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선교’와 ‘봉사’의 질적 차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7-24 17:59
조회
3709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58번째 원고입니다(070724).


‘선교’와 ‘봉사’의 질적 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한국의 젊은이들이 탈레반에게 인질로 붙잡히고, 기어코 희생자가 발생한 사태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더 이상 희생이 발생하지 않고 속히 그 사태가 해결되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 불행한 사태가 함축하고 있는 여러 의미를 새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애초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공격과 이후 여러 나라의 군대 주둔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선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미국에 이어 선교사 파송규모 면에서 두 번째 선교대국이 되었지만, 자랑만 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많은 경우 선교현지의 문화나 관습을 무시한 채 이뤄지는 일방적인 기독교 신앙의 전파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 서구 교회들의 전도활동의 악습을 답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선교기관간의 무분별한 경쟁으로 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슬람권에서의 선교는 이슬람이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성서를 원뿌리로 하고 있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권과의 극한적인 대결이라는 불행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점 등 양 측면을 충분히 헤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없는 것 같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 선교활동이 유별나게 이뤄진 탓이겠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은 곧 기독교 선교사로 인식될 정도이고 그만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쉽다고 한다. 이번에 피랍된 한국 젊은이들의 활동이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선교’와는 다른 현지인들에게 필요한 ‘봉사’ 활동으로 알려져 있지만, 탈레반과 같은 무장세력에게 그 구별이 유효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는 않다. 중동언론들이 피랍자들을 ‘한국인 기독교도’ 또는 ‘선교사’로 일컫고 있는 것은 그런 사정을 반영한다. 이쯤 되면 기독교인으로서 선교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봄직하다.


일전에 캐나다연합교회를 방문했을 때 선교 개념의 변화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캐나다연합교회는 선교 개념의 변화를 “자선에서 정의로”라는 말로 압축하며, 자선(charity), 봉사(service), 옹호(advocacy), 정의(justice)로 그 의미 변화를 설명했다. 푸드뱅크의 예를 들어 자선은 즉각적인 필요에 응하는 것으로, 봉사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푸드뱅크에서 일하는 것으로, 옹호는 공동체의 부엌과 신용협동조합 등을 만듦과 아울러 정부에 로비활동을 펼치는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의는 공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활동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사실상 특정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전도’와 같은 의미의 선교 개념은 이미 뛰어넘고 있다. 이른바 선교대상에게 필요한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을 선교로 보고 있는 셈인데, 그것마저도 시혜자와 수혜자 관계 안에 있는 선교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공평하고 정의로운 관계의 형성을 지향한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무고한 희생 앞에 우리 모두 통탄해야 할 때이다. 또한 더 이상의 희생이 없이 피랍자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할 때이다. 그러나 동시에 ‘미전도종족지역’이라는 식의 딱지를 붙여놓고 자기과시적 활동을 펼치는 것을 선교로 아는 단견에서 벗어나 정말 절실한 것이 무엇인지 찬찬히 해답을 찾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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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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