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고난주간 묵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4-09 00:14
조회
3890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55번째 원고입니다(070407).


고난주간 묵상


이 글이 지면에 나갈 때쯤이면 고난주간이 이미 지나고 부활절 둘째주간을 맞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 고난주간에 미리 글을 쓰고 있으니 고난주간 소회 한 토막을 피할 수 없다.

고난주간 첫날 두어 달 전전긍긍하던 글 한편을 마쳐 마음이 가볍다. 게다가 여느 때와 달리 외출약속 하나 없으니 한가롭기까지 할 참이었다. 그러나 어디 그게 뜻대로 되랴? 바로 그 고난주간 첫날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니 마음이 산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비스분야는 너무 방어를 잘 해 불만”이라는 대통령 담화를 들으면서는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싶어졌다. 협상 주역들이 ‘A+’라느니 ‘수’라느니 자화자찬하고 의원들이 그들을 일러 ‘영웅’이니 ‘전사’라느니 추켜세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무고한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매달아놓고 제비뽑기로 그 옷을 나눠 갖는 로마병사의 짓거리가 떠올려졌다.

마음이 어지러운 중에 과제가 맡겨졌다. 그동안 교단의 동역자들이 사순절을 맞아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저지를 위해 40일 연속금식기도를 해왔는데, 부활절 둘째날 기도회를 마무리하는 결의문 초안작성을 내게 맡겨왔다. 참담한 심정으로 결의문 초안을 작성했다. 단순히 국가간 경제적 이해득실이 문제가 아니다. 선진경제로 진입한다는 환상으로 고통을 겪을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배려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무심한 맘몬의 논리가 끔찍한 것이다. 그 끔찍한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새기는 결의로 고난주간 묵상을 대신했다.

엉뚱한 이야기다 싶겠지만, 외출약속이 없는 여유 덕에 모처럼 과제에 매이지 않는 독서를 틈틈이 했다. 눈길 가는 대로 붙잡은 책이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200여 년 전 실학자 홍대용 선생의 북경 여행기 <을병연행록> 한글판이다. 조선의 꼿꼿한 선비의 꼼꼼한 여행기가 무척 흥미롭다.

그 흥미로운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아무래도 눈길을 끄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조선 선비의 첫 인상이다. 홍대용은 북경 천주당에 그려진 성화상을 보고 놀란다. “북쪽 벽 위 한 가운데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는데 여자의 상으로,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 데를 바라보니, 그 무한한 생각과 근심하는 기상이다. .... 눈동자가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법이었다.” 이것은 기이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그린 성화상을 보고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서쪽 벽에는 죽은 사람을 관 위에 얹어놓고 좌우에 사나이와 계집이 혹 서고 혹 엎드려 슬피 우는 모양을 그렸는데, 소견에 아니꼬와 차마 바로 보지 못하였다.”

200여 년 전의 조선 선비가 차마 바로 보지 못했던 그 장면이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우리는 너무도 편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모르는 사이 끔찍한 고통에 대해 둔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퍼뜩 생각이 스쳤다. 고난주간 두 번째 묵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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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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