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4월에서 5월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5-02 22:41
조회
3117
* <천안신문> 종교인칼럼 두번째 원고입니다(060503).


4월에서 5월로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잔인한 4월’을 보내고 5월을 맞이한다. 이제 계절의 여왕 5월을 맞이했으니 그 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면 되는 것일까? 그럴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5월이 와도 잔인한 4월의 의미는 그대로인 듯하다.

엘리엇은 <황무지> 첫 구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어째서 시인은 아름다운 4월을 잔인하다고 했을까? 만물이 소생하고 나무들이 꽃을 피우는 4월을 두고 잔인하다니?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생동하는 모든 몸짓이 부질없다는 것을 말한다. 만물이 그토록 찬란하게 그토록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희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만 깊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희망의 근거가 사라진 상황에서 희망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사실은 절망을 확인해주는 것일 뿐인 현실을 말한다.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아직 깊게 남아 있던 1920년대초 인간이 처한 상황을 그렇게 직관했다. 인간 스스로 쌓은 문명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믿을 바로 그 즈음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끔찍한 대학살의 야만을 저질렀다. 엘리엇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세계, 황무지와 같은 세계 현실을 그렇게 직관한 것이다.

그 역설의 통찰 이후 인간의 문명이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류는 한 차례의 세계 대전만으로도 부족해 또 한 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렀다. 그리고 또 다시 새로운 세계질서, 새로운 세계문명을 만들겠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시인이 보기에 그것은 또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을까? 여전히 잔인하기만 세월이었다. 발전하고 번영할수록 더더욱 황무지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잔인한 4월’을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우리 역사에서 4월은 시인이 직관한 바와 같은 역설적인 의미의 잔인한 4월이 아니라 실제 그 자체로, 노골적으로 잔인한 4월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4월은 그 벽두부터 피로 물든 잔인한 달이었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반대해 일어난 민간의 운동을 권력은 처참하게 진압했고 무자비한 학살로 대응했다. 그 사건은 냉전체제가 형성되는 그 기점에 바로 그 체제에 저항했던 사람들과 무고한 민간인들을 희생시켰다는 점에서 냉전체제가 빚어낸 민중학살의 ‘원점’이요 ‘원형’이 되었다. 1960년 4월 4.19혁명이 미완으로 끝난 덕에 냉전체제에 편승한 독재체제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잔인한 4월’은 곧바로 ‘잔인한 5월’로 이어졌다. 1961년 5월 군사 쿠데타와 1980년 5월 광주 학살로 그 불행은 지속되었다.

2006년 4월에서 5월, 지금도 그 잔인한 세월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006년 4월 새만금은 마지막 물막이공사로 끝내 숨통이 막혔다. 그 용도와 파급효과에 대한 예측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막연한 경제적 이익에 대한 기대감만으로 공사는 서둘러 마감되었다. 그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사람들, 그 바다에서 살아온 숱한 생명들은 삶의 터전을 잃거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아니, 우리의 생명을 배태하고 길러온 자연 자체가 부분별한 개발의 욕망으로 가위눌려버렸다. 지금 우리의 가까운 이웃 지역인 평택 대추리에서는 또 다른 야만이 자행되고 있다. 미군기지 건설로 조상 대대로 그 땅에 살아오던 사람들이 쫓겨나고 있다. 씨앗을 뿌려야 할 이 계절에 논둑과 밭둑은 무참히 무너지고 살던 집마저 헐리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IMF 위기 10배의 효과로 농업은 물론 여타 중소 산업의 대거 몰락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측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지금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 국내 산업기반을 보호하려는 비상한 대비책을 세워도 감당하기 쉽지 않은 터에 이상한 한국정부는 서둘러 미국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있는 판이다.

이 모든 일들이 발전과 안보를 이유로 진행되는 일들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멍들고 스러진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2006년 4월에서 5월은 여전히 잔인하기만 하다. 꽃들이 피어나는 4월, 온 대지가 연초록으로 물드는 5월의 아름다움을 정말 있는 그대로 만끽하고 싶다. 그 희망이 부디 부질없는 꿈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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