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민족주의를 위한 변명인가?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10-20 22:58
조회
3389
한국기독교학회 제35차 정기학술대회 한국문화신학 분과 발표에 대한 논평

2006년 10월 20일(금) 4:30 / 대전신학대학



민족주의를 위한 변명인가?

- 이찬수,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만나는 논리: 한국적 상황을 중심으로”에 대한 논평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위원)



1.

한동안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의구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의구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부정적 폐해를 문제 삼기보다는 그 긍정적 정당성을 의심 없이 인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안에서의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에 기인한다. 일제 침략하에서 민족은 국가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외세에 대항하는 주체를 의미했다. 그와 같은 조건하에서 한국 민족주의는 이른바 ‘해방적 민족주의’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에도 외세에 의한 분단으로 민족통일의 과제가 여전히 미결로 남아 있는 탓에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은 그다지 큰 변화 없이 한국사회 구성원들에게 공유되었다. 분명 일제하에서 민족주의 노선과는 다른 사회주의 운동이 해방운동의 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었고, 해방이후 역대 정권들이 한결같이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심지어는 박정희 정권마저도 민족적 민주주의를 운위했던 형편은 민족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하에서의 경험과 해방이후 분단 상황에서의 경험은 민족주의의 가치를 여전히 의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여러 진보적 운동들마저 공히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니고 있거나, 그 유산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는 것은 그런 사정에서 비롯된다. 특별히 한국 기독교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그 점에서 한국 교회사를 민족 교회사로 이해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풍토인지도 모른다. 특정한 학자의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누구나 쉽사리 공감하는 하나의 입론인 셈이다. 이런 사정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한국교회에서 매우 당연시되는 현상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교회 안에서 최고의 기도제목은 거의 예외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이다.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를 위한 기도로,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지역사회 등을 위한 기도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언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이다. 대개 그 다음 기도제목은 없다. 어떤 공동체의 범위를 고통의 체감 범위와 동일시할 수 있다면, 대다수 한국 기독교인들의 고통 체감의 범위는 나라와 민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와 같이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민족은 지고의 가치가 되어 있고, 의심이나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2.

이찬수는 한국 기독교에서 그렇게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민족주의를 분석한다. ‘민족’, ‘민족주의’에 대한 개념정의에서부터 시작하여 한국 근대사에서 민족주의와 기독교와의 관계 문제를 밝히고 있다. 민족주의 운동과 기독교의 관계를 현상적 차원에서 기술한 연구들은 많지만, 민족주의와 기독교 관계의 내적 논리를 규명하는 연구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현실에서 이 글은 그 시도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그 시도는 비단 과거 역사에서의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관계를 규명하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향후 진로에서의 어떤 방향성을 시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찬수는 민족의 기원에 관한 여러 견해들을 검토함으로써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민족이 혈연적 공동체로 제한되지 않은 일종의 역사적 공동체라는 사실은 민족에 관한 논의의 공통된 견해이다. 민족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는 가운데 구성된 역사적 공동체인 것이다. 그와 같은 공통된 견해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기원에 관한 논의들 사이에는 다소간의 편차가 있다. 대체로 서구의 학자들은 민족형성이 근대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욱더 구체적으로 확정하여 민족의 형성은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전형적인 서구적 발전궤도와 다른 경로를 거친 사회, 예컨대 한국과 같이 비교적 오랜 세월동안 단일한 지역에서 정치와 문화를 공유해 온 경우에도 그와 같은 입장이 여전히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 논란이 되고 있고, 따라서 서구의 민족 기원 이론을 보완하려는 시도들 또한 있다. 민족 기원에 관한 여러 주장을 살피는 가운데 이찬수가 인용한 바와 같이 ‘전근대민족’의 형성 경로를 밝히는 신용하의 민족 이론은 그와 같은 보완 시도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찬수가 주목하는 것은 민족형성의 다양한 경로가 아니라 근대적 민족 내지는 민족주의 현상이다. 따라서 다양한 민족 기원 이론의 차별성을 그다지 안중에 두지 않고, 민족을 형성하는 객관적 조건에 더하여 ‘민족의식’이라는 주관적 요소의 결합으로 비로소 형성된 근대 민족을 주목하고 있다. 나아가 근대적 민족 형성의 결정적 요인으로서 민족의식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형성은 타자에 대한 대응논리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점을 또한 지적한다.

아마도 타자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민족주의의 성격을 주목한 것은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관계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타자에 대한  대응논리는 수세적 방어의 성격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수용 내지는 변용의 성격 또한 지니기 때문이다. 동학운동과 갑오개혁 등 자생적 근대화와 함께 민족의식이 싹틀 즈음 급속히 퍼져나간 기독교는 한국 민족주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당대의 기독교는 분명 외래적인 것이었지만 근대적 문명으로 수용된 기독교는 전통적인 중화주의와 일본의 억압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를 수용한 주체들이 전적으로 동일한 이해를 하고 있었는지 또는 기독교 자체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기독교의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과 그 조직망은 한국인들에게 수평적 공유의식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민족의식 형성 기여를 하게 되었다고 이찬수는 지적한다. 봉건적 위계질서와 차별의식이 존재하는 조건에서 사회구성 주체의 동일성이 형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활동이 수평적 공유의식을 일깨우고 결국 그것이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이 견해는, 민족에 대한 사랑을 부르짖는 호교론자의 변증과 달리 기독교 선교활동의 사회적 효과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평가다.

그러나 이찬수가 정작 의욕을 갖고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선교활동이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한 외재적 효과보다는 민족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보다 긴밀한 내적 관계인 듯하다. 민족과 기독교 사이에 밀고 당기는 관계, 결국은 구별되면서도 어떤 융합을 해내는 상호작용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시도이다. 이와 같은 시도는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에 관한 다른 연구자들의 평가를 넘어서 그 주제와 관련하여 독창적으로 기여하고자 하는 이찬수의 의욕의 표현일 것이다.

이찬수는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한 사회가 외래적 요소와 만날 때 나타나는 “문화적 되감기”(타케우치 요시미) 현상을 주목한다. 외래적인 것은 일단 해당 사회의 기존 전통을 제거하는 효과를 발휘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사회의 내재적 힘이 외래적인 것을 되감싸 안아 양자를 동시에 변용시키는 창조적 과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과 기독교가 만날 때 되감싸 안는 주체로서 내재적 또는 잠재적 힘은 오랜 시공간의 역사를 통해 형성되어 온 ‘민족의식’이라고 본다. 결국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은 서로가 서로를 변용시키는 작용을 하여, 한편으로는 민족의식을 강화하고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구체화를 이룬다. 다시 말하면 양자는 서로가 서로를 매개하며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는 셈이다. 비단 민족과 기독교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상대 사이에서 서로가 서로를 매개하는 구성원리의 일상언어적 표현은 ‘적(的)’의 논리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볼 때 근대 한국 민족과 기독교의 관계는 한편으로 기독교적 민족, 또 한편으로는 민족적 기독교로 명명될 수 있다. 그것이 고착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는 형성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인은 민족 안에서 ‘형성되어가는 기독교인’이 되고, 한국 민족주의자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어가는 민족주의자’가 된다. 뼈대만 간추리면 그 대강의 요지는 그렇다.


3.

이찬수의 이와 같은 논구는 근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상호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성과이다. 그것은 한국 민족주의 형성에 기독교가 기여한 바를 밝힌 동시에 한국적 기독교의 형성에 민족주의가 끼친 영향을 밝힌 성과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성과는 민족주의와 기독교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논리를 규명한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의의를 충분히 높이 평가하지만, 이 글 전반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의문 사항을 지적함으로써 논평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첫째, 민족의 역사적 성격을 일관되게 강조하지만 사실은 은연중 민족을 항구적 실체로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여기서 역사적이란 그 기원이 장구하다는 것을 뜻한다기보다는 특정한 시공간 안에 제한되어 가변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해 그것은 자연적 내지는 혈연적이라는 말에 대립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민족의 가변성을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민족구성의 변화 내지는 외연의 확장을 시사할 뿐 민족이라는 공동체적 형식 자체의 해체 내지는 변화 가능성은 시사하지 않은 것 같다. 인간의 존재방식으로서 민족이라는 공동체적 형식이 과연 보편성을 지니는 것일까? 다른 형태의 공동체적 형식에 대한 전망은 과연 무모한 노력일까? 근대적 현상으로서 민족에 대한 엄밀한 평가의 시각이 필요할 듯하다.    

둘째, 민족 구성원의 동질성과 선택적 의지로서 민족의식에 대한 강조는 민족 내부의 다양한 주체들의 차이를 간과한다. 민족주의의 시대, 특히 한국과 같은 역사적 경험을 지닌 사회에서는 민족주의가 가장 강력한 공동체적 귀속감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계급ㆍ계층 또는 여타의 분기점으로 갈리는 다양한 주체들에게서 민족주의적 귀속감이 의문의 여지없이 제일의적인 것일까? 더욱이 그 다양한 주체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민족주의를 선택한다고 볼 수 있을까? 민족주의가 자기완결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의문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명이 없는 것 같다.

셋째, 결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 글이 마치 민족주의에 대한 변명처럼 느껴지는 것은 오독의 탓일까? 이 글의 관심사가 근대 한국사회에서의 민족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에 한정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루는 시각은 그야말로 역사적 관점이어야 한다.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상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민족, 그리고 그 공동체적 형식에 기반한 민족주의가 앞으로도 상당한 생명력을 누리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 근대사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해방의 논리로 작동되는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민족주의는 해방의 논리로서보다 억압의 논리로 또한 작동되고 있다.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하는 한국의 현실에서도 민족주의라는 동일성의 논리가 어떤 폐해를 불러일으키는지 쉽게 목격할 수 있고 또한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현실에서 민족주의를 넘어선 전망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특별히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갈망하는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전체 2
  • 2006-10-21 10:12
    먼저 바쁘신가운데에서도 논평도 문장으로 구성하는 성실함에 감복합니다.
    rn경제사에서도 민족주의에 관한 논의 초미의 관심사이기에 잘 읽어보았습니다.
    rn서양과는 다르게 동양에서의 민족주의 기원의 차이, 민족을 항구적 실체로 보는 견해에 대한 지적, 민족이라는 개념 안에서의 다양한 실체 등, 고집스럽게 80년대의 생각을 견지하면서도 개방되어 있는 목사님의 견해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rn'오타' 마르크스주의자^^

  • 2006-10-21 10:50
    문장으로 작성하지 않으면 말만 많아지고 내용은 부실해질 수 있어 불가불 문장으로 작성할 수 밖에 없지요.
    rn안식년 간다니까 떠맡겨진 과제들, 이제야 다 끝났습니다. 몸에서 진액이 다 빠져나간 듯한 상태입니다.
    rn꼼꼼하게 지적해주셔서... 오타 수정했습니다.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