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신학적 평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7-04-19 21:05
조회
4196
한미FTA기독교공동대책위원회 대토론회 - 기독인이 바라보는 한미FTA

2007년 4월 19일(목) 오후 4시 / 기독교회관 2층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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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신학적 평가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1. 한미 자유무역협정 타결과 엇갈리는 두 시선


2007년 4월 2일, 그 날은 마침 고난주간 첫날이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고난을 겪은 고난주간 첫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었고, 그 협상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대로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안이 고난주간 첫날 체결된 것도 의미심장하거니와 이후 일련의 사태들 또한 영락없이 십자가 처형 현장을 방불케 했다. 대통령은 “서비스분야는 너무 방어를 잘 해 불만”이라고 기염을 토했는데, 도대체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싶을 지경이었다. 협상 주역들은 ‘A+’라느니 ‘수’라느니 자화자찬하고 의원들은 그들을 일러 ‘영웅’이니 ‘전사’라느니 추켜세웠다. 그것은 마치 무고한 예수를 십자가 위에 매달아놓고 제비뽑기로 그 옷을 나눠 갖는 로마병사의 짓거리를 연상시켰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렇게 이 땅에서 재현되었다. 협상이 벌어지던 그 현장에서도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그 협상을 중단시키고자 절규하였고, 협상의 타결로 희망을 잃은 축산 농민의 비극적인 소식 또한 전해져 오는 터였다. 그 절규와 절망의 몸짓은 협상 주역들에게 우롱거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보수 기독교계는 곧바로 협상 타결을 환영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다음 날 “더 큰 거대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방을 선택한 용단에 일단 환영한다”며 “협상 타결을 위해 14개월 동안 수고한 관계자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보낸다”고 했다. 또한 “국회 비준 역시 흔쾌히 수용되어야 한다”며 “한미 FTA가 국제화 시대의 경쟁 동력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 눈에는 무고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아무렇지 않게 조롱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사태가 어째서 또 다른 한편의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대대적으로 환영할 만한 사태로 보이는 것일까? 도대체 그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 기독교인들의 상당수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발효로 수혜를 누리는 층에 속해서일까? 아니면 실질적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모종의 공모관계 내지는 공감대 때문일까? 기독교인의 절대 다수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수혜를 누리는 층에 속하리라는 가정은 별로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세력과 기독교 내 세력간의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공모관계 내지는 공감대 때문에 그것을 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이데올로기적 공모관계 내지는 공감대는 사실 한국 기독교 안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 탓에 실제적 이해관계와 괴리되는 판단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빈번하고 그 판단은 보수적 사회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현실적 사안에 대해 판단을 흐리게 하는 기독교 신앙 담론상의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내용을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그에 앞서 순전히 사실적 차원에서 그 효과를 예측하는 것과, 그 효과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판단이 필요하다.



2.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불투명한 경제적 효과


한미 자유무역협정 효과에 대해 판단할 때 가장 일차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역시 경제적 차원에서의 득실 문제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담화에서 그야말로 ‘먹고 사는’ 문제라고 말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장 예측할 수 있는 경제적 실익은 그 손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할 뿐이다. 가장 큰 수혜를 누릴 것으로 꼽히는 자동차와 섬유 분야마저도 그 실익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를 내세워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성공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관세 철폐로 인한 수출 증대 효과, 외국인 직접투자를 비롯한 투자 확대, 경쟁촉진을 통한 경쟁력 강화가 소득증대효과를 가져오는 한편 물가안정과 소비의 선택폭 확대로 인한 소비자후생의 증대가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이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수사는, 최고 선진경제권인 미국 경제와의 접목으로 한국 경제의 선진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부의 논리는 최근 협상 타결 직후 국민여론 조사 결과(서울경제신문과 한국 리서치 합동조사)를 볼 것 같으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는 매우 미묘한 양상을 띠고 있는데, 양극화 심화 우려(65.8%)와 함께 중소기업과 농업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를 하면서도, ‘우리 경제가 선진경제로 도약하는 발판이 될 것’(74.6%), ‘국내 소비자에게 이익이 될 것’(71.8%), ‘미국 시장 안정적으로 확보 기회’(67.5%) 등 정부가 선전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의 긍정적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 소비자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구매능력을 상실하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겠지만 그나마 그 기대를 제외하고는 긍정적 효과로 기대되는 것들이 지극히 막연하고 심지어는 터무니없는 것들일 뿐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선전하는 기대 효과에 호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정부의 경제위기 담론에 편승하여 어떤 돌파구를 기대하고 있는 심리 현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과연 그와 같은 기대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을까? 경제적 효과에 대한 기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오히려 한국 경제의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예측이 타당성을 지닐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단순히 상품의 관세철폐를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관세장벽을 철폐하는 데 주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와 사회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 역시 그 점을 의식하고 ‘제도의 선진화’를 역설하고 있지만, 과연 제도의 선진화인지도 의문이거니와 설령 선진화가 맞다 하더라도 대자본의 공세 앞에 그 목적을 달성할 여유는 있는지 의문스럽다. 필경 경쟁력 있는 대자본만 살아남고 여타의 부문은 붕괴하는 파국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고, 그 경우 일반 국민들의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부는 마치 도박을 하듯이 외부충격에 의한 한국 경제의 활로를 찾으려 하고 있는 셈인데, 그 미래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3.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평가


그러나 더 우려되는 것은 정부가 말하는 소위 경제 선진화가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와 동시에 심각한 문제들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경제적 실패로 귀결될 경우 그 피해는 국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고통을 안기겠지만, 경제적 성공으로 귀결된다 하더라도 대다수 평범한 국민들에게 고통이 완화되기는커녕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 정말 심각한 문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그 결과의 경제적 성패를 넘어(혹은 포함하여) 야기될 수 있는 제반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평가를 포함한다.

기독교 윤리적 평가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것은 약자에 대한 관심사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출애굽한 히브리 민중을 계약의 상대로 삼은 구약성서의 전통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 예수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성서는 가장 연약한 사람들과 생명이 그 존재를 인정받고 그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때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고 피조세계의 모든 생명이 존속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기독교 윤리는 그와 같은 성서적 전통을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한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효과를 예측하면서, 일반적으로 기독교 윤리의 관점에서 중요시되는 몇 가지 차원 곧 사회적 정의, 생명질서의 보존, 문화적 다양성, 평화수립 등의 차원으로 나눠 그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정의와 공공성을 심각하게 훼손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은 자본과 상품의 자유는 철저하게 보장하되 사람의 자유는 보장하지 않는다. 특히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그 어떤 자유무역협정보다 그 점에서 강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자본의 경쟁과 효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무역 체제는 경쟁력 있는 자본의 우위만을 보장할 뿐 경쟁력 없는 일체의 부문을 도태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사회 전반적으로 양극화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이는 기업 및 산업의 양극화, 고용의 양극화, 소득의 양극화, 교육 및 건강의 양극화,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인간 자체의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공공정책도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특히 한미 자유무역협정상의 투자자-국가제소 조항은 공공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정부의 어떤 정책이든 그 시도 자체를 제약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국민의 기본 건강생활 및 생태계 보존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예컨대 신약특허 관련 조항 및 사실상 약값적정화 실패는 전반적으로 의료비 부담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빈곤층 중환자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줄 것이며, 광우병 감염 위험이 있는 쇠고기의 수입개방, 유전자조작식품의 규제 완화 등은 국민들의 건강을 항상적인 위험상황에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자동차 배기량에 따른 세제 조정은 가중되고 있는 대기오염을 막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기준의 후퇴를 의미한다. 농업의 피폐화는 가장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서 한 산업부문의 위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농업은 식생활문화를 포함한 우리의 생활문화의 원천을 이루고 있고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생태계의 평형유지에도 중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으로 농업은 최대의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경제적 피해를 넘어 우리의 생활양식과 생태계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것이다. 이 점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지극히 반생명적이다.

세 번째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문화적 다양성을 침해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스크린쿼터는 한국 문화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다. 그 덕분에 대자본을 배경으로 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잠식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스크린쿼터의 철폐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거 잠식현상 가져올 뿐 아니라 그나마 제한된 한국 영화 가운데서도 흥행에 성공을 거둔 영화만이 생존할 수 있는 구도를 고착시킬 것이다. 여기에 미국 유선방송의 진출로 인한 시청자의 선택권 제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적 재산권 연장과 인터넷상의 지적 재산권 강화 등은 출판을 포함한 여러 문화산업의 위축과 편중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제도의 선진화라는 명분으로 이뤄지는 제도의 변화 등은 경제적 차원에서뿐만 아니 문화적 차원에서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우려스러운 사태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그러기에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심각한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네 번째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수립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지 의문시된다.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개성을 포함한 북한지역 생산 제품을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근거를 확보함으로써 남북화해의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실질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조심스럽게 예측해볼 수 있는 것일 뿐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남북화해나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확립에 적극적인 동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한국과 미국간의 정치군사적 동맹에 더하여 실질적인 경제적 통합의 효과를 가져와 동북아시아 지역 내에서 균형자로서 한국의 역할이 무위화되고 미국 주도의 동북아시아 정책이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같은 역내 국가로서 긴밀히 협조해야 할 중국과 일본을 경쟁과 견제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가운데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그 여파가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소지는 더욱 협소해진 상태다. 결국 남북한과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수립과 관련해서도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잘못된 선택이다.  



4.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 기제 비판


이처럼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경제적 득실의 차원에서도 그 전망이 불투명하고, 기독교 윤리적 가치판단의 기준에서도 매우 위험스러운 결과가 예측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기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앞서 지적한 대로 그 태도는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공모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적 공모관계를 가능케 하는 신앙적 정당화 기제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신앙적 정당화 기제들은 개별 기독교인들에게 스스로의 실제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서까지 사실적 판단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기독교 윤리적 가치기준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 평범한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해악을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그 신앙적 담론들을 신앙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내면화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기독교 윤리적 가치판단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에 덧붙여 몇 가지 주요 신앙적 담론들을 살펴보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첫 번째 한국 기독교는 신앙의 국민화 내지는 신앙의 민족화를 지고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 한국 기독교인들이 기도할 때 최고의 목표는 언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이다. 한국에서 민족주의 형성은 일제의 경험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며, 한국 기독교 신앙의 형성 또한 일제치하의 경험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그 까닭에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진보적 사회운동 역시 그 유산을 공유했고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늘날 진보 세력 내에서 민족주의는 여러 각도에서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반해 보수 세력 안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보수주의 기독교 안에서 ‘민족주의+국가주의’는 신앙 담론과 결합하여 더욱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위험한 것은 그 논리가 ‘국익’ 담론과 손쉽게 결합하고 그것을 정당화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 기독교가 한국 경제의 선진화 논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기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와 같은 논리가 지속되는 한 국익을 벗어난 보편적 가치기준이 자리할 틈은 없다. 기독교 신앙 담론이 이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부차화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한국 기독교는 여전히 성장주의 논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구적 근대화와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했던 한국 기독교는 197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음으로 양으로 그 수혜를 가장 적극적으로 누리며 성장을 구가했고 성장주의를 체질화했다. 그 성장주의는 경제 성장논리와 전혀 다름없이 교회 규모의 성장 및 개별 기독교인들의 물질적ㆍ경제적 번영을 복음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 동일시했다. 그와 같이 규모의 성장을 추구하는 논리는 복음의 육화와는 거리가 먼 외적 규모의 확장 그 자체에 몰두하게 만든다. 또한 성장논리는 성장 자체에 집착하는 탓에 앞만 향해 달리는 저돌적 성공주의의 환상을 키우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유보시키는 것을 당연시한다. 더 많은 물질적 조건을 갖추어야 행복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허덕일 뿐 지금 당장 누려야 할 삶은 뒷전을 제치게 되는 것이다. 외부의 충격을 통해서라도 경제적 규모를 키우고 그것을 경제적 성공으로 간주하는 경제 선진화 논리와 염치없는 기독교인들의 성장주의는 그렇게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성장주의는 수치심을 모르는 걸인의 철학에 지나지 않는다.

세 번째 한국 기독교는 희생과 대속의 논리를 남용하고 있다. 희생과 대속의 논리는 불가피한 희생을 정당화하고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어린양의 희생과 그로 인한 죄의 대속은 고대 종교의 제의적 맥락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고, 기독교 신앙 또한 그 유산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 사건은 희생과 대속의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다. 유일한 대속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더 이상의 희생자와 대속자가 필요 없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끊임없는 희생과 대속을 강요하는 현실의 악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그 악순환의 종지부로서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는 데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이 있다. 민중신학은 이를 ‘단’(斷)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 신앙을 가지고 있는 한 끊임없이 희생과 대속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제의적 표상에 사로잡힌 기독교는 끊임없이 그 논리를 신앙의 요체로 삼음으로써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희생의 사태를 불가피한 신의 섭리로 오도하게 만들고 있다. 희생과 대속의 악순환에 대한 종지부로서 십자가 사건이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숱한 희생을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기제로서 그 사건이 오용되고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국익과 성장의 논리는 그 희생과 대속의 논리로 쉽사리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농민들뿐만 아니라 대다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희생시키는 국익과 경제적 성장이라면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그렇게 오용되고 있다면, 우리는 강요된 희생과 명백히 구별되는 자발적 섬김의 의미를 새삼 주목해야 하며 그 본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새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물질적ㆍ경제적 조건의 충족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환상에서 벗어나, 그 어떤 조건에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예수의 삶에 비추어 오늘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관철되고 있는 맘몬의 흉계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 관련 기사 링크 *******

한미FTA, 신앙과 생태학적 관점으로 보자  

한미FTA기독교공대위 토론회 개최…정태인 교수, "FTA 내용 알려지면 누구도 찬성 못해"[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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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국기독교장로회 회보 484호(2007.5)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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