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과 성격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6-28 23:18
조회
4541
제3회 맑스코뮤날레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주관단체 세션

한국기독교의 반민주세력화, 그 역사적 뿌리에 대하여 -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성령의 정치

2007년 6월 28일(목) 오후 2:00~5:30

서강대학교 다산관 D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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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과 성격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1. 한국 기독교의 정치적 보수화


한국 기독교가 요란하다. 1990년대 이래 한국 보수 기독교는 매우 공공연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방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구국기도회’를 열어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사회적 의제들이 제기될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자신의 입장을 천명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약칭 ‘한기총)의 결성 이후 그와 같은 보수 기독교의 행보는 매우 공세적이고 일관된 성격을 띠고 있다. 스스로의 이해관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타성을 띠고 있고, 따라서 번번이 사회적 보수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향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보수 기독교의 행보는 더욱 분주해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의 일원으로서 시민사회 내에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는가  하면 한기총과 같은 대표기구를 통해 대통령 후보자 검증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직접적으로 정치 영역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지난 1970-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진보 세력의 표상처럼 인식되었다. 그것은 독재정권에 대항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활동에 참여한 기독교의 면모가 돋보였기 때문이었다. 1970-1980년대의 그와 같은 기독교의 역할을 생각하면 오늘 기독교의 상황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오는 동안 기독교 내부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기독교 내부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새로운 양상일까? 아니면 한국 기독교의 밑바탕에 자리 잡은 기조가 외적 조건의 변화와 관련하여 지난 시대와 달리 표출되고 있는 양상일까?    

사실 어떤 종교든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실체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종교 내에서 다양한 세력들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다양한 세력들은 각기 그 나름대로 신앙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한다. 특별히 한국 개신교의 경우 그 교파가 무척 다양할 뿐 아니라 이념 지형에서 또한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한국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각기 다른 신앙 양태들과 다른 정치적 입장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100여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보수주의적 성향은 지배적인 주류를 형성해 왔고 기독교 내에서 보수주의의 우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개신교 수용 초기 봉건적 질서와 가치관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수용된 기독교 신앙은 그 당대로서는 진보적 의의를 지녔지만,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보수적 색채를 뚜렷이 해나갔다. 진보적 기독교의 역할이 두드러져 기독교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진보의 표상처럼 인식되었던 1970-1980년대에도 사실은 기독교 내에서 보수주의의 우위는 계속되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1970-1980년대는 한국 기독교의 급성장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 성장을 주도한 것은 보수적 기독교였다. 경제성장 정책이 가속화된 상황 속에서 보수적 기독교는 음으로 양으로 그 수혜를 가장 적극적으로 누렸다. 한국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기독교가 영향력 있는 종교로 각인된 것은 바로 1970-1980년대였고, 이 시기 기독교는 각종 대형집회를 통해 그 존재를 과시했다. 이 시기에 진보적 기독교의 역할이 두드러져 보인 것은 기독교 내에서 그 세력이 양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에도 진보적 기독교 세력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사회적으로 개발독재에 맞선 민주화의 과제가 중요하게 제기되었고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독교의 역할이 돋보였기 때문일 뿐이다. 1970-1980년대 진보적 기독교의 역할이 사회적 영향력 면에서 상대적으로 두드러졌고 그 의의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지만, 그 시기에도 한국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오늘 공세적으로 정치적 보수화 경향을 뚜렷이 보이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은 한국 기독교 전반이 갑작스럽게 우경화된 탓이 아니다. 주류 한국 기독교의 보수주의는 오랜 기원을 갖고 있고 그 생명력 또한 강하다.  

정치적 행동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최근 기독교의 모습이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보수와 진보가 비교적 선명하게 대립되던 1970-1980년대 진보적 기독교가 정치참여 태도를 취한 반면 보수적 기독교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어떤 정치적 행위이든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에 비하면 오늘 보수 기독교가 공공연하게 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을 내세우며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방향의 급선회처럼 보인다. 그러나 엄밀히 평가하건대 당시 한국 보수 기독교는 스스로 표방한 신학적 입장을 따라 정교분리의 원칙에 충실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정치에 대해 어떤 명시적인 발언과 참여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정치적 효과를 유발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늘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보수 기독교의 핵심세력들은 정교분리를 표방하였던 그 시절에도 사실은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구체적으로 정권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정권에 대한 비판적ㆍ저항적 태도는 정치행위로 간주하고 조찬기도회 등과 같은 형태로 정권의 잘잘못은 분별하지 않은 채 정당화한 것은 종교행위로 간주하는 것이 분명 모순을 함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기독교가 정교분리의 원칙을 표방한 신학적 입장에서 어떤 ‘전향’을 한 것인지는 다시 한번 따져 물어야 할 사안이지만, 1970-1980년대 한국 보수 기독교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점에서 오늘 보수 기독교의 정치행위는 사실상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과 ‘협력’의 관계가 기독교 내 세력들 사이에서 엇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에 협력했던 보수 기독교 세력이 민주화의 결과로 탄생한 개혁적인 정권에 저항하는 태도를 취한 반면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했던 진보 기독교 세력이 개혁적인 정권에 협력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 보수 세력의 소위 ‘잃어버린 10년’의 위기감에 편승하여 보수 기독교가 그 위기의식으로 무장한 대열의 최전선에 나서는 형국을 하고 있고, 반면에 진보 기독교는 구심점을 잃은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그 활동이 위축되어 있는 것이 오늘 한국 기독교의 지형도이다.  

이 글에서는 오늘 매우 공세적으로 정치적 견해를 표방하고 있는 한국 보수 기독교의 기원과 그 성격을 살펴보려고 한다.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과 성격을 살피는 것은 종합적인 역사적 분석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오늘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형성의 기원에 해당하는 중요한 하나의 기점과 관련하여 그 개략적 윤곽을 그려보려고 한다. 이 글은 일종의 서설적 문제제기에 해당하는 매우 제한적인 글이지만, 기독교 내에서 1907년 대부흥운동과 오늘의 보수주의 기독교와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조명해보려는 시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제기 자체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그 기점은 이른바 1907년 대부흥운동으로서, 오늘 한국 기독교는 100주년을 맞아 그 사건을 다시 기억하며 대대적으로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오늘 주류 한국 기독교의 보수주의적 성격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이 글은 정확하게 말해 1907년 대부흥운동을 기억하는 한국 보수 기독교의 성격을 다룬다. 과거의 어떤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점에서 자신의 이해를 따라 재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1907년 대부흥운동과 관련하여 2007년 한국 보수 기독교를 살펴보는 것은 그 속성을 규명하는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 된다.  



2.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


2007년 한국 기독교는 대대적으로 1907년 대부흥운동을 기념하는 일로 분주하다. 이미 지난해 2006년부터 1907년 대부흥운동과 관련된 각종 학술대회가 이어졌고, 올해는 본격적인 행사들이 예정되어 있다. 2007년 들어 기독교계 언론을 보면 거의 매번 그 관련 기사들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전반이 1907년 대부흥운동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듯한 양상이다. 대다수 주요 교단과 단체들이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고, 그 대부흥운동의 발원지 평양에서의 기념행사까지 예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만 들여다보면 한국 기독교 전체가 아무런 이의 없이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리며 어떤 행사를 계획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간 한국 기독교의 진보적 경향을 대변해 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독자적으로 대부흥운동을 기리는 어떤 행사도 계획하고 있지 않다. 교단 가운데서는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역시 대부흥운동과 관련한 어떤 행사도 계획하고 있지 않다. 이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지표이다. 과거의 어떤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단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지금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주체의 욕망의 표현이다. 따라서 과거의 기억은 객관적 사실로서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기억하는 그 주체의 시선에서 재구성되게 마련이고, 그 재구성 과정은 기억하는 주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기리는 기독교와 기리지 않는 기독교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행사 준비 여부의 차원을 넘어 정체성의 차이를 함축하고 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을 기억하는 기독교가 바로 그 사건과 현재 스스로의 정체성 사이의 강력한 유대감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 그 사건을 특별히 기억하지 않는 기독교는 그 사건이 함축하는 성격과는 다른 정체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주요 관심사는 오늘 적극적 정치 행보를 내보이고 있는 기독교의 그 정치적 보수주의의 기원과 생명력을 주목하는 것이다. 오늘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와 그 정치행태는 상당 부분 1907년 대부흥운동 그 자체 그리고 계속되어온 그 사건에 대한 전유 방식과 관련이 있다. 어떤 사건이든 그 자체로는 다의성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일관되는 성격들이 어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단절되는 성격들이 어울려 복합적인 양상을 띠는 법이다. 하지만 그 사건이 시점을 달리 해 그 누군가에 의해 다시 기억되고 전유될 때에는 단절되는 성격들이 거세되고 일관된 성격들로만 재구성되는 경향이 있다. 앞서 말했듯 과거 어떤 사건에 대한 기억은 그 사건을 기억하는 주체의 욕망에 따른 재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가들이 한결같이 중요하게 인식하는 1907년 대부흥운동은 대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오늘 그 사건을 기억하는 보수적 기독교와는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 것일까?

1907년 대부흥운동은 두 가지 연원을 배경으로 한다.  하나는 원산에서 시작된 선교사들의 기도회요, 또 하나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시작한 부흥회이다. 1904년 원산에서는 일단의 선교사들이 모여 자신들의 선교활동을 반성하며 통회하는 기도회를 가졌다. 뜨거운 ‘성령 임재’의 체험을 하였던 이 기도회는 한국 교회 교인들까지 참여하는 가운데 계속되었다. 이 소문이 전해져 평양의 선교사들은 그 기도회를 주도했던 하디 선교사를 평양에 초청하여 기도회를 열었다. 평양의 기도회는 뜨거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즈음 원산의 전계은 정춘수 목사, 평양의 길선주 목사 등 역시 선교사들과 독자적으로 부흥회를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암울한 당시 민족적 상황을 신앙적으로 돌파해보려는 동기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이들의 집회는 선교사 주도의 기도회와 결합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특히 길선주 목사가 평양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새벽기도회의 열정은 대부흥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의 기도회가 주로 자신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반성의 동기에서 시작되었고,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부흥회는 국난의 위기에서 안식처를 찾고자 했던 동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 둘은 이내 하나로 합류하였다. 그와 같이 시작된 부흥운동의 열기는 마침내 1907년 1월 평양에서 커다란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해 점차 전국적 현상이 되었고 이후 한국 기독교 신앙의 유력한 한 형태를 결정한 계기가 되었다.    

선교활동의 부진함에서 비롯된 선교사들의 반성 동기와 민족적 위기에 대한 신앙적 대응 동기라는 일견 합치하기 어려운 배경을 가진 두 갈래의 기도회가 하나로 합류하여 대세를 이룰 수 있었던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 흔히 ‘성령 체험’으로 간주되는 열광적 체험을 동반한 이 부흥회는 죄로부터의 회개를 그 기본 기저로 한다. 죄에 대한 인식은 신학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원점이요 윤리적 반성의 기점이 되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죄에 대한 고백과 죄로부터의 회개는 그 자체로는 기독교 신앙의 전통에서 의문의 여지없는 공감대이다. 그 점에서 어떤 동기든 죄의 고백을 그 원점으로 삼을 것 같으면 합류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하지만 두 갈래의 배경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에서 죄에 대한 인식은 사실상 추상적이고 근원적인 ‘죄’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상처’에 대한 통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선교사들의 경우 그 상처는 선교에 대한 실패로부터 기인하며, 그 실패에 대한 보상심리가 ‘성령 임재’를 추구하는 열정으로 승화되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의 경우 상처의 연원은 보다 거시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국난 위기와 관련되어 있고 국난 위기의 혼돈 상황에서 각 개인들의 무력함과 관련되어 있다. 국가적 위기가 개인들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끼쳤는지는 더 깊이 논구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전통적 사회의 급격한 몰락과 외세의 침탈로 가중된 사회적 혼란은 각 개인들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쉽사리 예측할 수 있다.  특별히 대부흥운동이 평양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된 현상은 이와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지표이다.  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격전장이었던 평안도 지역민들은 전쟁의 참화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물적 인명피해를 겪으며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 1906년 평양교회의 교인수가 급증했는데, 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암울한 상황에서 희망과 위로를 찾아 교회로 몰려왔음을 말하며, 그것이 이어지는 대부흥운동의 정서적 기반을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부흥집회에서 죄의 고백은 대체로 스스로 인식 가능한 개별적 대인관계 안에서의 잘못에 대한 고백이 주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백으로 상처를 치유한 효과는 인식하지 못한 복합적 상처에 대한 치유로 받아들여졌고 동시에 그것은 ‘성령 임재’의 경험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계속된 부흥집회들에서 종종 ‘나라를 위한 기도’가 행해지고 있었던 것은, 개별 교인들의 상처 기저에 국가적 위난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시사한다. 국가적 위난과 개별적으로 인식한 상처 사이의 상관관계가 논리적으로 분명히 해명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정서상 개인들의 상처와 국가의 위난은 동일시되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개인들의 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한 거듭남을 민족의 거듭남과 직결시킨 당시 교회 지도자들의 메시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편 선교사들의 기도회와 한국 교회 교인들의 자발적인 부흥회는 또 다른 차원의 의도된 목적에서 쉽게 결합할 수 있었다. 그것은 흔히 ‘비정치화의 신앙’ 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교인들 양편에서 동시에 추구되었다.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고 외세의 침탈로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사람들은 다양한 동기로 교회를 찾아 나섰고, 그 가운데서 기독교 신앙을 근대적 자각과 동일시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통한 민족 독립의식을 고취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교회가 정치적 성격을 띠는 것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이를 매우 위험하게 생각하였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내세우면서 국난의 위기로부터 상처받은 영혼들을 ‘성령의 세례’로 치유하고자 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선교본국과 일제 당국과의 갈등을 우려하여 기독교인들의 저항적인 행동을 제어할 필요를 느꼈고 순종과 인내의 미덕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부흥회를 이끈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경우 국난의 위기로 인한 상처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지만, 독립운동이나 정치적 저항운동을 통한 국난의 극복보다는 일종의 ‘운명적 공감’ 속에서 고난의 대속적 의미에 몰입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기독교 신앙을 내면화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급속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기는 하였지만, 시대적인 아픔과 분노를 ‘성령 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결국 이와 같은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는 ‘숙정’되었고, 이후 지배적인 신앙의 원형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와 같이 형성된 신앙의 원형은 교회의 제도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1907년 부흥운동은 놀랄 만한 교세의 확장을 가져왔다. 예컨대 1905년에서 1907년에 이르는 2년간의 교세확장은 교인수로 볼 것 같으면 대략 4만 명에서 12만 명에 이를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한국 교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교세확장을 발판으로 교회의 조직화를 시도하였다. 교회의 조직화는 대개 교단 조직의 정비 및 교단간의 연합, 그리고 공동의 선교 경향으로 집약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이러한 경향이 점차적으로 나타나는 추세이기는 했지만 1907년 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급속히 강화되었다. 예컨대 감리교의 경우 ‘감리교회’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남ㆍ북 감리교회가 공동으로 한국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신학당을 설립하기로 한 것도 1907년이었다. 장로교의 경우 1907년 대부흥운동은 더욱 결정적이어서 1907년 9월 처음으로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노회’라는 명칭의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되었다. 부흥회에서 교파가 다른 교인들이 자리를 같이하는 일이 흔해졌고, 선교회간의 지역분할 조정 타협안이 매듭지어진 것도 이 즈음이었다. 대부흥운동의 물결과 함께 교회 조직의 정비는 교회의 통일성을 강화하고 동시에 신앙의 동질성을 강화하였다. 오늘날 다양한 교파들로 나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지배적인 신앙 형태 면에서 교파간 차이가 그다지 의미 없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결국 대부흥운동은 신앙의 내적 동질성 면에서나 교회 구조에서 동일한 주류 한국 기독교를 형성한 결정적 계기였다.



3. 배타성의 신앙과 물질적 축복의 욕망


오늘 정치적으로 급속히 우경화되어 직접적 정치행동을 펼치는 주류 한국 기독교는 신앙의 내적 동질성의 측면에서나 교회 조직이라는 외적 동질성의 측면에서 모두 대부흥운동을 통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대부흥운동 당시 비정치적 신앙운동의 형태를 추구했던 교회가 오늘에 이르러서 급작스럽게 정치적 운동에 뛰어든 양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대부흥운동 당시 비정치적 신앙운동이 과연 ‘비정치적’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어떤 행위가 정치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그 효과를 두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곧 주관적 동기만을 두고 평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전반적으로 고려하는 가운데 평가해야 할 문제이다. 그 점에서 대부흥운동의 신앙은 분명히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더욱이 선교사들의 경우에는 명백히 그 동기 자체가 정치적이었다. 선교사들에게 대부흥운동은 일제와 기독교와의 정치적 갈등을 회피하고 교회를 보존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일반 신도들의 경우 그와 같은 의도적인 동기가 없었다 하더라도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저항적 정치행동을 회피하고 영적인 각성을 추구하는 신앙에 몰입되었을 때 그것은 일제에게 충분히 용인될 만한 것이었다. 특별히 교회가 일제에 대한 저항의 한 거점이 되어가고 있던 상황에서 그와 같은 부흥회적 신앙으로의 선회는 일제 당국으로서는 반길 만한 일이었고 권장할 만한 일이었다. 그와 같은 신앙을 추구하는 교회는 전혀 불온시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신앙을 추구하는 가운데 교회는 스스로를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상 정치적 거래의 한 형태였다. 그와 같은 정치적 거래 형태는 훗날 유신체제하에서 교회와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통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지만, 이미 대부흥운동이 벌어진 기독교 역사 초기에 그 기본 틀이 형성된 것이다.  

그 신앙의 형태는 그렇게 형성된 이후 조직화된 교회를 통해 계속적으로 재생산되고 확산되었는데,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는 형태로 재현되었다. 반복적으로 계속된 부흥운동은 대체로 암울한 시대상황 가운데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교회가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위무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예컨대 1907년 대부흥운동은 군대해산과 외교권 및 경비권의 박탈, 그리고 이어진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하며, 이어진 백만구령운동은 일제에 의한 국권의 완전한 상실을 배경으로 한다. 1920-1930년대 부흥운동은 1919년 3.1민족독립운동의 좌절 상황을 배경으로 하며, 1950년대-1960년대 부흥운동은 한국전쟁과 이어진 사회적 불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형집회의 전성기라 할 만한 1970년대 부흥운동은 급속한 경제개발과 이에 따른 전통사회의 와해와 관련이 있다. 어쩌면 한국 현대사는 사회적 불안이 일상화되어 있었고 그 일상화된 사회적 불안은 한국 기독교의 부흥회적 신앙의 자양분이 되었다.

다시 확인하는 초점이지만, 그와 같은 부흥운동을 통해 형성된 신앙과 오늘 기독교의 우경화된 정치행동이 어떤 상관관계를 갖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사회적 동요와 불안 가운데 형성된 신앙은 자기보호적 속성을 매우 강하게 띨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동요와 불안은 당양한 형태로 개인들에게 상처를 안겼을 것이고, 상처를 안은 이들의 자기연민은 곧바로 자기보호 본능으로 고착화된 셈이다. 그렇게 상처받은 이들을 교회가 조직적으로 감싸 안고 종교적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 속성은 개별 교인들의 차원을 넘어 교회 전반의 속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타적 신앙보다는 배타적 신앙, 때로는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배타성을 동반한 오늘 한국 보수 기독교의 속성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그 속성을 면밀히 관찰할 때 그 발현형태가 ‘정치적’인지 ‘비정치적’인지 구분하는 것은 핵심을 호도할 가능성이 높다. 앞서 말한 대로 흔히 비정치적이라고 평가되는 신앙의 형태마저도 사실은 지배적 정치권력과의 갈등을 피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정치적 효과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성격을 내장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타협’과 ‘저항’으로 그 발현형태를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지 ‘비정치적 성향’와 ‘정치적 성향’으로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한국 기독교의 자기보호적 배타성의 신앙은 그 일관된 속성에서 변함이 없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었다. 정치적 지배체제가 강력할 경우에 그 신앙은 흔히 말하는 ‘비정치적’ 또는 ‘탈정치적’ 부흥운동의 형태로 드러났고, 한편의 지배적인 정치체제가 와해되고 혼란이 벌어진 상황에서는 노골적인 공격성을 띠었고, 상대적으로 완화된 정치적 지배체제하에서는 적극적인 정치참여 형태를 띠고 있다. 예컨대 지배권력이 강압적 성격을 띠었던 일제치하와 유신체제하에서 그 신앙은 주로 탈정치적인 부흥운동으로 표출되었고, 한국전쟁과 같은 동요의 시기에는 극단적인 공격 성향을 보였고, 최근과 같이 상대적으로 그 지배력이 느슨한 정치체제하에서는 직접적인 정치행위로 저항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자기보호적 배타성의 신앙이 정치적 국면에 따라 타협과 저항의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 보수 기독교는 자기보호적 배타성의 신앙에서 변함없는 일관성을 지녀왔고 그 일관성에서 정치적 태도는 항상 보수적 입장을 견지해 왔다. 정치적 태도 면에서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것은 정치권력의 변화에 따른 결과일 뿐 보수 기독교 신앙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보수 기독교는 자기보호적 배타성의 신앙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자기보호적 배타성의 신앙이 이타적이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견해로 표출될 때 보수적 성격을 띠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정치적 보수주의로 귀결되는 것은 그 신앙이 현실적인 상처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또 한편으로 그 상처에 대한 현실적인 보상기제를 요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일상화된 사회적 불안에 따른 개인들의 상처는 단순히 정신적ㆍ종교적 보상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 상처는 매우 현실적인 욕구의 충족으로 보상받기를 원하는 기대심리를 낳았고, 교회를 찾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와 같은 기대심리가 분출되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에 대한 손쉬운 해결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국 보수 기독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물질적 축복의 보상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신앙의 결과는 물질적 보상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은 가장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갖는 교회의 담론이 되었다. 특별히 그와 같은 인식은 한국전쟁 이후 극단적인 불안과 궁핍의 시대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되었고 점차 일반적인 신앙 인식으로 확대되었다. 그와 같은 담론은 개인적 차원의 신앙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었다. 집단 또는 국가적 차원에서 또한 유효했다. 이른바 선진국이 기독교 국가들인 반면 후진국은 비기독교 국가라는 인식이 한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유포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성장과 발전의 논리는 아무런 여과 없이 곧 신앙의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경제적 선진화의 논리를 신앙적으로 아무런 모순 없이 받아들이는 보수 기독교의 논리는 이렇게 구축되었다.

‘성령 임재’를 갈구하는 타계적 부흥운동의 신앙과 현실에서 물질적 축복을 갈망하는 신앙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 자기보호적 배타성의 신앙과 물질적 축복을 갈망하는 신앙은 서로 맞물려 일관된 태도로 나타난다. 그 신앙은 구체적인 물질적 보상이 희박한 조건에서는 자기의 피해를 방어하는 수동적 태도로 표현되지만, 물질적 보상이 절박하고 동시에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조건에서는 그것을 손안에 쥐려는 태도로 표현된다. 예컨대 1907년 대부흥운동 당시 신앙은 정치적인 압박을 방어하는 수세적 태도로 표출되었다면, 한국전쟁 이후 그 신앙은 물질적 보상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추세로 표현되었다. 한국 보수 기독교 신앙은 대부흥운동에서 종교적 표현 양식을 찾았다면 한국전쟁이후 극단적인 불안과 궁핍의 시대에 세속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신앙 논리를 발전시킨 셈이다. 특별히 한국전쟁 이후 물질적 보상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소위 기복신앙이 급격히 확산된 배경에는 극단적인 불안과 궁핍이라는 원초적 상황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쟁구호 물자의 유일한 민간보급 경로로서 교회의 역할 및 반공투쟁의 전위로서 교회 입지의 공고화 등과 관련하여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지닌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1960-1970년대 개발독재 시대에는 권위적인 국가권력과 갈등을 피하려는 수세적인 태도와 동시에 물질적 축복을 구하는 성장주의적 신앙이 절묘하게 결합되었고, 오늘 민주화 이후 시대에는 보수 기독교 신앙은 그 어떤 형태이든 수세적 태도를 과감히 버리고 공세적으로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여전히 국난 위기 논리를 활용하는 구태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수세적 자기보호보다는 이제는 가히 공세적 자기확장의 논리로 무장한 보수 기독교의 모습이다. 이 점에서 보수 한국 기독교의 자기중심적 배타성의 신앙은 매우 일관되며, 다양한 조건 안에서 변화무쌍하게 자신을 관철시켜나가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4. 배반당한 성령의 정치


‘성령의 임재’를 갈구하는 부흥운동으로서 종교적 형식을 취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물질적 보상을 갈망하는 내적 특성을 지닌 주류 한국 기독교 신앙은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그와 같은 절묘한 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앞서 대략 살펴보았지만, 그 현상은 신학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다소 특이하다.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운동의 기원과 그 특성에 관해서는 여러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기독교 성령운동의 원형으로서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사도행전 2:1~13)은 매우 중요한 전거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 임재 현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대화 불가능의 상황이 대화 소통의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세계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사건이 성령 임재 사건이었다. 그것은 갈릴리 민중들의 언어가 세계적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변방의 언어가 보편적인 언어가 되고 그것으로 모든 사람이 소통하게 된 사건이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 임재 사건의 실체다. 성서에서 영은 흔히 바람으로 은유되거니와, 성령의 임재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기운이 임하는 것을 말한다(요한복음 3:8). 성서에서 성령 임재는 기존의 언어적 신분적 계층적 장벽을 허물고 진정한 의사소통과 화해를 이루는 것으로 흔히 묘사된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임재의 사건을 언급한 후 곧바로 원시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사도행전 2:43~47)를 말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공동체는 재산과 소유물을 공유하고 사랑을 구현한 공동체였다. 그것은 명백히 당대 기독교인들이 처해 있던 현실의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이었다. 성령의 임재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기폭제였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의 질서에 대해 순응적이기보다는 전복적이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난 성령운동들은 한결같이 전복적 성격을 띠었다. 성령의 임재는 항상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꿈꾸는 형태로 경험되었던 것이다. 12세기 플로리스의 요아킴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역사 경륜으로 해석하며 ‘성령의 제3시대’를 주창하였을 때 그 의미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부와 성자의 시대를 이은 성령의 제3시대는 율법과 타율이 지배하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의지가 합일하는 진정한 신율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역사철학은 교회의 권위적 지배체제하에서 그 질서를 부정했던 중세말기 민중운동과 소종파 운동의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독일농민운동의 선구 뮌처 역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자기 확신으로서 성령의 내적 현존을 강조하였다. 민중신학자 서남동 또한 성령의 신학 계보를 재확인하면서 성령을 중심으로 하는 탈기독교 시대의 신학들의 의의를 역설하였고, 1970년대 민중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의 성찰에서 비롯된 민중신학을 ‘성령론적 해석’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그것은 1970년대 한국 교회에서 부흥운동으로 대표되는 성령운동에 대한 이의제기이자 동시에 기독교 역사 안에서 진정한 성령운동의 계보를 회복하겠다는 의도를 지닌 것이었다. 이 모든 운동은 기존 체제의 정당화나 그 체제에의 순응이 아니라 기존 체제의 해체를 노렸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고무하였다.

한국 교회에서 부흥운동이 개시되었을 때, 그것을 성령의 임재로 인식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체험은 일종의 해방 체험일 수 있었을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 당시만 하더라도 성령의 임재를 해방의 체험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징후들은 많았다. 교회 안에서 반상의 차별이 없어지고, 남녀가 동석을 하고, 특히 어떤 공적인 자리에서든 발언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여성들이 당당하게 발언의 주체로 나선 현상 등은 확실히 그와 같은 해방의 체험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 안에서 성령 임재의 체험으로 인한 주체화는 억압되었다. ‘악령’인지 ‘성령’인지 구별하려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이뤄졌고, 무엇보다도 선교사 주도하의 교회 조직화 과정에서 그것이 민족주의적 정치의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차단되었다. 성령의 체험은 절대자에 대한 순종과 현존 질서의 권위에 대한 순응으로만 보증될 수 있었다. 점차 교회 안에서 민족주의적 정치의식화는 비신앙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숙정되었고, 기존 교회의 질서를 이탈하여 성령운동을 펼친 다양한 종파운동들은 이단으로 배척을 받았다. 1970년대 한국 기독교인들의 주체적 각성에서 비롯된 또 다른 의미의 성령운동이라 할 수 있는 민중신학 역시 주류 교회에서는 배척받았다. 결국 주류 한국 교회 안에서 성령은 ‘진리를 깨닫게 해 주고 예수가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해 주는 보혜사’(요한복음 14:26)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교회의 교리에 순종함으로써 진리에 눈멀게 만드는 감시자 또는 신앙의 순치를 돕는 후견인과 같은 역할을 했다. ‘성령 충만함’을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자기중심적 배타성이 강하고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 교회에서 성령은 교회 부흥을 보증해 줄 때만 진정한 성령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오늘 1907년 대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교회들이 사립학교법 재개정에 한 목소리가 되고 있는 현상은 주류 한국 기독교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어 매우 시사적이다. 한국 보수 기독교는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려는 장치로 개방형이사제 도입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개정 사립학교법에 대해 극렬하게 반대하며 재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종교교육의 정신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또는 학교 운영이 전교조와 같은 좌경세력에 의해 좌우되라는 이유로 개정 사립학교법을 극력 반대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현실성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사유화된 학교 운영 체제와 전횡을 그대로 온존시키고자 하는 속내 때문이다. 교육의 공공성보다는 자기이해에 훨씬 민감한 주류 한국 기독교의 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좌파세력의 영향력 확대로 한국 사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상투적인 주장을 펼치는 보수 세력과 명백히 입장을 동일시하고 주류 한국 기독교의 속성을 보여 주고 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공연하게 스스로 표방하고 있듯이 성령운동을 주도한 교회들이 바로 그와 같은 교회들이다. 정말 묘하게도 성령운동에 참여하는 교회일수록 자기이해에 민감하고 동시에 타자에 대해 공격적이다.

그 기독교가 1907년 대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중심적인 교세확장의 논리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다. 흔히 대부흥운동의 요체를 ‘참회’와 ‘부흥’으로 집약하고 있지만, 대부흥운동을 기억하는 기독교는 이름 그대로 ‘부흥’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참회’란 근본적인 전향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일 터인데 참회하고자 하는 내용이 불분명할 뿐 아니라 그 외적 표지로서 전향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새로운 교회 부흥의 계기로서 과거의 사건은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교회 부흥, 곧 교회의 자기 확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는 나름대로 그 만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2006년 종교인구 통계조사 결과와 관련되어 있다. 2006년 종교인구 통계조사 결과 최초로 한국 개신교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성장일로를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주류 한국 기독교 입장에서 교세의 축소는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사실 근간 주류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공신력의 추락과 관련된 것이기에 자업자득의 측면이 있지만 기독교는 그 공신력 추락 요인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외부의 비판적 태도가 기독교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것으로 생각하고 선명한 자기입장을 내세움과 동시에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공세적 태도를 취하는 가운데 부흥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또 하나는 한국 사회 보수 세력의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위기담론과 인식을 공유한 보수 기독교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주류 한국 기독교는 사회적 이슈가 되는 매 사안마다 보수 세력과 입장을 동일시해온 데서 보여주듯이 민주화 이후 개혁적 정권의 등장을 좌파의 확산으로 인식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반공 보수주의의 보루로서 한국 기독교의 위상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류 한국 기독교는 그와 같은 상황인식에 따라 좌파세력을 척결하고 반공주의의 보루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강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펼치는 계기로서 부흥운동을 활용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정치적 저항세력을 견제하는 효과를 지녔던 1907년 부흥운동의 재현에 대한 기대이다.

공교롭게도 1907년 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2007년은 대통령 선거가 겹쳐 있다. 이 절묘한 기회를 주류 한국 기독교가 쉽사리 간과할 리 없다. 그러기에 자기중심적 교세확장과 더불어 사회적 영향력의 확보를 위한 보수 기독교의 행보는 분주하다. 하지만 그 시도는 성공해봐야 기껏 배타성 강화를 동반한 교회의 권력화를 의미할 뿐 모든 족쇄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성령의 임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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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 1907, 그 기억의 정치학

[맑스코뮤날레](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 한국기독교의 반민주세력화와 그 역사적 뿌리에 대하여

<참세상> 코뮤날레취재팀  / 2007년06월29일 16시27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한국기독교의 반민주세력화와 그 역사적 뿌리에 대하여: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성령의 정치”라는 제목으로 두 개의 발표와 토론을 진행했다.


발표회의 전체 사회를 맡은 정혁현 한살림교회 목사(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는 2007년 현재 한국기독교가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는 소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관한 새로운 관점의 해석을 제기하고, 이 평양대부흥운동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문제제기하자는 취지로 이러한 주제의 세션을 준비하게 되었다고 설명하며 발표회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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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는 이미 작년부터, 신학아카데미 탈/향을 통해 "성령, 위반과 순치의 정치 사이" 이라는 강좌를 진행하며 이 주제에 관한 논의를 주도해 왔으며, 지난 6월 11일에도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와 공동으로 1987년 이후의 한국 민주화 20년을 성찰적으로 점검하는 <민주화 20주년 비판과 전망 심포지엄: 민주화 이후의 퇴행하는 민주주의, 퇴행하는 기독교>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기독교사회운동현장과 교회현장과 신학교육현장을 포괄하는 현 시기 한국 기독교의 총체적 보수화 현상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비판적인 의제를 공론화한 바 있다.


발제는 모두 두 개로 제1발제는 ‘한국기독교보수주의의 기원과 성격’을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가, 제2발제로 ‘성서 속의 성령과 한국교회의 성령의 도구화’를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이 발표했고,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와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기획실장이 각각 토론을 붙였다.



최형묵, “2007년의 'Again 1907'은 배반당한 성령의 정치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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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최형묵 목사는 한국 기독교의 보수적 기원으로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자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현재의 한국 기독교는 이 사건을 ‘성령 임재’의 체험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기존의 강고한 질서에 균열을 내는 역사적인 성령운동과 달리 평양 대부흥운동은 오히려 자기중심적 배타성의 신앙과 체제에의 순응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제 2007년 그 사건의 100주년을 맞이하여 보수 기독교가 이를 대대적으로 기리는 것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 적극적인 정치행동에 나서는 것은 긴밀한 내적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사실상 이러한 움직임은 보수적 기독교의 자기중심적 욕망을 확장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최형묵 목사에 따르면, ‘성령의 임재’를 갈구하는 부흥운동의 종교적 형식을 취하면서도 결국은 자기중심적인 물질적 보상을 갈망하는 한국 주류의 기독교 신앙은 현실질서에 순응적이기보다 전복적이었던 진정한 성령운동과 거리가 먼 것이다.


장윤재, “1907년 사건을 새롭게 다시 기억할 가능성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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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발표가 끝나고, 곧바로 이에 대한 논평이 이어졌다. 논평자로 나선 장윤재 교수는 최형묵 목사의 글이 ‘배반당한 성령의 정치’라는 다소 추상적인 내용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라는 의견과 함께, 한국 보수주의 기독교의 성령운동이 진정한 성령운동이 아니라는 주장에는 자신도 충분히 동의를 하지만, 한편으로 그 주장은 상대적으로 소수자인 진보진영이 한국 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보수주의를 견제해나가기 위한 ‘의제화’의 과정에서는 다소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장교수는 최목사의 글이 1907년 대부흥운동에 대하여 최근에 제출된 다양한 학술적 평가와 연구들이 많이 반영되지 못했고, 한국 기독교를 현재와 같이 보수화시킨 거대한 구조적 요인이나 평양 대부흥운동에 앞서는 역사적 사건들이나 계기들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분석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장교수는 평양 대부흥운동이 시대적 아픔과 분노를 단순히 성령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하는 결과만을 가져왔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평양대부흥 운동에 잠재하는 다른 기억의 가능성을 평양 대부흥운동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길선주 목사의 ‘말세삼계설’을 통해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장교수에 따르면, 길선주의 말세신학은 ‘지나가는 세대’를 옹호하는 보수적 원리가 아니라 ‘다가오는 시대’를 예비케하는 초월적 신앙의 힘으로도 충분히 재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평양 대부흥운동에서 간과되어왔던 긍정적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을 통해 보수주의가 갖고 있는 자기모순을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해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윤재 교수의 논평에 대하여 최형묵 목사는 1907년을 재해석할 혹은 전유할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자기중심적 교세확장을 위해 순치(脣齒)하고자 노력하는 보수기독교의 교권이 건재하고 있는 현재의 담론장 안에서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전략적으로도 오히려 더 부적절하다는 반론을 폈다.


김진호, “바람 같은 영은 항상 우리의 인습화를 향해 도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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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을 가진 후 두 번째 발표가 이어졌는데, 발표자로 나선 김진호 목사는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에 관한 많은 연구물들이 놓치고 있는 지점으로서, 1904년에 발발한 ‘러.일 전쟁’과 대부흥 운동의 연관성을 지적하는데, 이는 대부흥운동의 진원지인 평안도가 바로 ‘러.일 전쟁’의 배후지였다는 점 때문에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지적이라는 것이다. 김진호 연구실장에 따르면, 1907년의 사건은 한국기독교의 공통감각을 형성하는 초석이 된 사건이며, 신앙의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이 사건에서 코드화된 기독교적 위기관리의 장치가 작동되어 왔다는 것.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신앙은 다양한 욕망, 다중적 주체를 참지 못해하는 심성을 일상화시켰고, 이러한 다중성을 조정하는 합리적 방식보다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에 의한 통합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서에 나타난 성령은 자폐적인 열광을 가리키거나, 혹은 이런 기조와 한패거리 개념인 영웅주의적 획일주의를 나타내기보다는 강자의 주권 이해를 가로질러 모든 이에게 열린 영, 그 누구에게도 독점되지 않는 영, 해서 차별의 근거 혹은 열기로서 도구화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경계들을 해체하는 역설적인 도전이자 동력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성령이라는 화두가 1907년 대부흥운동에서와 같이 그리고 지금 그것을 다시 소환하고 있는 한국 보수기독교에서와 같이 차별화의 질서로 혹은 배제의 근거이자 힘으로서 재설정되는 것에 저항하며, 위반의 영이 연대의 영과 마주하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양희송, "성령의 정치에서 삼위일체의 정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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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기획실장이 김진호 목사의 글에 대한 "성령의 정치에서 삼위일체의 정치로"라는 논평문을 발표했다.


양희송 실장은 김진호 목사의 글 전체를 요약하는 문제의식이 “‘어게인 1907’의 슬로건 속에도 세상의 고통들을 돌아보기는커녕, 그러한 고통을 도구화하여 교회주의를 재강화하려는 전략이 숨어있음을 우려한다”라는 문장 속에 담겨있다고 지적하며 논평을 시작했다. 양희송 실장은 김진호 목사의 글에 대해 3가지 측면에서 비판적 검토를 가했다. 첫째로, 김목사의 평양대부흥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일반적인 즉 그 사건 자체의 원초적 경험과 그 이후의 동원되고 관리된 운동적 차원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나아가 사건 자체의 돌발적이고, 원초적이며, 불가항력적 속성을 너무 쉽게 배경사속에 함몰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둘째로, 성서에 나타난 성령론적 전개에 관한 다른 독법을 제시하면서 김목사의 논의는 지나치게 해체의 전략에 기울고 있음을 지적한다. 양희송 실장은 평양 대부흥운동이 원래적으로 갖고 있었던 이상과 그것이 이후에 좌절되고 왜곡된 것과는 별개임을 인식하고, 원래의 이상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싸움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희송 실장에 따르면, 평양 대부흥운동의 본질적 성격은 개개인의 죄책고백 즉 급진적 개인성이 담보된 도덕적 ‘회개’에 있다고 한다. 문제는 오늘날의 대부흥 100주년 기념행사들 대부분이 그러한 진정성있는 죄책고백을 담아낼 틀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양희송 실장은 김진호 목사가 ‘위반의 영’과 ‘연대의 영’을 연결시켜 주장하는 ‘성령의 정치’에 대한 대안으로 ‘삼위일체적 정치’의 구상을 제안한다.


즉, 김목사가 ‘성령의 정치’를 통해 옹호하고자 했던 ‘민주화’와 ‘다양성’이란 가치는 한국사회에서 ‘그리스도의 정치’로 기능한 성육신적(incarnation) 경험인 ‘민주화 운동’과 관련지을 수 있겠고, 이를 태동하게 한 좀 더 근본적 질서체계인 ‘하나님의 정치’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천명하고 있는 헌법을 불러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체토론, “맑스코뮤날레와 ‘어게인 1907’의 관계는?”


발표와 논평이 모두 끝나고, 청중들과의 질의 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그 중 “맑스코뮤날레에서 왜 갑자기 ‘어게인 1907’이 주제로 다루어진 것인가”하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최형묵 목사는 맑스코뮤날레는 우리 사회의 진보와 현실 변혁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자리이며, 비록 1907년 사건과 관련된 한국기독교의 보수화를 다루는 것이 대안적 지구화에 대한 전망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여도, 전망을 창안해 내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일도 중요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김진호 목사 역시 지금까지 맑스코뮤날레에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종교분야를 대표해 계속 참여해오면서도 막상 신학이나 종교분야의 직접적인 문제보다는 맑스주의 담론과 기독교 신학의 친화성을 모색하는 구색 맞추기식 참여에 그쳐왔음을 지적하고, 올해만큼은 기독교 내의 보다 중요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유의미하리라는 판단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역사적으로 1907년의 성령 사건과 같이 대중의 고통을 증상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이 다시금 도덕적 갱신이나 교리적 획일화, 교권의 강화로 순치되는 과정에서 확인되듯이,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그간 수행해온 고통과 폭력의 체계의 공고화 및 그 사회적 오인의 메커니즘을 발본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가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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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로 예정되었던 종료 시간을 한 시간이나 훌쩍 넘긴 6시 무렵까지 토론이 계속되었던, 이번 제3회 맑스코뮤날레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주관세션은 토론가치가 풍부한 의제설정이었다는 최종적인 평가와 함께 발표자들이나 논평자들, 그리고 청중들의 참여 열기에 있어서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했던 성공적인 행사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막을 내렸다.

* <참세상> 기사 원문(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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