력 모색을 위하여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12-21 11:06
조회
4848
한국에큐메니칼연합교회 제2기 에큐메니칼 신학원

2007년 12월 17(월)일-19(수)일 / 정보통신부 지리산 수련원

제2섹션: 대안적 목회 지도력을 모색하는 한국 및 세계 교회 속의 사례연구

담당: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대안적 목회 지도력 모색을 위하여



1. 목회 지도력의 범위


우리가 굳이 ‘목회 지도력’이라 말할 때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아마도 목회자의 역할을 말한다면 매우 광범위하게 그 기대되는 역할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목회자상을 이야기한다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 내지는 교회의 사명과 관련하여 대단히 폭넓은 차원에서 그 역할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말하는 ‘목회 지도력’은 그 폭을 무한히 넓힌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제한된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일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교회)공동체 내적 차원에서의 지도력’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공동체내적 지도력이 그 외적 지도력과 무관할 수는 없기에 목회자의 전반적인 역할을 유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다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목회자의 (교회)공동체 내적 지도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2. 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목회자상


폭넓은 의미에서 목회자상을 그려본다면, 아마도 구약성서 시대의 전형적인 지도력의 세 가지 형태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목자’라는 표상으로 알려진 삼중직 곧 왕, 제사장, 예언자를 말한다.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유대교와 기독교의 연속성 안에서 그 삼중직은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오늘날 기독교의 목회자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만큼 오늘의 목회 지도력을 모색하는 데 참조할 필요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지도력의 유형을 오늘날 목회 지도력을 모색하는 데 직접적으로 원용하는 것은 논의의 차원을 지나치게 일반화할 우려도 있고, 또한 일정 부분 시대착오의 위험도 있다. 특히 왕권 모형과 같은 경우는 현실적으로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대안적 목회 지도력과는 상관없다. 따라서 구약성서 시대의 지도력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면 참조할 수 있을 뿐, 오늘날 대안적 목회 지도력을 모색하는 데 하나의 유형으로 삼을 이유는 별로 없다.

우리의 논의는 (교회)공동체 회중의 지도자로서 기독교 시대 이후의 목회 지도력의 유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1) 초대교회의 섬김의 지도력

초대교회의 목회 지도력을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말씀 전파의 임무를 맡은 사도직과 구제의 역할을 맡은 집사직의 이중구조이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도 구조화되어 있을 만큼 그 역할의 분할 구도는 전형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본격적으로 제도화하기 이전의 초대교회 목회 지도력의 형태는 조금 더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사도 시대에는 사도와 집사라는 이중직이 비교적 분명한 듯해 보이지만, 사도 시대 이후에는 감독, 장로, 집사 등이 혼재되어 있고 그 역할 또한 처음부터 분명하게 분화된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제도상의 역할 분화가 명확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닌 것 같고,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차 제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집사직은 비교적 분명하게 그 역할이 확정되었지만, 감독과 장로 등의 역할은 한 동안 혼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대교회 목회 지도력의 호칭과 역할이 혼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의 기본 모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은 두 말할 것 없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에 목회를 일컫는 말로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은 ‘디아코니아’(diakonia)였다. 오늘날 ‘섬김’ 또는 ‘봉사’로 이해되는 본래 ‘먼지를 통하여’라는 뜻을 지닌 말로, 초대교회 시대 교회의 사역과 그 사역자들을 일컫는 데 가장 널리 사용된 말이다.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diakonos)도 이로부터 유래하는데, 당시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오늘날 ‘웨이터’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통용되었다. ‘감독’은 그 웨이터들의 반장(head-waiter)격에 해당하였다. 이와 같은 용어법은 초대교회가 교회의 직무를 전혀 권위적인 지도력과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교회의 사역자를 ‘종’(doulos)으로 부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와 같은 섬김의 직무로서 교회 사역은 제도화된 교회에서 역할의 분화와 함께 위계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초기에 감독-집사 또는 장로-집사 이중직의 구조는 점차 감독-장로-집사(또는 주교-사제-부제) 삼중직으로 정착화되었다.


2) 중세교회의 성별된 사제직으로서 목회 지도력

중세교회에서 목회적 지도력은 절대적으로 성별된 사제직이 되었다. 초대교회에서 목회적 지도력은 특정한 공동체 내부에 국한되었고, 개인적인 사유로 목회직을 사임하면 공동체 내의 평신도로 되돌아갔다. 반면에 중세시대에는 개별 교회와 상관없이 성직은 절대적으로 성별되었다. 절대적으로 성별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독립된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목회적 지도력 역시 성별의 임무 곧 성례전의 집전을 그 고유성으로 하였다. 사제로서 성별하는 의식에 해당하는 신품 성사 밖에 세례, 견진, 혼인, 성체, 고해, 종부 성사 등을 통해 사제들은 회중의 삶을 전적으로 지배하였다.  

교회 회중의 입장에서 볼 때 중세교회의 목회적 지도력은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일 뿐이었다. 성별된 사제들은 종교적으로 하느님의 대리자였고 신분상으로 사실상 통치자였다. 이와 같은 성별된 사제직으로서 목회적 지도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물론 성서, 그리고 교부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성직자의 여러 덕목들이 있다. 따라서 성직자들은 교회의 제도가 보장하는 외적 권위에 의해서만 성직을 수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성직자들은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덕목들을 실현하도록 권유받고 실제로 그 덕목들을 실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 개별 교회공동체와는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성별된 직무를 수행하는 성직자들에게 개별적 차원에서의 덕목의 실현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었을까? 외적 권위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치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해 시대적 제약과 그 제약 안에서의 위계적 교회구조의 한계를 걷어내고 나면 보편적인 목회 지도력으로 새삼 평가할 수 있는 의의를 지닐까? 외부로부터 주어진 권위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의 합의에 따른 권위를 중요시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재평가할 만한 요인들을 과연 지니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른바 ‘목회적/사목적 권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에 지나지 않을까?

어찌 보면 불필요한 우문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지도력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새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도력이 따라야 할 모범의 전형라면, 교회공동체 회중과 별개로 주어진 성직자의 지도력과 덕목은 여전히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도력이 공동체의 내적 관계 안에서 형성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면, 과거 중세시대 성직자의 지도력은 별로 참고할 만한 것이 못될지도 모른다.


3) 종교개혁기, 회중 가운데서 말씀 선포를 중요 직무로 하는 목회 지도력

종교개혁기의 목회 지도력은 교회공동체의 회중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모색된다.

잘 알려진 대로 종교개혁자 루터는 만인사제직을 주장하였다. 루터는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성별되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영적 신분에 속하며 그들 사이에는 직책의 차이 이외 다른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직책의 차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루터는 모든 신자가 사제이기는 하지만 말씀을 가르치는 교직자를 인정하고 그들은 합법적인 부름에 의해 교직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즉 방편에 의해 혹은 방편 없이 부르신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말씀의 사역자로 중개적인 부름에 의해, 즉 방편을 통해, 즉 인간을 통해 오는 부름에 의해 부른다.” 루터는 교회 제도의 필요성과 그 제도에 따른 합법적 교직을 구별된 역할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교직에 임하는 것이 회중의 동의를 따라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외부적인 권위에 의해 주어진 중세적 교회의 성직자 임직과는 다른 절차로서, 회중의 대표로서 목회자의 성격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칼빈은 목회자의 역할을, “공적으로 사적으로 가르치고 훈계하고, 권면하고 책망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과 성례를 집례하는 것과 장로들 및 동역자들과 함께 형제로서 교정을 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칼빈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부름[소명]의 의의를 강조하였는데, 목사 자신이 하느님 앞에 부름 받았다고 의식하는 내적 부름과 함께 교회가 목회자로서 부르는 외적 부름을 말함으로써 교회공동체 회중 안에서 인정되는 목회 지도력을 말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공통적으로 성서주의에 입각해 말씀의 해석과 선포, 그리고 그 말씀에 기초하여 회중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목회자의 중요한 직무로 보았다. 성례전의 집례 역시 여전히 중요한 직무에 해당하지만 그 역할은 최소화되었고(세례와 성만찬), 말씀 선포가 가장 중요한 직무가 되었다. 오늘날 말씀 중심의 개신교 예배는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만인사제직이라는 신학적 입장과 함께 회중의 부름을 받는 절차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별된 성직으로서 목회자의 지위나 말씀 선포자로서 목회자의 역할은 목회적 지도력이 전적으로 공동체 내적 관계에 의해서만 좌우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까닭에 근대 이후에는 보다 다양한 급진적인 교회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4) 근현대 교회의 다양한 목회 지도력

근현대에 들어서는 매우 다양한 목회 지도력의 형태가 등장하였다. 이것은 세속화된 세계의 상황, 이전의 기독교 세계를 벗어난 비기독교 세계 안에서의 교회의 존재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과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 세계의 확장과 함께 복음 전도자로서 목회자의 역할이 부각되기도 하였고, 근대화의 과정 안에서 발생한 사회적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회적 실천가로서 목회자 역할이 중요시 되는가 하면, 세속화에 대응하여 근본주의적으로 교리와 교회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교회 수호자로서 목회자 역할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모든 목회 지도력의 유형은, 구별된 성직으로서 목회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한 교회의 역사에서 전승된 성례전의 집전과 말씀 선포를 고유 역할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근현대 이후 교회사에서는 성별된 목회직을 제도화하지 않은 여러 소종파들 내지는 공동체들이 다양하게 탄생하여 다양한 목회적 지도력의 형태들이 등장하였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별된 교직으로서 목회적 지도력은 아니지만, 공동체의 지도력으로서 사실상 목회직을 수행한 지도력의 유형들을 중요하게 평가하고 참고할 필요가 있다.


3. 대안적 목회 지도력의 모색


우리가 대안적 목회 지도력을 말할 때,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것은 그 목회 지도력을 따라야 할 어떤 모범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때 목회 지도력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모범적 모형이다. 목회 지도력은 목회자가 회중과 상관없이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권위와 능력에 해당하는 셈이다. 아마도 우리가 목회 지도력을 유형화해보고자 하는 유혹을 느끼는 것도 그와 같은 전제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대안적 목회 지도력이 그와 같이 객관화할 수 있는 대상일까? 우리는 오늘날 진정한 지도력을 단순히 독립된 지도자의 권위와 역량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공동체 내지는 회중과의 관계 안에서의 역동적인 힘으로 파악하려는 견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민주주의적 가치가 보다 광범위하게 일반화되는 가운데 흔히 이야기되는 지도력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섬김의 지도력”(servant leadership)이다. 사실 ‘섬김’과 ‘지도력’은 그 개념 자체로는 모순된다. 누군가를 이끄는 힘을 지도력이라 보는 관점에서 누군가를 섬기는 일은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슴없이 “섬김의 지도력”을 말하는 것은 ‘지도력’의 의미 자체를 달리 보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이미 주어진 능력으로 대상화할 수 있고 따라서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으로 간주되는 지도력의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 내지는 회중을 역동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서 지도력의 개념을 변화시킬 때 가능한 표현이다.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대안적 목회 지도력은 그런 것이 아닐까? 흔히 “섬김의 지도력”의 모형으로 예수와 그 공동체가 이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렇다면 대안적 목회 지도력은 따라야 할 모범으로서 제시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각각의 공동체에서 고유하게 찾아져야 할 어떤 것이 된다. 물론 지도자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와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목회적 지도력의 전례들을 끊임없이 참고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와 그 공동체를 한 전형적인 모형으로 간주하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하지만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대안적 목회 지도력의 모색은 이미 존재했던 어떤 유형을 살펴보는 데서보다는 지금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노력을 기울이는 데서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각각의 공동체 안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그것을 함께 이야기해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대안적 목회 지도력의 유형을 살펴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교회 역사를 통해 주어져 있는 목회자의 고유한 직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방기되어야 할 과제는 아니다. 보다 급진적으로 사유할 것 같으면 전통적인 직무를 폐기하거나 공동의 직무로 돌리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그와 같이 급진적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고 절충적으로 시도하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이 전통적인 교회와 전적으로 결별하지 않은 상황 가운데서 전통적인 목회자의 고유 직무와 대안적인 목회 지도력 형성을 결합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과제이다. 예컨대 위로자, 심방자로서 목회자의 직무는 사실상 오늘의 교회 안에서 상당 부분 분담되고 있지만, 성례전 집례자, 설교자로서 목회자의 직무는 배타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와 같은 직무와 대안적 목회 지도력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4. (변명) 대안적 목회 지도력의 사례들  


원래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세계 교회 및 한국 교회 안에서 대안적인 목회 지도력의 사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대안적 목회 지도력에 관한 일반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 과제였다. 초대 교회의 여러 교부들, 중세 교회의 성자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과 근현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대표할 만한 목회 지도력의 유형, 또한 나아가 한국 교회 안에서 귀감으로 삼을 만한 목회 지도력의 유형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과제이다.

하지만 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일반론적인 고찰과 함께 우리의 과제를 환기시키는 것에 머물고 말았다. 그 까닭은 이미 대상화할 수 있는 목회 지도력의 유형을 살펴보는 일이 부차적 과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정 때문은 아니다. 공동체 내적 차원에서의 지도력, 특히 공동체 관계 안에서의 지도력을 모색한다고 했을 때, 어떤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지도력과 그 공동체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인데 짧은 시간 안에 그 과제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인물의 교회사적 신학사적 의의를 평가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지만, 목회 지도력을 평가하는 일은 전기적 사실을 기초 자료로 삼아야 하기에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인물들의 전기적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탓에 사례를 분석하는 일은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을 변명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전기적 사실들을 들추어낼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감히 함께 사례 분석에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의 논의는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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