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평양대부흥운동 100년,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7-24 13:16
조회
3873
* 월간 <말>지 2007년 8월호 원고입니다(070711).


평양대부흥운동 100년,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1. 끈질긴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기어코 일을 내고 말았다. 그동안 끈질기게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해온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세력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했다. 사학법의 재개정으로 사학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한 개방형이사제도는 형식만 남았고 재단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장치는 폐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보수주의 세력은 성에 차지 않은 것 같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약칭 ‘한기총’)는 개정 사학법이 재개정된 것을 환영하면서도 개방형이사제도가 남아 있는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1990년대 이래 한국 보수 기독교는 매우 공공연하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방해 왔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집회를 열어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사회적 의제들이 제기될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자신의 입장을 천명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1989년 한기총 결성 이후 그와 같은 보수 기독교의 행보는 매우 공세적이고 일관된 성격을 띠고 있다. 스스로의 이해관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타성을 띠고 있고, 따라서 번번이 사회적 보수 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향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지난 1970-80년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진보 세력의 표상처럼 인식되었다. 그것은 독재정권에 대항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활동에 참여한 기독교의 면모가 돋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 기독교의 상황은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그동안 기독교 내부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한국 기독교의 밑바탕에 자리 잡은 기조가 외적 조건의 변화와 관련하여 지난 시대와 달리 표출되고 있는 것일까?    

한국 개신교의 경우 그 교파가 무척 다양할 뿐 아니라 이념 지형에서 또한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100여년의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보수주의적 성향은 지배적인 주류를 형성해 왔다. 진보적 기독교의 역할이 두드러진 1970-80년대에도 사실 세력 면에서 보수주의의 우위는 계속되었고, 한국 기독교의 급성장을 주도했다. 경제성장 정책이 가속화된 상황 속에서 보수적 기독교는 음으로 양으로 그 수혜를 가장 적극적으로 누리며 각종 대형집회를 통해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종교로서 그 존재를 과시했다. 이 시기 기독교 보수주의가 정교분리를 표방한 까닭에 비정치적이었던 것으로 오해되고 있으나 그것은 실상과 다르다. 보수 기독교의 핵심세력들은 정교분리를 표방한 것과는 달리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정권과의 뒷거래를 통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 점에서 오늘 공세적으로 정치적 보수화 경향을 뚜렷이 보이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은 새삼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주류 한국 기독교의 보수주의는 오랜 기원을 갖고 있고 그 생명력 또한 강하다.


2.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끈질긴 압박으로 사학법 재개정의 목적을 이룬 기독교 보수주의 세력은 그 성공을 자축이라도 하듯이 지난 7월 8일 상암경기장에서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축하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렀다. 바로 그 경기장 밖에는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이 진행되고 있었다. 축하행사에서 ‘참회’의 기도소리는 높았지만 바로 곁에 있는 그 노동자들을 위한 기도와 관심은 없었다. 일상적으로 참회와 이웃사랑을 외치지만 사실은 자기중심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보수 기독교의 속성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다. 그 기독교가 기억하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그와 같은 속성을 배태한 원초적 사건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두 가지 연원을 배경으로 한다. 하나는 원산에서 시작된 선교사들의 기도회요, 또 하나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시작한 부흥회이다. 1904년 원산에서는 일단의 선교사들이 모여 자신들의 선교활동을 반성하며 통회하는 기도회를 가졌다. 뜨거운 ‘성령 임재’의 체험을 하였던 이 기도회는 한국 교회 교인들까지 참여하는 가운데 계속되었다. 이 소문이 전해져 평양의 선교사들은 그 기도회를 주도했던 하디 선교사를 평양에 초청하여 기도회를 열었다. 그 즈음 원산과 평양에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들과 독자적으로 부흥회를 이끌고 있었다. 이들은 암울한 당시 민족적 상황을 신앙적으로 돌파해보려는 동기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이들의 집회는 선교사 주도의 기도회와 결합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특히 길선주 목사가 평양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새벽기도회의 열정은 대부흥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그 부흥운동의 열기는 마침내 1907년 1월 평양에서 커다란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해 점차 전국적 현상이 되었다.    

선교활동의 부진함에서 비롯된 선교사들의 반성 동기와 민족적 위기에 대한 신앙적 대응 동기라는 일견 합치하기 어려운 배경을 가진 두 갈래의 기도회가 하나로 합류하여 대세를 이룰 수 있었던 사연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각기 다른 경로를 통한 것이었지만 ‘상처’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되었다. 선교사들의 경우 그 상처는 선교에 대한 실패로부터 기인하며, 그 실패에 대한 보상심리가 ‘성령 임재’를 추구하는 열정으로 승화되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의 경우 상처의 연원은 보다 거시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국난 위기와 관련되어 있고 국난 위기의 혼돈 상황에서 각 개인들의 무력함과 관련되어 있다. 특별히 대부흥운동이 평양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된 현상은 이와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지표이다. 농민전쟁과 외세에 의한 전쟁으로 평안도 지역민들은 막대한 물적 인명피해를 겪으며 생존의 위협을 받았다. 1906년 평양의 교인수가 급증했는데, 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암울한 상황에서 희망과 위로를 찾아 교회로 몰려왔음을 말하며, 그것이 이어지는 대부흥운동의 정서적 기반을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부흥집회에 참여한 이들은 열광적 상태에서 자신들의 상처가 치유되는 듯한 경험을 하였고, 그것은 ‘성령 임재’의 경험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선교사들의 기도회와 한국 교회 교인들의 자발적인 부흥회는 또 다른 차원의 의도된 목적에서 쉽게 결합할 수 있었다. 그것은 흔히 ‘비정치화의 신앙’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 지도자들 양편에서 동시에 추구되었다.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고 외세의 침탈로 위기를 겪고 있을 때 교회를 찾은 이들 가운데는 기독교 신앙을 근대적 자각과 동일시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통한 민족 독립의식을 고취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교회가 정치적 성격을 띠는 것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이를 매우 위험하게 생각하였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내세우면서 국난의 위기로부터 상처받은 영혼들을 ‘성령의 세례’로 치유하고자 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선교본국과 일제 당국과의 갈등을 우려하여 기독교인들의 저항적인 행동을 제어할 필요를 느꼈고 순종과 인내의 미덕을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부흥회를 이끈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경우 국난의 위기로 인한 상처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지만, 독립운동이나 정치적 저항운동을 통한 국난의 극복보다는 일종의 ‘운명적 공감’ 속에서 고난의 대속적 의미에 몰입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기독교 신앙을 내면화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급속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하기는 하였지만, 시대적인 아픔과 분노를 ‘성령 운동’이라는 종교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희석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결국 이와 같은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는 ‘숙정’되었고, 이후 지배적인 신앙의 원형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신앙의 원형은 교회의 제도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다. 한국 교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을 통한 교세확장을 발판으로 교회의 조직화를 시도하였다. 그것은 대개 교단 조직의 정비 및 교단간의 연합, 그리고 공동의 선교 경향으로 집약되었다. 또한 부흥회에서 다른 교파의 교인들이 자리를 같이하는 일이 흔해졌고, 선교회간의 지역분할 조정 타협안이 매듭지어진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러한 교회 조직의 정비는 교회의 통일성을 강화하고 동시에 신앙의 동질성을 강화하였다. 오늘날 다양한 교파들로 나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지배적인 신앙 형태 면에서 교파간 차이가 그다지 의미 없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결국 대부흥운동은 신앙의 내적 동질성 면에서나 교회 구조에서 동일한 주류 한국 기독교를 형성한 결정적 계기였다.


3. 배타성의 신앙과 물질적 축복의 욕망


신앙의 내적 동질성의 측면에서나 교회 조직이라는 외적 동질성의 측면에서 모두 대부흥운동을 통해 형성된 기독교 보수주의의 성격과 오늘 급속히 우경화된 정치적 행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대부흥운동 당시 비정치적 신앙운동이 과연 ‘비정치적’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초기 부흥회를 주도했던 선교사들의 경우 명백히 그 동기 자체가 정치적이었다. 선교사들에게 대부흥운동은 일제와 기독교와의 정치적 갈등을 회피하고 교회를 보존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일반 신도들의 경우 그와 같은 의도적인 동기가 없었다 하더라도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저항적 정치행동을 회피하고 영적인 각성을 추구하는 신앙에 몰입되었을 때 그것은 일제에게 충분히 용인될 만한 것이었다. 특별히 교회가 일제에 대한 저항의 한 거점이 되어가고 있던 상황에서 그와 같은 부흥회적 신앙으로의 선회는 일제 당국으로서는 반길 만한 일이었고 권장할 만한 일이었다. 불온시되지 않은 교회는 그로써 스스로를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사실상 정치적 거래의 한 형태였다. 한마디로 비정치화를 통한 ‘역설적 정치화’였다.  

그 신앙의 형태는 이후 조직화된 교회를 통해 계속 확산되었다. 반복적으로 계속된 부흥운동은 대체로 암울한 시대상황 가운데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교회가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위무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예컨대 1907년 대부흥운동은 군대해산과 외교권 및 경비권의 박탈, 그리고 이어진 러일전쟁을 배경으로 하며, 이어진 백만구령운동은 일제에 의한 국권의 완전한 상실을 배경으로 한다. 1920-30년대 부흥운동은 1919년 3.1민족독립운동의 좌절 상황을 배경으로 하며, 1950-60년대 부흥운동은 한국전쟁과 이어진 사회적 불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형집회의 전성기라 할 만한 1970년대 부흥운동은 급속한 경제개발과 이에 따른 전통사회의 와해와 관련이 있다. 한국 현대사는 사회적 불안이 일상화되어 있었고 그 일상화된 사회적 불안은 한국 기독교의 부흥회적 신앙의 자양분이 되었다.

사회적 동요와 불안 가운데 형성된 신앙은 자기보호적 속성을 매우 강하게 띨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동요와 불안으로 상처를 안은 이들의 자기연민은 곧바로 자기보호 본능으로 고착화된 셈이다. 그렇게 상처받은 이들을 교회가 조직적으로 감싸 안고 종교적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과정에서 그 속성은 개별 교인들의 차원을 넘어 교회 전반의 속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타적이기보다는 배타적 신앙, 때로는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배타성을 동반한 오늘 한국 보수 기독교의 속성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자기보호적 배타성의 신앙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었다. 예컨대 지배권력이 강압적 성격을 띠었던 일제치하와 유신체제하에서 그 신앙은 주로 탈정치적인 부흥운동으로 표출되었고, 한국전쟁과 같은 동요의 시기에는 극단적인 공격 성향을 보였고, 최근과 같이 상대적으로 그 지배력이 느슨한 정치체제하에서는 직접적인 정치행위로 저항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자기보호적 배타성의 신앙이 정치적 국면에 따라 타협과 저항의 사이를 오간 것이다.

한편 자기보호적 배타성의 신앙은 상처에 대한 현실적인 보상기제를 요구하는 성격 또한 강하게 띤다. 일상화된 사회적 불안에 따른 개인들의 상처는 매우 현실적인 욕구의 충족으로 보상받기를 원하는 기대심리를 낳았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에 대한 손쉬운 해결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국 보수 기독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물질적 축복의 보상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신앙의 결과는 물질적 보상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은 가장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갖는 교회의 담론이 되었다. 특별히 그와 같은 인식은 한국전쟁 이후 극단적인 불안과 궁핍의 시대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되었고 점차 일반적인 신앙 인식으로 확대되었다. 그와 같은 담론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집단 또는 국가적 차원에서 또한 유효했다. 이른바 선진국이 기독교 국가들인 반면 후진국은 비기독교 국가라는 인식이 한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유포되었고, 그런 맥락에서 성장과 발전의 논리는 아무런 여과 없이 곧 신앙의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경제적 선진화의 논리를 신앙적으로 아무런 모순 없이 받아들이고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기는 보수 기독교의 논리는 이렇게 구축되었다.  

‘성령 임재’를 갈구하는 타계적 부흥운동의 신앙과 현실에서 물질적 축복을 갈망하는 신앙은 서로 맞물린 가운데 자기를 표현한다. 그 신앙은 구체적인 물질적 보상이 희박한 조건에서는 자기의 피해를 방어하는 수동적 태도로 표현되지만, 물질적 보상이 절박하고 동시에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조건에서는 그것을 손안에 쥐려는 태도로 표현된다. 예컨대 1907년 대부흥운동 당시 신앙은 정치적인 압박을 방어하는 수세적 태도로 표출되었다면, 한국전쟁 이후 그 신앙은 물질적 보상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추세로 표현되었다. 한국 보수 기독교 신앙은 대부흥운동에서 종교적 표현 양식을 찾았다면 한국전쟁 이후 극단적인 불안과 궁핍의 시대에 세속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신앙 논리를 발전시킨 셈이다. 특별히 한국전쟁 이후 물질적 보상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기복신앙이 급격히 확산된 배경에는 극단적인 불안과 궁핍이라는 원초적 상황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쟁구호 물자의 유일한 민간보급 경로로서 교회의 역할 및 반공투쟁의 전위로서 교회 입지의 공고화 등과 관련하여 현실적으로 영향력을 지닌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1960-70년대 개발독재 시대에는 권위적인 국가권력과 갈등을 피하려는 수세적인 태도와 동시에 물질적 축복을 구하는 성장주의적 신앙이 절묘하게 결합되었고, 오늘 민주화 이후 시대에는 보수 기독교 신앙은 그 어떤 형태이든 수세적 태도를 과감히 버리고 공세적으로 모든 것을 움켜쥐려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4. 배반당한 성령의 정치


‘성령의 임재’를 갈구하는 부흥운동으로서 종교적 형식을 취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물질적 보상을 갈망하는 내적 특성을 지닌 주류 한국 기독교 신앙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성서에서 영은 흔히 바람으로 은유되거니와, 성령의 임재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기운이 임하는 것을 말한다(요한복음 3:8). 성서에서 성령 임재는 기존의 언어적 신분적 계층적 장벽을 허물고 진정한 의사소통과 화해를 이루는 것으로 묘사된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임재의 사건을 언급한 후 곧바로 원시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사도행전 2:43~47)를 말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공동체는 재산과 소유물을 공유하고 사랑을 구현한 공동체였다. 성령의 임재는 현실의 질서에 대해 순응적이기보다는 전복적인 것으로 경험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난 성령운동들 역시 기존 체제의 정당화나 그 체제에의 순응이 아니라 기존 체제의 해체를 노렸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고무하였다.

한국 교회에서 부흥운동이 개시되었을 때, 그것을 성령의 임재로 인식한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체험은 일종의 해방 체험일 수 있었을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 당시만 하더라도 성령의 임재를 해방의 체험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징후들은 많았다. 교회 안에서 반상의 차별이 없어지고, 남녀가 동석을 하고, 여성들이 당당하게 발언의 주체로 나선 현상 등은 확실히 그와 같은 해방의 체험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 안에서 성령 임재의 체험으로 인한 주체화는 억압되었다. 무엇보다도 선교사 주도하의 교회 조직화 과정에서 그것이 정치적 저항의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차단되었다. 성령의 체험은 절대자에 대한 순종과 현존 질서의 권위에 대한 순응으로만 보증되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교회들이 사학법 재개정을 주도한 사실은 자기이해에 훨씬 민감한 주류 한국 기독교의 속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그것은 그 보수 기독교가 시민사회의 공공성보다는 자기이해에 훨씬 민감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 기독교가 1907년 대부흥운동을 기억하는 방식도 사실은 자기중심적인 교세확장의 논리에서 전혀 벗어나 있지 않다. 흔히 대부흥운동의 요체를 ‘참회’와 ‘부흥’으로 집약하고 있지만, 대부흥운동을 기억하는 기독교는 ‘참회’를 입으로만 외칠 뿐 ‘부흥’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오늘 보수 기독교가 ‘부흥’을 기치로 자기 확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 2006년 종교인구 통계조사 결과 드러난 개신교 인구 감소 현상은 주류 한국 기독교 입장에서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사실 주류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공신력의 추락과 관련되어 있지만 기독교는 그 점을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외부의 비판적 태도가 기독교의 이미지를 실추시킨 것으로 생각하고 선명한 자기입장을 내세움과 동시에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공세적 태도를 취하는 가운데 부흥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또 한편 보수 기독교는 한국 사회 보수 세력의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위기담론과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주류 한국 기독교는 사회적 이슈가 되는 매 사안마다 보수 세력과 입장을 동일시해온 데서 보여주듯이 민주화 이후 개혁적 정권의 등장을 좌파의 확산으로 인식하고 있고 이러한 현상은 반공 보수주의의 보루로서 한국 기독교의 위상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류 한국 기독교는 좌파세력을 척결하고 반공주의의 보루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시 강화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정치적 저항세력을 견제하는 효과를 지녔던 1907년 부흥운동의 재현에 대한 기대이다.

그 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는 마침 대통령 선거가 겹쳐 있다. 이 절묘한 기회를 주류 한국 기독교가 쉽사리 간과할 리 없다. 그러기에 자기중심적 교세확장과 더불어 사회적 영향력의 확보를 위한 보수 기독교의 행보는 분주하다. 하지만 그 시도는 성공해봐야 기껏 배타성 강화를 동반한 교회의 권력화를 의미할 뿐 모든 족쇄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성령의 임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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