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민주화 20년, 그리고 삶으로서 민주주의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6-22 11:46
조회
3423
* 한국기독교장로회 <장로회 회보> 원고(070616)


민주화 20년, 그리고 삶으로서 민주주의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총회 교회와사회위원회 서기)

  


1.

1987년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넘기고 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1987년 6월 10일을 전 국민 저항의 날로 삼았다. 그 날은 신군부 중심의 민정당이 노태우를 대통령후보로 선출함으로써 전두환으로부터 이어지는 권력을 공식 승계하는 날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국민들은 바로 그 날 서울 시청의 시계가 12시를 가리키는 순간 바로 그 곁 성공회 대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행진을 시작했다.

물론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은 단 하루의 국민적 궐기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연초에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독재의 지속을 획책하는 4.13 호헌선언으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이 더욱 거세어지는 가운데 6월 항쟁이 큰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연세대생 이한열군의 최루탄 피격 사망으로 독재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6월이 지나고 7월에 이르기까지도 지속되었다. 결국 국민적 저항에 부딪힌 정권은 직선제 개헌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제도화 과정에 진입하게 되었다.

한국의 민주화는 세계사적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반 우리는 매우 불쾌한 세계의 입 방아질에 모욕당하고 있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인은 들쥐와 같아서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면 그 뒤에 줄줄이 서게 되어 있다는 주장으로 전두환을 지지했는가 하면, 영국의 어떤 언론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이뤄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장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1980년 5월 광주항쟁에 이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뤄냈다. 세계는 경제적 성장과 함께 민주화를 이뤄낸 보기 드문 사례로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모든 영역에서 놀라울 정도로 진전되었다.


2.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2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한국의 민주화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뒷걸음을 치고 있다. 정치제도적 절차상으로 민주화는 확실히 진전되었지만, 모든 국민의 기회 균등과 동등한 시민적 주체로서 서게 만드는 실질적 조건의 기반은 급속히 와해되고 있다. 실업률과 경제적 양극화가 계속 증대되고 있고, 그와 같은 경제적 형편의 악화로 대다수 사람들은 민주화의 열매를 체감하고 있지 못하다. 민주화의 최대 수혜자는 재벌과 언론일 뿐 일반 국민은 아니라는 평가는 오늘 한국 민주화의 현실을 잘 말해 준다. 절차적 민주화는 이뤄졌지만 실질적 민주화는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째서 그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보수세력과의 타협을 통한 민주화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6월 항쟁에 이어 7~8월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졌지만, 그것이 노동자들만의 투쟁으로 끝나고 말았던 현실은 처음부터 이후 한국 민주화의 한계를 시사한다. 또한 민주화 세력이 곧바로 정권교체를 하는 데 실패했고 기존 지배세력의 타협만을 얻어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김대중 정권 이후 민주화 세력이 정권교체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보수세력은 여전히 기득권을 놓지 않았고 역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자본의 완전한 지배를 의미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앞에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정권은 이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경제적 성장주의는 재고의 여지없이 계승되었고, 그 점에서 개발독재체제하의 정권과 민주화 이후 정권은 차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경제적 양극화는 필연적이었다.

그런 사태를 반전시킬 것으로 기대되었던 노무현 정부는 오히려 그 지지자들의 이해와 정반대되는 정책을 펼쳤고, 급기야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결국 경쟁과 효율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사회, 강자만 살아남고 약자는 퇴출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어 실질적 민주주의의 기반은 심각하게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유감스러운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뒷걸음을 치게 된 데에는 정권의 잘못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력의 교체에만 신경을 썼지 민중의 삶에는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민주화 세력의 잘못 또한 크다. 특별히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기독교계 정치참여 세력의 안이한 태도는, 우리가 깊이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은 그 속성 자체로 무소불위의 힘을 지향한다. 따라서 끊임없이 권력을 견제하려는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민중을 지배하게 되어 있다. 진정한 민주화란 그 권력을 약화시키고 민중을 진정한 주체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세력, 특별히 교회 내의 민주화 세력은 그 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민주화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변화되지 않은 세상의 모습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을 질책하고 계시는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 말씀은 진정한 세상의 변화를 기대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에게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마태복음 23:2-3)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있다고 말한 것은, 그들이 율법을 관장하는 지위, 곧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공공의 기준과 제도를 관장하는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율법을 폐기하기보다는 그 진정한 의미를 성취하시려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씀 역시 그와 동일한 맥락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말은 곧 공공의 기준을 의미하며, 함께 따라야 할 제도의 근본 취지에 해당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그들의 행실이 그들이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따르지 말라고 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행실이 무엇일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 손가락도 꼼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행실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즐기고, 장터에서 인사받기와, 사람들이 자기들을 선생이라고 불러 주기를 즐긴다.”(마태복음 23:3-7)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영광을 누리기는 즐기지만, 궂은일은 하지 않는다. 섬김을 받기를 즐기지만 섬기기는 싫어한다. 공공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위치에 섰지만, 그들은 그것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 향유하는 데만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삶의 변화를 원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공공의 기준을 제시할 자격을 상실하고 있다. 견제없는 권력체제 안에 들어간 모든 사람이 범하는 잘못이다. 삶으로서 민주주의를 등한시하고 정치권력에 집중하는 한 계속 되풀이될 수 있는 잘못이다.

이들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마태복음 23:23) 이것은 제도화된 공공의 질서 안에서 기능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율법의 근본 취지, 곧 제도의 근본 취지를 살리려는 노력이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은, 마치 민주주의의 정치적 제도화로 민주화가 진정으로 성취되었다고 믿고 그 안에 안주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겨냥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에게 당부한다. “그러나 너희는 선생이라는 칭호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학생이다.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칭호를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마태복음 23:8-12)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하며, 따라서 서로를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씀은, 민주주의의 철저화 또는 민주주의의 급진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율법의 정신을 급진화한다.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을 것이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마태복음 5:21~22). 언제나 이런 식의 태도이다. 율법을 겉으로 보이는 기능적 차원에서 준수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그 근본정신을 성심껏 삶으로 구현해야만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역설하고 계신다. 민주주의의 제도화로 족하지 않다. 그 제도화의 취지에 걸맞는 인식과 그 취지를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삶의 조건과 방식을 갖추는 것이 필요충분조건이다.


4.

오늘 뒷걸음치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화의 진정한 뜻과 그 조건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정권의 교체와 정치절차상의 민주화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실질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삶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생활방식을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조건을 만들도록 요구할 수 있다면, 우리 스스로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삶의 관계에 대한 인식과 생활양식을 추구해야 한다. 일상의 영역에서 삶으로서 민주주의를 지켜나가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위협당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교회는 삶으로서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것은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찍을 것인가 하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과제이다. 삶으로서 민주주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의 삶에서 출발한다. 누구에게 높임을 받고 누구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삶에서 출발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자타가 공인하듯 한국의 민주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오늘 한편으로는 한국의 민주화를 기정사실화하는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교회 스스로의 민주화 과제를 안고 있다. 마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섬김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처해 있다.

오늘 우리는 그 일원으로서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책임적인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실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데서 시작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섬김의 삶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거기에서 새로운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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