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가난하게 맞는 성탄절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12-21 19:47
조회
3755
* <한국일보> 2007년 12월 22일(토) 시론입니다.  


가난하게 맞는 성탄절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전 세계 자원의 70퍼센트를 소비하는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에서 성탄절로 이어지는 한 한 달간 한 해에 팔리는 상품의 40퍼센트가 팔린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 경제적 수치로 따지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의미 있는 어떤 추세를 보일 것이다. 적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성탄절이 풍요와 소비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있는 양상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 예수와는 상관없이 풍요와 소비의 이미지와 결합된 성탄절의 운명은 어쩌면 그 기원에서부터 유래하는지도 모른다.


기독교가 탄생한 이래 300여 년 동안 예수의 생일은 특별히 기억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부활절이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2월 25일이 예수 탄생일로 공식 지정된 것은 4세기 교황 율리우스 1세 때부터였다. 그것은 역사적 고증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지중해 연안과 유럽 지역의 전통적 축제를 기독교의 축제로 바꾼 것이었다.


동지에 해당하는 이 절기에는 원래 농업과 풍요의 신 사투르누스 또는 태양신 아폴론을 기리는 축제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북유럽에서는 빛의 축제가 열렸다. 포도주와 맥주가 제 맛을 내는 때이기도 했고, 한 해중 가장 많은 소를 잡아 평소 고기 구경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고기를 즐길 수 있는 절기이기도 했다. 가장 풍요로운 이 시기가 가장 커다란 축복의 사건인 예수 탄생을 기리는 절기가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성탄절을 지정한 교회의 의도는 기존의 이교 문화를 새로운 기독교 문화로 바꾸고자 한 데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절기에 부유한 사람들과 교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상의 음식을 대접하면서 예수 탄생의 의미를 기렸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시기에 이제 새로운 빛이 온 세상을 비춘다는 의미를 그렇게 구현했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 풍요를 향한 갈망은 너무나 본능적인 탓일까? 풍요 제의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이타적 사랑을 실천한 예수의 삶을 기리는 것보다 풍요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앞서는 성탄절의 풍경이 일상화되었다. 더 많은 소비가 미덕이 되어버린 오늘 자본주의적 삶의 현실에서 성탄절은 경제를 추동하는 중요한 한 계기라 할 만한 지경에 이르렀다. 성탄절이 판매와 소비의 축제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이야기일까? 아기 예수께 드려졌던 동방박사의 선물, 가난한 집의 딸들을 구해낸 성 니콜라스의 선물은 이제 자본주의적 욕망을 부추기는 기호로 와전되어버렸다.


기쁨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선의를 힐책할 까닭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선물을 주고받으며 즐기는 것이 상품의 유통을 촉진하는 메커니즘에 매여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저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구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성탄절이 그렇게 자족적인 기쁨을 누리는 기회로만 환기되고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예수 탄생과는 상관없다. 풍요 제의로 환원된 성탄절일 뿐이다.


경제성장이 지상 가치가 되어버린 오늘 현실에서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기 예수의 탄생은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 갈릴리 나사렛의 가난한 한 여인의 몸을 통해 아기 예수는 탄생했고, 들판에서 밤을 지새며 양을 치던 목동들이 그의 탄생을 가장 먼저 반겼다. 바로 그 가난한 사람들의 자리에서라야 우리는 성탄절의 참 뜻을 새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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