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사람의 얼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9-06 12:31
조회
2929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46번째 원고입니다(060906).


사람의 얼굴


지하철을 타면 사람 얼굴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차창 밖은 시커먼 어둠이니 볼 게 없고, 차 안에 붙은 광고물은 늘 그대로이니 몇 번 보고 나면 식상한다. 하지만 차에 올라 마주치는 치는 얼굴들은 늘 다르다. 운 좋게 자리를 잡으면 정면으로 앞줄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물론 다른 사람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할 수는 없다. 공중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니, 그저 보지 않는 척 힐긋힐긋 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한 스님이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아주 편안한 얼굴이었다. 고승대덕과 같은 풍모는 아니었지만 누구라도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나이는 예순 전후쯤 되었을까? 비구니가 아니라 비구승인데도 그 인상은 마치 어머니와도 같았다. 잿빛 승복에 검정고무신을 신고 시종일관 무표정했지만 그 꾸미지 않은 표정은 흐트러짐 없이 편안해 보였다.

스님 바로 곁에 한 노신사가 자리를 잡았다. 순간 대조적인 풍경이 내 앞에 벌어졌다. 역시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노신사는 그야말로 한껏 차려 입었다. 깔끔한 신사복에 머리도 가지런히 넘기고 살짝 색깔이 든 안경까지 꼈다. 그리고 아주 밝은 표정으로 옆의 동행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법 재기도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인상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자아내게 하는 인상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왠지 경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표정하지만 한없이 편안하게 느껴지는 얼굴, 깔끔하고 밝지만 긴장감을 자아내게 만드는 얼굴이 내 눈 앞에 선명하게 대비되고 있으니 그 사태를 즐기지 않을 수 없었다. 복장의 차이일까? 그건 분명히 아니었다. 옷을 바꿔 입어도 그 사태는 변함없을 것 같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 내가 그렇게 남의 얼굴을 힐긋힐긋 쳐다보며 관찰하는 것처럼 다른 누군가가 내 얼굴 또한 그렇게 바라볼 텐데 나는 어떻게 비쳐질까?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표정관리를 잘 하라는 뜻이 아닐 터이다. 내면의 됨됨이가 밖으로도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일 게다.

목사 같다기보다는 서생 같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나로서는 그게 칭찬인지 뭔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번은 노점에서 물건을 두고 이래저래 이야기하는 도중 아주머니가 “혹시 하나님 말씀 전하는 분 아니세요?”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피식 웃으며 거 비슷한 것 한다고 답했다. 하나님 말씀?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라 순간 나도 움찔했다. 정말 그렇게 보였다면 더 없는 영광이겠으나, 그럴 리가?

아무튼 지하철 안의 흥미로운 풍경 덕분에 잠시나마 스스로를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진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낼 수 있다면, 그건 그 삶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을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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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http://www.salrim.net/
전체 2
  • 2006-10-06 18:51
    그러네요. 일그러진 얼굴, 심각한 척하는 얼굴..... 이런 것이 나의 얼굴인 것을 생각하니 스스로를 뒤돌아 보게 하네요.
    rn추석을 잘 지내시고 돌아오셨는지요. 아니면 지금 거북이 걸음으로 돌아오고 계시는지요.
    rn그런데, 이 훌륭한 그림들, 누구의 작품인가요?

  • 2006-10-06 23:27
    ㅎㅎ 나이가 들어가며 누구나 가끔씩은 자기 얼굴을 돌아볼 일이지요.
    rn근래에 드물게 막힌 길이었습니다. 갈 때는 생생 날아갔는데,
    rn돌아오는 길은 꽉 막혀 무려 두배 8시간 걸쳐 조금 전에 왔답니다.
    rn아, 그리고 저 그림들은 <주간기독교>에 고정적으로 그리시는 분의 작품인데 몇 년째 쓰면서도 저도 아직 인사를 나눈 적이 없군요. 언제 한번 고마운 분에게 인사라도 나눠야겠습니다.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